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같은 가족, 가족 같은 남…붕괴되는 관계를 향한 처절한 분투
박현민의 연구소(연예를 구독하소)
18 ‘모범가족’이 담아낸 요즘 가족
강력사건에 휘말린 가장과
조직에 배신당한 2인자,
절친한 동료를 잃은 경찰…
변모된 현대 가족에 대한 성찰
범죄 스릴러 장르 통해 묘사
단어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모한다.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기록된 ‘가족’의 정의는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이지만 현대사회의 가족은 기존의 의미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다양하게 활용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모범가족’은 그다지 모범적이지 않은 여러 가족의 형태를 열거해 보여 줌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구성원이 속한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만든다.
작품 전면에 드러난 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이다. 주인공 박동하(정우)는 평생을 모범적으로 살아온 유약한 가장이자 착하고 소심한 성격의 8년 차 대학 시간강사. 하지만 그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아내 은주(윤진서)는 갑작스럽게 이혼을 요구해 오고, 사춘기를 겪는 중3 딸 연우(신은수)는 탈선 위기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다. 더욱이 막내아들 현우(석민기)는 선천적으로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터. 이토록 위태로운 4인 가족은 현금 50억 원과 시체 2구를 우연히 맞닥뜨린 동하로 인해 이전보다 더욱 세차게 요동친다.
결핍과 왜곡으로 점철된 광철(박희순)의 가족도 인상적이다. 마약조직의 2인자인 그는 조직 대표 황용수(최무성)와 가족, 아니 가족과도 같은 돈독한 관계다. 용수는 처음으로 사람을 땅에 묻던 그날 밤 광철에게 “우리 서로 평생 믿고 가자”는 말로써 가족으로 거듭난다. 고아라 가족이 없던 광철에게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가족’이란 존재가 생긴 날이다. 그렇기에 용수가 강준(김성오)을 택하고 자기를 제거하려는 것에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다. 신뢰로 맺어졌다고 생각한 광철의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전통적 가족에 의해 떠밀려 붕괴됐다. 그런 그가 마약 운반책을 억지로 떠맡게 된 동하와 그 ‘가족’에게 흥미와 애착을 갖는 듯한 모습은 가족에 대한 선천적 결핍이 유발한 질투와 호기심이다.
책임과 의무감으로 맺어진 주현(박지연)의 가족도 있다. 서울용남경찰서 마약팀장인 주현은 거대 마약조직을 붙잡기 위해 유한철(김주헌)을 언더커버로 잠입시켰다. 하지만 ‘마약조직 검거’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 한철의 불안감을 묵살한 결과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누구에게도 선뜻 곁을 내주지 않던 냉랭한 주현이 신뢰와 마음을 내준 가족 같은 동료 한철의 죽음은 그를 정신적 파멸로 이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 내에서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몰라 짐짓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에서 그가 쫓는 광철의 모습이 겹쳐진다.
서로 다른 세 가족의 변화와 관계의 형태만큼이나 눈길을 잡아끄는 요소가 또 있다. 극 중 영어영문학 강사 박동하를 통해 등장하는 영미권 고전소설이 바로 그것. 다뤄진 작품들의 내용과 인물, 그리고 대사를 곱씹어 보면 감독의 의도가 다분히 녹아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첫 화의 대학 강연 장면에서 등장한 ‘리어왕’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로 잘 알려진 책으로, 브리튼의 왕 ‘리어왕’과 그 딸들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한다. 해당 부녀 스토리 외에도 여러 인물과 관계가 아주 복잡하게 얽힌 모양새는 ‘모범가족’의 구성과 전개를 예고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동하가 강연에서 인용한 구절은 글로스터 백작의 사생아 에드거의 대사로 “사람은 참아야 한다. 이 세상을 떠날 때나 이 세상에 태어날 때나 때가 무르익는 것이 중요하다”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일단 우직하게 참고 인내하는 것을 미덕이라 여겨 왔던 동하의 가치관이 엿보인다.
4화에 등장하는 것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다. 첫 마약 배달을 하게 된 동하가 부산의 조직 마 사장(허성태)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는 과정에서 마 사장이 동하의 가방에서 발견한 책이다. 인간이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한다는 소재를 토대로 인간의 실존과 부조리를 묘사한 소설이다. 동하는 벌레가 된 ‘변신’ 속 그레고르 잠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학교에선 학생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대학교수 선배에게는 사기를 당해 모든 재산을 탕진한다. 집에서는 아내의 멸시와 이혼 요구, 딸의 무관심과 외면 등 모든 게 그를 힘들게 할 뿐이다. ‘모범가족’에 등장하는 모든 가족의 갈등 서사가 구성원 간 서툰 의사소통에서 기인하는 것 역시 벌레가 돼 의사소통이 완전히 단절된 잠자의 상황과 흡사하다.
한동안 답답했던 상황을 뒤엎는 것은 9화의 강연에서 등장한 ‘지킬 박사와 하이드’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단편소설로 인간의 이중성을 표현한 해당 작품에서 인용된 문구는 “나약한 ‘헨리 지킬’은 ‘에드워드 하이드’를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하이드를 불러낸 것은 위선 뒤에 감춰진 지킬 박사의 억눌린 욕망입니다”이다. 앞서 첫 화에서 학생들의 괄시에도 꿋꿋하게 강연을 마치고 홀로 남겨진 자신의 낡은 자동차 안에서 분노를 분출했던 동하는 이번엔 “전부 나가!”라고 크게 소리치며 직접적으로 분노를 드러낸다. 인물의 극적 변화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리어왕’과 ‘변신’으로 대변된 억눌린 동하의 자아가 ‘지킬’이라면, 마약조직과 복잡하게 얽힌 현재 상황에서 가족의 생존을 위해 발악하는 과정에서 발현된 동하의 또 다른 자아는 바로 ‘하이드’인 셈이다.
‘모범가족’은 자칫 뻔하고 식상한 통상의 범죄 스릴러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기존의 작품에서 한 단계 나아간 것은 현대의 변모된 가족에 대한 진득한 성찰, 그리고 고전소설의 시의적절한 활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기에 추가하자면 주인공이 처한 비극을 극대화하는 아름다운 미장센과 적막 속에서 잊을 만하면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컨트리풍 음악 정도가 아닐까. ‘모범가족’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삶을 헤집어 가족에 대한 기억의 편린을 꺼내 되짚게 하는 작품이다.
필자 박현민은 잡식성 글쓰기 종사자이자, 14년 차 마감 노동자다. 가끔 방송과 강연도 하며, 조금 느릿하더라도 밀도가 높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나쁜 편집장』을 포함해 총 3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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