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 커피사 - ‘다방 레지’의 기원 1930년대 문화예술인 모여든 지적 공간
당시 소설이나 신문 콩트 속에서도 묘사
초기 다방의 ‘마담’은 여성 지식인 대접
백화점 계산원 부르던 말이었던 ‘레지’
야간통행 해제 후 심야다방 번지며 변질
영화감독 이경손이 1927년 서울 인사동에 문을 연 다방 ‘카카듀’는 다방을 지식인의 요람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일제 식민지시대 독립투사들의 활약을 그린 영화 ‘밀정’에서 표현된 다방 ‘카카듀’의 모습. 사진=배급사
192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밀정’ 속 다방의 모습. 1920~1930년대 다방은 정보를 교류하고 시류를 논하는 지적 공간이었다. 사진=배급사
영화 ‘너는 내 운명’의 한 장면. 순진한 농촌 총각 석중이 다방 아가씨 은하를 만나면서 진정한 사랑 이야기를 완성해 가는 과정을 담은 이 영화에서는 지식인의 요람에서 젊은 여성을 고용해 영업 경쟁을 벌이는 영업장으로 변해버린 다방의 모습이 자주 나온다. 사진=배급사
우리네 커피 용어들 가운데 잘못 불리는 게 적지 않다. 찬물로 성분을 추출하는 콜드 브루(Cold brew)를 ‘더치 커피(Dutch coffee)’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다.
더치는 ‘네덜란드의~’를 뜻하는 형용사이므로 ‘네덜란드 사람들의 커피’라는 뜻이 된다.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더치 커피가 당신들의 커피냐”라고 물으면, 이탈리아 사람들이 ‘이태리 타월’ 얘기를 들었을 때만큼이나 황당해한다.
‘카페라테’와 ‘카푸치노’를 우유 거품의 양으로 구별하는 것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총칭해 카페라테라고 부르고, 이 중 에스프레소 머신의 고압 수증기를 이용해 거품 우유를 만들어 붓는 것을 카푸치노라고 부른다. 일부 바리스타 자격증 시험에서 두 음료를 육안으로 차이 나게 제조하도록 지시해서 채점하는 것은 난센스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애교 수준이다. ‘다방 마담’이나 ‘다방 레지’는 당초 의미에서 벗어나 이제는 회복 불능 상태가 됐다.
‘마담(madame)’은 16세기 말 프랑스 왕실의 여성 구성원에게 붙이는 칭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7세기 중엽 루이 14세 시대에는 남의 아내를 부르는 존칭어로서 널리 퍼졌다. 국내에서는 조선 말기 개방과 함께 프랑스인들이 들어오며 사용이 잦아지다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유학생들이 귀국해 ‘모던 걸’ ‘모던 보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구성하면서 여성 지식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임이 잦아졌다.
1930년대 대표적 교양잡지인 ‘삼천리’가 비너스-낙랑파라-모나리자 등 3개 다방의 마담들을 초대해 좌담을 하고 글을 게재할 정도로 이들은 지식인으로서 대접받았다.
실제 이들 다방의 마담은 영화배우 복혜숙, 영화배우 이연실, 가수 강석연이 각각 맡고 있었다. 이 시기에 다방은 마담이 누구냐에 따라 품격이 정해졌다.
당대 최고 배우인 복혜숙은 이화여전을 나오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 신여성으로 존중받았는데, 훗날 대통령이 되는 윤보선과 조병옥 박사가 이 다방의 단골이었다.
한국인이 주인인 최초의 다방으로, 영화감독 이경손이 1927년 인사동에서 문을 연 ‘카카듀’는 하와이 교포로서 목사의 딸인 ‘미스 현’이라는 미모의 여성이 마담을 맡았다. 이경손은 직접 커피를 추출하면서 톨스토이 회고전을 여는 등 다방을 지식인의 요람으로 가꾸고자 했다.
한국 다방의 초기 문화는 1930년대 문화예술인, 문학가 등 지식인들이 모여 정보를 교류하고 시류를 논하는 지적 공간으로 그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을 중재하는 마담 역시 지적 소양이 필요했으며, 그만큼 사회적인 시선이 지금과는 달랐다.
