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국방 산실 국방대학교도 위치
활기 가득한 왕립 프놈펜 대학교
100년 전통 프레아 중·고교도 찾아
자유분방한 학생들 모습에서
부모 세대 상흔 극복, 새 미래 엿보여
캄보디아 정부청사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최신 시설을 갖춘 건물은 프놈펜 중심부의 국방부 본청이다. 좌우 대칭을 이룬 쌍둥이 빌딩의 웅장한 청사는 정부의 확고한 안보 의지를 나타내는 듯했다. 국방정책 분야의 최고 엘리트 교육기관인 국방대학교도 프놈펜에 있다. 학교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인재 육성에 국가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분위기다. 캄보디아 최고의 명문으로 알려진 왕립 프놈펜 대학교도 시내에 있다. 자유분방하게 강의동을 오가는 대학생들과 현대식 학교건물은 한국의 캠퍼스 분위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캄보디아인
프놈펜 도심 거리는 시골 지역과는 딴판이다. 메콩강과 톤레사프강이 만나는 강변에는 관광객들과 산책 나온 시민들로 북적거린다. 강 건너편에는 수십 층 높이의 빌딩들이 솟아있고, 황토색 강물에 그물을 던지는 사람도 보인다. 왕궁 광장 앞의 작은 신전에는 많은 사람이 꽃을 바치며 기도한다. 진지하고 엄숙한 의식을 마친 밝은 표정의 여성이 필자에게도 신전에 들어가 소원을 이야기하라고 권한다. “캄보디아 신이 외국인은 못 알아볼 것 같다”라는 농담에 “평화를 기원하는 신은 결코 인종을 가리지 않는다”고 답한다. 물질적으로는 다소 가난하게 살아가지만, 항상 미소가 떠나지 않는 캄보디아인들의 낙천적인 삶은 이런 신앙심과 관련 있는 듯했다.
프놈펜에 위치한 학교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프레아(Preah) 중·고교가 있었다. 캄보디아에서는 6년 초등학교를 졸업 후, 중·고교과정(7~12학년)이 통합된 학교로 진학한다. 프랑스식 건축양식의 건물을 가진 이 학교는 1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졌다. 학교를 소개하는 흑백 사진은 프랑스 식민시절의 배경이 많았다. 시골 학교와 프놈펜의 교육 여건은 하늘과 땅 차이다.
중·고교생이 뒤섞인 운동장은 어린 동생과 대학생 청년이 어울려 노는 것 같았다. 교사 뒤편에서는 도심 학교에 어울리지 않게 삽과 괭이를 가지고 학생들이 텃밭을 일구고 있었다. ‘농업 실습’ 수업 중이란다. 담당 교사가 밭고랑을 만들고 농작물 파종 시범을 보이지만, 학생들은 소가 닭 쳐다보듯 큰 관심이 없다. 현대 과학기기에 익숙한 신세대에게 적합한 수업 같지는 않았다. 운동장 한편에는 남녀 중학생이 어우러진 축구시합이 한창이다. 키는 작았지만 다부진 여학생이 골키퍼를 맡고 있다. 남학생의 강한 슈팅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주먹으로 축구공을 쳐낸다. 시합이 끝난 후, 용맹스러운 이 여학생 골키퍼에게 인증사진을 부탁하니, 의외로 부끄러움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이처럼 캄보디아 학생들은 부모 세대가 겪은 뼈아픈 상흔을 훌쩍 뛰어넘어, 당당하게 새로운 미래사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신축공사 중인 캄보디아 국방대학교
국방대학교의 정문 초병에게 학교 방문을 요청하니, 의외로 쉽게 출입을 허용한다. 영내는 대대적인 신축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교내에서 학부과정 교육을 2년 동안 받고 있다는 여군 비체아라 준위를 만났다. 그녀는 이 학교의 교육체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졸업과 동시에 학사학위를 받으면서 상급 준위로 진급한다. 학비·숙식비 일체를 정부가 부담하며, 위관 및 영관 장교들은 주로 석·박사 교육을 받는다. 지휘참모대학도 영내에 있으며, 장교후보생 교육기관은 칸팡 스페우(Kanpang Speu)에 별도로 있다. 고교졸업자 중에서 엄선된 후보생들은 수년간 훈련 후 장교로 임관한다. 캄보디아에서 군(軍)의 사회적 위상은 대단히 높으며, 군 간부들은 사회 엘리트로 인정받고 있다”고 했다.
