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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저널 스페셜] 우주를 연구한 열정 성리학의 발전 이끌다

박영민

입력 2022. 10. 11   17:09
업데이트 2022. 10. 1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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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 성주 회연서원
조선 중기 학자 한강 정구 선생 추모
도학 전수…실학·예학 바탕 실용주의 확립
많은 서적 저술·제자 340여 명 양성
봉비암에서 용추폭포까지 35㎞의 절경
묘사한 9곡의 ‘무흘구곡’ 시비에 새겨


정구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회연서원은 1690년에 사액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지만 서원의 중심인 경회당은 존속돼 훼철된 서원들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정구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회연서원은 1690년에 사액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지만 서원의 중심인 경회당은 존속돼 훼철된 서원들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1호인 회연서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해 세워졌다.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과 함께 영남 5현인 정구 선생이 1583년(선조 16년)에 세워 제자들을 교육하던 ‘회연초당’이 1627년 지방 사림의 뜻에 따라 서원이 됐으며, 1690년(숙종 16년)에 사액을 받았다. 글=박영민/사진=백승윤 기자. 항공 촬영=주상현 기자


회연서원은 사계절이 다 멋스럽다. 하지만 봄의 회연서원은 그 멋이 더하다. 봄날 만개한 매화꽃으로 가득한 회연서원은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3월 중순이면 회연서원 뜰의 매화꽃으로 인해 수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회연서원과 매화나무의 인연은 정구 선생이 이곳에 ‘회연초당’을 세우고 서원 뜰에 매화나무 100그루를 심어 ‘백매원’이라는 정원을 만들면서다. 꼭 100그루를 심었다는 것은 아니고 많은 매화나무를 심었다는 뜻이다. ‘백매원’ 외에도 서원 곳곳에는 매화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이 매화를 사랑했듯이 그의 제자 정구 선생 또한 매화를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당시 선생이 심은 많은 매화나무는 세월이 흐르면서 현재는 3그루만 남았다고 한다.

서원 출입문 역할을 겸한 누각인 ‘현도루’. 견도루라고 읽기도 한다. 정면 3칸인 누각 아래 삼문이 설치돼 있으며 출입은 그중에서 오른쪽 문으로 해야 한다.
서원 출입문 역할을 겸한 누각인 ‘현도루’. 견도루라고 읽기도 한다. 정면 3칸인 누각 아래 삼문이 설치돼 있으며 출입은 그중에서 오른쪽 문으로 해야 한다.

한낮엔 아직 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아침저녁으로 가을 날씨를 느끼기에 적당한 지난 9월 하순 회연서원을 찾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서원으로 향하는 일행의 눈에 좌측에 서 있는 무흘구곡 안내판과 1곡 봉비암부터 9곡 용추폭포까지의 시비가 발길을 잡는다. 무흘구곡(武屹九曲)이란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대가천에 자리한 1곡 봉비암에서 성주댐을 거쳐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 수도암 아래 옥동천 계곡에 자리한 9곡 용추폭포까지 약 35㎞ 구간의 맑은 물과 기암괴석의 절경을 정구 선생이 읊은 시로 9곡 중 1~5곡은 성주군에 속해 있고, 6~9곡은 김천시 증산면에 속해 있다.

무흘구곡 시비들을 본 후 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현도루(‘견도루’라고도 함)로 향했다. 현도루 기준으로 양옆에도 매화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매화꽃이 만발한 봄에 왔다면 아름다운 매화꽃을 마음껏 볼 수 있었을 텐데 보지 못하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현도루 아래 문을 통해 발걸음 가볍게 서원 안으로 들어가 본다. 좌측으로 정구 선생이 조성하신 ‘백매원’ 정원이 보이고, 우측엔 정구 선생 신도비가 서 있다. 이 신도비는 원래 정구 선생의 묘소 부근에 세워졌다가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비의 웅장함이 성리학에서 큰 발자국을 남기신 선생의 위상을 보여 주는 듯하다.

백매원과 신도비를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서원을 둘러보기 위해 강당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향했다. 문 앞엔 수령이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마치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위엄 있게 서 있다. 서원의 창건과 훼철 등 서원이 겪어 온 모든 것을 봐 온 서원의 산증인이 아닌가 싶다. 문을 통해 서원 뜰에 들어서니 강당에서 유생들이 글 읽는 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강당인 경회당(景晦堂)을 중심으로 조성된 강학공간에는 서재(西齋)인 지경재(持敬齋)와 동재(東齋)인 명의재(明義齋)가 있다. 3칸의 대청과 양쪽에 한 칸의 방으로 이뤄진 강당에는 앞쪽엔 회연서원 현판이, 안쪽엔 경회당 현판이 각각 걸려 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유배 생활을 마치고 귀향하는 길에 평소 존경하던 정구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서원을 찾아 사당에 참배한 후 선생을 추모하며 지은 시를 적은 현판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유배 생활을 마치고 귀향하는 길에 평소 존경하던 정구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서원을 찾아 사당에 참배한 후 선생을 추모하며 지은 시를 적은 현판이다.

회연서원 현판의 글씨는 숙종의 어필이라 하기도 하고, 혹자는 한석봉의 글씨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누가 썼는지는 현재로선 고증되지 않고 있다. 글씨체의 주인이 누구인지가 중요할까? 이곳이 정구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회연서원이라는 것에는 변함없을 것이다.