‘레지(reji)’는 금전등록기(register)의 영어 발음인 ‘레지스터’를 축약해 부른 것이다. 레지는 다방이 아니라 백화점의 잡화점 코너에서 먼저 들려오기 시작했다.
굳이 우리말로 풀이하면 ‘계산원’이다. 화신백화점이 1932년 개점하면서 화장품과 인테리어 용품을 파는 코너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금전등록기를 설치하고 이를 다룰 줄 아는 여직원을 별도로 고용해 ‘레지’라고 칭했다.
1938년 4월 6일 자 조선일보에 채만식이 연재한 소설 ‘탁류’에 레지가 등장한다. 백화점의 화장품 매장에서 일하는 여성을 ‘숍걸’로 표기했으며, 물건값을 계산해 거스름돈과 영수증을 내주는 여성은 레지라고 따로 불렀다.
레지가 우리네 다방에서 목격되는 것은 해방 이후이다. 1946년 12월 12일 ‘경향신문’ 4면에는 소설가 박영준의 콩트 ‘하루’가 실렸는데, 찻집을 묘사하는 아래의 대목에서 ‘레지’가 나온다.
“…커다랗게 울리는 축음기 소리도 귀찮아져 차 심부름하는 처녀에게 레코드를 좀 그만두라고 했더니, ‘손님들이 적적하시지 않아요’ 하고는 도리어 샐쭉해서 레지 있는 곳으로 간다.”
‘차 심부름’하는 처녀와 ‘레지’를 따로 지칭하는 것으로 미뤄 다방 레지는 커피를 날라주지 않고 계산만을 책임진 것이 분명하다.
앞서 일제강점기의 다방을 묘사하는 작품에서는 ‘다방 레지’라는 직업인이 따로 정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33년 6월 제비다방을 그린 박태원의 ‘자작자화 유모어콩트 제비’와 1934년 서울의 다방을 묘사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보면, 다방에서 커피를 나르는 일은 남자아이가 했다. ‘차 심부름을 하는 아희’와 ‘뽀이’가 따로 있었는데, 전자는 주문한 메뉴를 손님에게 가져다주는 일을 했고, 후자는 당시 활동사진에 나오는 서양 뽀이의 차림새를 하고 신문을 가져다주는 잔심부름을 했다.
반면 이 시기 일본식 다방에서는 잘 꾸민 성인 여성이 여급으로 일했다는 사실을 1925년 정지용의 시 ‘카페 프란스’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울금향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려!”라는 대목이 나온다.
레지가 계산 전문직에서 소위 ‘다방 레지’로 지위가 하락한 것은 1952년 정부가 다방을 유흥업으로 분류한 시점이다.
이때 다방 마담과 레지들은 “종래 접대부가 받아오던 검진을 왜 우리가 받아야 하느냐”며 비명을 질렀다는 기사가 당시 여러 신문에 게재됐다.
이 중 “레지는 대개가 염집(일반 백성의 살림집) 처녀들의 신성한 직업이요, 마담은 점잖은 사교가인데 검진이라니 아이고 망칙해”(조선일보 1952년 6월 20일 자 2면)라는 대목을 통해 당시 다방 마담과 다방 레지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6·25전쟁이 끝나고 서울에서는 명동을 중심으로 재건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다방도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 시기에 수많은 사업자들이 다방 전화를 업무 전화로 사용하면서 살다시피 했다. 이런 것까지 감안해 커피 한 잔의 값은 설렁탕값보다 비싸고 노동자의 하루 임금보다 비싸게 형성됐다.
수익성이 높다 보니 다방의 경쟁은 치열해졌으며, 손님을 끄는 장치로 레지의 미모는 다방의 성공을 좌우할 정도가 됐다. 한때 소문난 레지와 마담은 스카우트의 대상이 되면서 몸값이 치솟기도 했다. 그러나 1982년 야간통행 해제와 함께 심야다방이 불야성을 이루면서 ‘레지의 일탈’이 시작됐다. ‘레지의 타락’은 다방의 경쟁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박영순 커피비평가협회(CCA) 회장은 충북대 미생물학과, 고려대 언론대학원을 졸업하고 오랜 기간 언론계에 몸담았다. 『커피인문학』, 『이유 있는 바리스타』 등을 저술했다.