캄보디아군은 12만여 명의 병력이 있지만, 소규모인 해·공군은 전투함이나 전투기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력의 한계 때문이다. 프놈펜 근교에는 포병사령부·군수학교와 여러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지만, 정문 초병 이외에는 인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근무자들도 방문객과 스스럼없이 기념사진을 찍을 정도로 긴장감 없이 느긋했다.
태국과의 뿌리 깊은 국경분쟁
세계 역사에서 국경을 맞댄 국가들끼리 사이가 좋았던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전쟁도 국경선 획정 문제나 도서 영유권 충돌에서 벌어졌다. 캄보디아와 태국도 예외가 아니다. 수백 년 동안 계속돼온 양국 갈등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2003년 1월 29일, 프놈펜에서는 수천 명의 캄보디아인이 태국대사관에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태국 정부는 수송기 4대로 외교관 등 500여 명의 태국인을 본국으로 긴급 철수시켰다. ‘태국이 앙코르와트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태국 여배우의 드라마 대사 한 마디가 화근이었다. 2011년 4월 22일에는 캄보디아·태국 국경에 있는 ‘프레아비하어’ 사원 소유권을 두고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15명이 숨지고, 7만5000명의 피란민이 생겼다.
이 사원은 크메르제국의 찬란한 역사를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로 국경선에 걸쳐있는 당렉산 525m 정상에 있다. 캄보디아 대평원이 지평선까지 다 보이는 세계적인 관광지이기도 하다.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2번씩이나 캄보디아 소유권을 인정했지만, 태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이 사원 주변은 과거 크메르루주군과 베트남군과의 전투 시 매설한 수많은 지뢰가 남아있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는 이곳 관광객들에게 제일 먼저 당부하는 강조사항이다.
캄보디아인과 ‘꿈의 나라 한국’
코로나19로 인한 여행자 감소로 호텔 구내식당도 폐쇄됐다. 자연스럽게 숙소 앞의 길거리 음식점에서 자주 쌀국수를 먹었다. 주방장을 겸하는 아주머니가 혼자서 바쁘게 음식까지 차려준다. 식당 구석 살림방에서는 초등학생 정도의 여자아이가 올망졸망한 어린 동생들을 돌보면서 엄마를 돕고 있다. 필자가 한국인임을 알게 된 주인은 자신의 친구들도 한국에서 수년째 일하고 있단다. 한국 취업을 위한 현지인들의 한국어 학습 열기도 대단하다. 프놈펜 국제공항의 한국 국적기 승객의 절반이 취업비자를 취득한 캄보디아인들이다. 공항에서 만난 요우 엥 씨는 강원도 화천군의 농장으로 가는 중이다. 그가 가진 것은 카톡에 찍힌 한국 주소와 전화번호 밖에 없다. 생소한 생활여건과 힘든 노동이 기다리고 있지만, 악착스럽게 돈을 모아 고향으로 보내겠다는 부푼 꿈에 청년은 들떠 있었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캄보디아인은 유학생을 포함해 4만5000여 명. 1960~1970년대 수많은 한국인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조국을 떠나, 노동자·광부·간호사로 이역만리 해외로 건너갔다. 피땀 흘려 벌어들인 이들의 외화가 당시의 한국경제를 살렸다.