경회당의 회(晦: 어두울 회)는 주자의 호인 회암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는 주자를 사모하고 학문을 따르겠다는 의지를 담아 지은 것이다. 강당 안쪽 한가운데 걸려 있는 경회당 현판 좌우엔 미수 허목이 쓴 전서체 현판인 망운암(望雲庵)과 미수의 전서를 모방해 ‘광효’라는 자를 가진 분이 쓴 옥설헌(玉雪軒)이란 작은 편액이 걸려 있다. 이는 정구 선생이 기거하던 초옥에 걸려 있는 편액들이라고 한다.

회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됐다가 1974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회연서원은 비록 훼철된 서원이었지만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철폐령 당시 강당인 경회당이 철거되지 않고 현재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동·서재를 비롯해 기타 부속 건물들은 철폐령에 따라 훼손됐지만, 경회당은 살아남아 당시 성주목의 객사로 활용됐다. 비록 서원의 임무는 잃었지만 창건 당시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경회당을 중심으로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명의재와 서재 지경재가 있다. 동재와 서재는 남명 조식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이 강조한 ‘의(義)’와 ‘경(敬)’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명의재는 조식 선생의 사상을 기리고 있고, 지경재는 이황 선생의 사상을 담고 있다.

대부분의 서원이 전학후묘로 돼 있으나 회연서원은 지리적 한계로 사당을 강학공간인 경회당 왼쪽에 지었다. 동재 뒤편의 사당에는 주향으로 모시고 있는 정구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비롯해 종향인 석담 이윤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당인 향현사에는 신연 송사이를 비롯해 용재 이홍기 등 정구 선생과 동년배로서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들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이외에도 서원 왼쪽에는 정구 선생과 관련된 유물과 유품이 전시돼 있는 숭모각이 있다. 출입문에는 자물쇠와 차단막으로 이중 잠금장치가 돼 있는데 귀중한 유물들의 분실,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됐다. 숭모각 내부에는 정구 선생의 삶과 업적, 정구 선생과 회연초당(회연서원), 정구 선생의 학문, 한강 학파의 전개 순으로 자료와 유물이 전시돼 있다.

강학공간의 중심인 강당 ‘경회당’을 중심으로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명의재와 서재 지경재가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강학공간의 중심인 강당 ‘경회당’을 중심으로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명의재와 서재 지경재가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서원과 숭모각 등을 둘러본 뒤 회연서원에서 빼놓지 않고 꼭 가 봐야 한다는 무흘구곡 중 제1경인 봉비암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봉비암은 서원 뒤편 낮은 산봉우리에 있어 산책로와 나무계단 길을 따라 걸어서 5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봉비암은 대가천변에 봉황이 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정구 선생이 노래한 무흘구곡 중 제1경이다. 봉비암 정상의 정상석은 원래 허목 선생이 1681년 전서체로 쓴 석각이었으나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깨어진 것을 2016년 무흘구곡 경관가도 조성사업의 하나로 복원했다고 한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요즘, 혼자만의 시간을 갖길 원한다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도시적인 느낌이 없는 회연서원을 찾아 정구 선생의 학문과 덕행은 물론 그의 사상과 철학을 느껴 보는 가을여행을 떠나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16세기 후반 영남학계 대표하는 학자 한강 정구 선생 

한강 정구 선생의 초상화.
한강 정구 선생의 초상화.

한강 정구 선생의 본관은 청주다.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종이모부인 오건에게 수학했고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1573년 유일(遺逸)로 천거돼 예빈시(禮賓寺) 참봉이 되고, 1578년 사포서(司圃署) 주부를 거쳐 삼가·의흥·지례 등지의 현감에 임명됐다. 하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다가 1580년 창녕 현감으로 임명됐다. 현감으로 선정을 펼쳤으며 주민들이 생사당을 세웠다. 1608년 대사헌이 됐으나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자는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613년 계축화옥이 일어나자 다시 상소를 올려 영창대군을 구하려 했고, 향리에 회연초당을 만들어 유생들을 가르쳤다.

회연서원의 주향으로 모셔져 있는 선생은 외증조부 한훤당 김굉필의 도학을 전수하고, 그 기반 위에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해 새로운 학풍을 세워 실학의 연원을 확립했으며, 우주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경서·병학·의학·역사·천문·풍수지리 등 모든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뛰어났다.

그의 학맥은 조식의 문하로 분류되나 정치적 입장에서는 이황의 문인으로 분류된다. 정구 선생은 후학기, 출사기, 은퇴기를 거치는 가운데 이황과 조식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외직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많은 서적을 저술·출판하고 340여 명이나 되는 제자를 양성함으로써 중쇠의 기운을 맞은 조선에 참신한 학풍을 조성하고자 했다. 그는 실학과 예학을 바탕으로 실천적 실용주의 노선을 굳건히 했는데, 이는 16세기 이후 낙동강 연안지역의 학문인 강안학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였다. 정구 선생의 이 같은 학문은 이황과 조식의 학문을 발전적으로 성취한 것으로서 장현광과 허목을 통해 영남 및 근기지방으로 계승되게 했다는 점에서 사상사적 의의가 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영민 기자 < p1721@dema.mil.kr >
백승윤 기자 < sosee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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