파란만장 커피사 - ‘다방 레지’의 기원 1930년대 문화예술인 모여든 지적 공간
당시 소설이나 신문 콩트 속에서도 묘사
초기 다방의 ‘마담’은 여성 지식인 대접
백화점 계산원 부르던 말이었던 ‘레지’
야간통행 해제 후 심야다방 번지며 변질
영화감독 이경손이 1927년 서울 인사동에 문을 연 다방 ‘카카듀’는 다방을 지식인의 요람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일제 식민지시대 독립투사들의 활약을 그린 영화 ‘밀정’에서 표현된 다방 ‘카카듀’의 모습. 사진=배급사
192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밀정’ 속 다방의 모습. 1920~1930년대 다방은 정보를 교류하고 시류를 논하는 지적 공간이었다. 사진=배급사
영화 ‘너는 내 운명’의 한 장면. 순진한 농촌 총각 석중이 다방 아가씨 은하를 만나면서 진정한 사랑 이야기를 완성해 가는 과정을 담은 이 영화에서는 지식인의 요람에서 젊은 여성을 고용해 영업 경쟁을 벌이는 영업장으로 변해버린 다방의 모습이 자주 나온다. 사진=배급사
우리네 커피 용어들 가운데 잘못 불리는 게 적지 않다. 찬물로 성분을 추출하는 콜드 브루(Cold brew)를 ‘더치 커피(Dutch coffee)’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다.
더치는 ‘네덜란드의~’를 뜻하는 형용사이므로 ‘네덜란드 사람들의 커피’라는 뜻이 된다.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더치 커피가 당신들의 커피냐”라고 물으면, 이탈리아 사람들이 ‘이태리 타월’ 얘기를 들었을 때만큼이나 황당해한다.
‘카페라테’와 ‘카푸치노’를 우유 거품의 양으로 구별하는 것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총칭해 카페라테라고 부르고, 이 중 에스프레소 머신의 고압 수증기를 이용해 거품 우유를 만들어 붓는 것을 카푸치노라고 부른다. 일부 바리스타 자격증 시험에서 두 음료를 육안으로 차이 나게 제조하도록 지시해서 채점하는 것은 난센스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애교 수준이다. ‘다방 마담’이나 ‘다방 레지’는 당초 의미에서 벗어나 이제는 회복 불능 상태가 됐다.
‘마담(madame)’은 16세기 말 프랑스 왕실의 여성 구성원에게 붙이는 칭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7세기 중엽 루이 14세 시대에는 남의 아내를 부르는 존칭어로서 널리 퍼졌다. 국내에서는 조선 말기 개방과 함께 프랑스인들이 들어오며 사용이 잦아지다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유학생들이 귀국해 ‘모던 걸’ ‘모던 보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구성하면서 여성 지식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임이 잦아졌다.
1930년대 대표적 교양잡지인 ‘삼천리’가 비너스-낙랑파라-모나리자 등 3개 다방의 마담들을 초대해 좌담을 하고 글을 게재할 정도로 이들은 지식인으로서 대접받았다.
실제 이들 다방의 마담은 영화배우 복혜숙, 영화배우 이연실, 가수 강석연이 각각 맡고 있었다. 이 시기에 다방은 마담이 누구냐에 따라 품격이 정해졌다.
당대 최고 배우인 복혜숙은 이화여전을 나오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 신여성으로 존중받았는데, 훗날 대통령이 되는 윤보선과 조병옥 박사가 이 다방의 단골이었다.
한국인이 주인인 최초의 다방으로, 영화감독 이경손이 1927년 인사동에서 문을 연 ‘카카듀’는 하와이 교포로서 목사의 딸인 ‘미스 현’이라는 미모의 여성이 마담을 맡았다. 이경손은 직접 커피를 추출하면서 톨스토이 회고전을 여는 등 다방을 지식인의 요람으로 가꾸고자 했다.
한국 다방의 초기 문화는 1930년대 문화예술인, 문학가 등 지식인들이 모여 정보를 교류하고 시류를 논하는 지적 공간으로 그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을 중재하는 마담 역시 지적 소양이 필요했으며, 그만큼 사회적인 시선이 지금과는 달랐다.