이런 과거 역사를 되새기며, 우리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보다 따뜻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신종태 전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는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5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쟁유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자주국방 산실 국방대학교도 위치
활기 가득한 왕립 프놈펜 대학교
100년 전통 프레아 중·고교도 찾아
자유분방한 학생들 모습에서
부모 세대 상흔 극복, 새 미래 엿보여
캄보디아 정부청사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최신 시설을 갖춘 건물은 프놈펜 중심부의 국방부 본청이다. 좌우 대칭을 이룬 쌍둥이 빌딩의 웅장한 청사는 정부의 확고한 안보 의지를 나타내는 듯했다. 국방정책 분야의 최고 엘리트 교육기관인 국방대학교도 프놈펜에 있다. 학교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인재 육성에 국가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분위기다. 캄보디아 최고의 명문으로 알려진 왕립 프놈펜 대학교도 시내에 있다. 자유분방하게 강의동을 오가는 대학생들과 현대식 학교건물은 한국의 캠퍼스 분위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캄보디아인
프놈펜 도심 거리는 시골 지역과는 딴판이다. 메콩강과 톤레사프강이 만나는 강변에는 관광객들과 산책 나온 시민들로 북적거린다. 강 건너편에는 수십 층 높이의 빌딩들이 솟아있고, 황토색 강물에 그물을 던지는 사람도 보인다. 왕궁 광장 앞의 작은 신전에는 많은 사람이 꽃을 바치며 기도한다. 진지하고 엄숙한 의식을 마친 밝은 표정의 여성이 필자에게도 신전에 들어가 소원을 이야기하라고 권한다. “캄보디아 신이 외국인은 못 알아볼 것 같다”라는 농담에 “평화를 기원하는 신은 결코 인종을 가리지 않는다”고 답한다. 물질적으로는 다소 가난하게 살아가지만, 항상 미소가 떠나지 않는 캄보디아인들의 낙천적인 삶은 이런 신앙심과 관련 있는 듯했다.
프놈펜에 위치한 학교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프레아(Preah) 중·고교가 있었다. 캄보디아에서는 6년 초등학교를 졸업 후, 중·고교과정(7~12학년)이 통합된 학교로 진학한다. 프랑스식 건축양식의 건물을 가진 이 학교는 1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졌다. 학교를 소개하는 흑백 사진은 프랑스 식민시절의 배경이 많았다. 시골 학교와 프놈펜의 교육 여건은 하늘과 땅 차이다.
중·고교생이 뒤섞인 운동장은 어린 동생과 대학생 청년이 어울려 노는 것 같았다. 교사 뒤편에서는 도심 학교에 어울리지 않게 삽과 괭이를 가지고 학생들이 텃밭을 일구고 있었다. ‘농업 실습’ 수업 중이란다. 담당 교사가 밭고랑을 만들고 농작물 파종 시범을 보이지만, 학생들은 소가 닭 쳐다보듯 큰 관심이 없다. 현대 과학기기에 익숙한 신세대에게 적합한 수업 같지는 않았다. 운동장 한편에는 남녀 중학생이 어우러진 축구시합이 한창이다. 키는 작았지만 다부진 여학생이 골키퍼를 맡고 있다. 남학생의 강한 슈팅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주먹으로 축구공을 쳐낸다. 시합이 끝난 후, 용맹스러운 이 여학생 골키퍼에게 인증사진을 부탁하니, 의외로 부끄러움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이처럼 캄보디아 학생들은 부모 세대가 겪은 뼈아픈 상흔을 훌쩍 뛰어넘어, 당당하게 새로운 미래사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신축공사 중인 캄보디아 국방대학교
국방대학교의 정문 초병에게 학교 방문을 요청하니, 의외로 쉽게 출입을 허용한다. 영내는 대대적인 신축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교내에서 학부과정 교육을 2년 동안 받고 있다는 여군 비체아라 준위를 만났다. 그녀는 이 학교의 교육체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졸업과 동시에 학사학위를 받으면서 상급 준위로 진급한다. 학비·숙식비 일체를 정부가 부담하며, 위관 및 영관 장교들은 주로 석·박사 교육을 받는다. 지휘참모대학도 영내에 있으며, 장교후보생 교육기관은 칸팡 스페우(Kanpang Speu)에 별도로 있다. 고교졸업자 중에서 엄선된 후보생들은 수년간 훈련 후 장교로 임관한다. 캄보디아에서 군(軍)의 사회적 위상은 대단히 높으며, 군 간부들은 사회 엘리트로 인정받고 있다”고 했다.
캄보디아군은 12만여 명의 병력이 있지만, 소규모인 해·공군은 전투함이나 전투기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력의 한계 때문이다. 프놈펜 근교에는 포병사령부·군수학교와 여러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지만, 정문 초병 이외에는 인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근무자들도 방문객과 스스럼없이 기념사진을 찍을 정도로 긴장감 없이 느긋했다.
태국과의 뿌리 깊은 국경분쟁
세계 역사에서 국경을 맞댄 국가들끼리 사이가 좋았던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전쟁도 국경선 획정 문제나 도서 영유권 충돌에서 벌어졌다. 캄보디아와 태국도 예외가 아니다. 수백 년 동안 계속돼온 양국 갈등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2003년 1월 29일, 프놈펜에서는 수천 명의 캄보디아인이 태국대사관에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태국 정부는 수송기 4대로 외교관 등 500여 명의 태국인을 본국으로 긴급 철수시켰다. ‘태국이 앙코르와트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태국 여배우의 드라마 대사 한 마디가 화근이었다. 2011년 4월 22일에는 캄보디아·태국 국경에 있는 ‘프레아비하어’ 사원 소유권을 두고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15명이 숨지고, 7만5000명의 피란민이 생겼다.
이 사원은 크메르제국의 찬란한 역사를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로 국경선에 걸쳐있는 당렉산 525m 정상에 있다. 캄보디아 대평원이 지평선까지 다 보이는 세계적인 관광지이기도 하다.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2번씩이나 캄보디아 소유권을 인정했지만, 태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이 사원 주변은 과거 크메르루주군과 베트남군과의 전투 시 매설한 수많은 지뢰가 남아있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는 이곳 관광객들에게 제일 먼저 당부하는 강조사항이다.
캄보디아인과 ‘꿈의 나라 한국’
코로나19로 인한 여행자 감소로 호텔 구내식당도 폐쇄됐다. 자연스럽게 숙소 앞의 길거리 음식점에서 자주 쌀국수를 먹었다. 주방장을 겸하는 아주머니가 혼자서 바쁘게 음식까지 차려준다. 식당 구석 살림방에서는 초등학생 정도의 여자아이가 올망졸망한 어린 동생들을 돌보면서 엄마를 돕고 있다. 필자가 한국인임을 알게 된 주인은 자신의 친구들도 한국에서 수년째 일하고 있단다. 한국 취업을 위한 현지인들의 한국어 학습 열기도 대단하다. 프놈펜 국제공항의 한국 국적기 승객의 절반이 취업비자를 취득한 캄보디아인들이다. 공항에서 만난 요우 엥 씨는 강원도 화천군의 농장으로 가는 중이다. 그가 가진 것은 카톡에 찍힌 한국 주소와 전화번호 밖에 없다. 생소한 생활여건과 힘든 노동이 기다리고 있지만, 악착스럽게 돈을 모아 고향으로 보내겠다는 부푼 꿈에 청년은 들떠 있었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캄보디아인은 유학생을 포함해 4만5000여 명. 1960~1970년대 수많은 한국인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조국을 떠나, 노동자·광부·간호사로 이역만리 해외로 건너갔다. 피땀 흘려 벌어들인 이들의 외화가 당시의 한국경제를 살렸다.
이런 과거 역사를 되새기며, 우리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보다 따뜻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신종태 전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는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5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쟁유적지를 찾아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