‘레지(reji)’는 금전등록기(register)의 영어 발음인 ‘레지스터’를 축약해 부른 것이다. 레지는 다방이 아니라 백화점의 잡화점 코너에서 먼저 들려오기 시작했다.
굳이 우리말로 풀이하면 ‘계산원’이다. 화신백화점이 1932년 개점하면서 화장품과 인테리어 용품을 파는 코너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금전등록기를 설치하고 이를 다룰 줄 아는 여직원을 별도로 고용해 ‘레지’라고 칭했다.
1938년 4월 6일 자 조선일보에 채만식이 연재한 소설 ‘탁류’에 레지가 등장한다. 백화점의 화장품 매장에서 일하는 여성을 ‘숍걸’로 표기했으며, 물건값을 계산해 거스름돈과 영수증을 내주는 여성은 레지라고 따로 불렀다.
레지가 우리네 다방에서 목격되는 것은 해방 이후이다. 1946년 12월 12일 ‘경향신문’ 4면에는 소설가 박영준의 콩트 ‘하루’가 실렸는데, 찻집을 묘사하는 아래의 대목에서 ‘레지’가 나온다.
“…커다랗게 울리는 축음기 소리도 귀찮아져 차 심부름하는 처녀에게 레코드를 좀 그만두라고 했더니, ‘손님들이 적적하시지 않아요’ 하고는 도리어 샐쭉해서 레지 있는 곳으로 간다.”
‘차 심부름’하는 처녀와 ‘레지’를 따로 지칭하는 것으로 미뤄 다방 레지는 커피를 날라주지 않고 계산만을 책임진 것이 분명하다.
앞서 일제강점기의 다방을 묘사하는 작품에서는 ‘다방 레지’라는 직업인이 따로 정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33년 6월 제비다방을 그린 박태원의 ‘자작자화 유모어콩트 제비’와 1934년 서울의 다방을 묘사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보면, 다방에서 커피를 나르는 일은 남자아이가 했다. ‘차 심부름을 하는 아희’와 ‘뽀이’가 따로 있었는데, 전자는 주문한 메뉴를 손님에게 가져다주는 일을 했고, 후자는 당시 활동사진에 나오는 서양 뽀이의 차림새를 하고 신문을 가져다주는 잔심부름을 했다.
반면 이 시기 일본식 다방에서는 잘 꾸민 성인 여성이 여급으로 일했다는 사실을 1925년 정지용의 시 ‘카페 프란스’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울금향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려!”라는 대목이 나온다.
레지가 계산 전문직에서 소위 ‘다방 레지’로 지위가 하락한 것은 1952년 정부가 다방을 유흥업으로 분류한 시점이다.
이때 다방 마담과 레지들은 “종래 접대부가 받아오던 검진을 왜 우리가 받아야 하느냐”며 비명을 질렀다는 기사가 당시 여러 신문에 게재됐다.
이 중 “레지는 대개가 염집(일반 백성의 살림집) 처녀들의 신성한 직업이요, 마담은 점잖은 사교가인데 검진이라니 아이고 망칙해”(조선일보 1952년 6월 20일 자 2면)라는 대목을 통해 당시 다방 마담과 다방 레지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6·25전쟁이 끝나고 서울에서는 명동을 중심으로 재건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다방도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 시기에 수많은 사업자들이 다방 전화를 업무 전화로 사용하면서 살다시피 했다. 이런 것까지 감안해 커피 한 잔의 값은 설렁탕값보다 비싸고 노동자의 하루 임금보다 비싸게 형성됐다.
수익성이 높다 보니 다방의 경쟁은 치열해졌으며, 손님을 끄는 장치로 레지의 미모는 다방의 성공을 좌우할 정도가 됐다. 한때 소문난 레지와 마담은 스카우트의 대상이 되면서 몸값이 치솟기도 했다. 그러나 1982년 야간통행 해제와 함께 심야다방이 불야성을 이루면서 ‘레지의 일탈’이 시작됐다. ‘레지의 타락’은 다방의 경쟁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박영순 커피비평가협회(CCA) 회장은 충북대 미생물학과, 고려대 언론대학원을 졸업하고 오랜 기간 언론계에 몸담았다. 『커피인문학』, 『이유 있는 바리스타』 등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