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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역사의 현장을 찾아] 청와대와 그 주변

이주형

입력 2022. 08. 16   16:48
업데이트 2022. 08. 16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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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역사의 현장을 찾아

①답사1번지 - 청와대와 그 주변

역대 대통령 기념식수 ‘녹지원’서 찾아보는 재미 쏠쏠~

돌기둥이 떠받든 영빈관 웅장함에 ‘입이 떡’
대정원·소정원·녹지원 야외 녹지도 감탄
관저 뒷길 오르면 오운정·미남불 만날 수 있어
1·21 소나무와 연막탄 지주, 아픔의 흔적들도


상춘재.
상춘재.
관저 정문인 인수문.
관저 정문인 인수문.
춘추관 2층 브리핑룸. 시민소통공간으로 민간에 대관하는 특별전시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춘추관 2층 브리핑룸. 시민소통공간으로 민간에 대관하는 특별전시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1·21사태 소나무. 아직도 총탄의 흔적이 선명하다.
1·21사태 소나무. 아직도 총탄의 흔적이 선명하다.
한국금융연수원 내에 위치한 기기국 번사창. 최초의 근대무기 제조공장이다.
한국금융연수원 내에 위치한 기기국 번사창. 최초의 근대무기 제조공장이다.
연막탄 지주. 주간에는 연막탄 발사대 지주로, 야간에는 조명탄 발사대 지주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막탄 지주. 주간에는 연막탄 발사대 지주로, 야간에는 조명탄 발사대 지주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운정.
오운정.
미남불.
미남불.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역사의 보고(寶庫)다. 수많은 사람들과 오랜 세월을 견뎌 온 이곳은 정치와 경제, 사회문화, 안보 등의 이야기를 담은 무수히 많은 역사가 서려 있기 때문이다. 서울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의 현장을 찾는 국방저널의 새로운 시리즈 ‘서울, 역사의 현장을 찾아’에서는 첫 번째 답사지로 이곳을 가 봤다. 지금 서울에서 가장 핫한 장소를 꼽으라면 단연코 떠오르는 곳, 바로 청와대다. 지금도 청와대는 연일 관람 매진 행렬을 이루며 남녀노소를 통틀어 가장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답사지다.

글=이주형/사진=백승윤 기자

“이야!” 청와대 영빈문을 넘어서자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웅장한 형태의 건물이 눈에 들어와서다. 건물의 명칭은 영빈관. 대규모 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행사를 열었던 공간이다. 민속공연과 만찬 등이 베풀어지는 공식행사장으로 이용되거나 100명 이상 대규모 회의 및 연회를 위한 장소로도 사용됐다.

특히 전면 4개의 돌기둥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한 개의 중량이 60톤에 달하고 높이 13m, 둘레가 3m에 이른다고 한다.

건물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은 이곳 외에 본관과 춘추관뿐이다. 영빈관을 둘러본 후 길바닥 화살 표시를 따라가니 푸른 잔디로 둘러싸인 대정원 위쪽으로 본관이 보인다.


15만 개의 청기와로 이뤄진 본관…청와대 이름도 여기서 유래


청와대 본관은 조선총독부 관사를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1991년에 지어졌다. 한옥에서 가장 격조 높고 아름답다는 팔작지붕을 올리고 15만여 개의 청기와를 얹었다. 청와대의 이름은 여기서 비롯됐다.

1층에서는 간담회나 오찬·만찬이 열리던 인왕실, 대규모 인원의 임명장을 수여하는 장소 등으로 쓰이던 충무실, 영부인이 외빈 접견과 집무실로 사용하던 무궁화실을 둘러볼 수 있다. 국무회의가 진행되던 세종실은 미공개 지역이다. 2층에서는 대통령 집무실과 외빈 접견실 등이 관람객을 반긴다.

본관을 나왔다. 소정원을 통해 관저로 향하는 길. 대정원이 넓은 잔디밭이었다면 소정원부터는 아늑한 숲이다. 정원 사이로 난 숲길이 아기자기하다.

숲의 나무들도 꽤 울창해 햇빛이 파고들 틈이 없을 만큼 그윽한 그늘을 만든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수궁(守宮) 터에 다다른다.

경복궁을 지키던 병사들이 머물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여기에 조선총독부가 전각을 허물고 총독 관사를 지었다. 광복 이후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하다가 지금의 청와대 본관을 지으면서 총독 관사는 철거했다. 현재는 총독 관사 현관 지붕 위에 장식으로 있던 절병통만 옛 자리에 놓아 과거를 기억하도록 했다.

관저는 수궁 터에서 10분 남짓한 거리에 있다. 생활공간인 본채와 접견행사 공간인 별채가 ‘ㄱ’자 형태로 자리 잡고, 그 앞으로 마당이 있다.

마당 한쪽에는 ‘청와대에서 편안한 곳’이라는 뜻을 품은 사랑채 ‘청안당’이 있다. 관저는 현재 실외 관람만 가능하다. 다만 창문을 개방해 둔 덕에 안쪽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관저 뒤로 이어진 숲길로 난 데크를 통해 언덕으로 올라가면 청와대 내의 역사문화유산인 오운정과 미남불(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을 볼 수 있다.


녹지원,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녹지원은 청와대 경내 최고의 녹지공간이다. 넓은 공간으로 구성돼 대통령과 국민이 만나는 다양한 행사가 열렸던 곳이다. 120여 종의 나무가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곳곳에 있어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한 녹지원에는 한국산 반송(盤松)이 있는데 그 수령이 170년을 넘었다.

녹지원과 관저 사이에는 침류각과 상춘재가 있다. 특히 상춘재는 외국 귀빈들을 맞이하는 의전행사나 비공식 회의 장소로 사용된 한옥이다. 청와대 내에 한옥의 아름다움을 외국 손님에게 소개할 장소가 없었기에 1983년 200년 이상 된 춘양목을 사용해 대청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된 우리의 전통가옥을 지었다.

녹지원 아래쪽으로는 현재 사무실로 사용되는 여민관이 보인다. 문재인 전 대통령 때만 해도 이곳은 비서실·안보실 공간으로 활용됐다. 대통령 집무실도 함께 있었다. 문 전 대통령은 2017년 8월 취임 100일을 맞아 기자들에게 여기를 공개한 바 있다. 헬기장을 끼고 내려오면 사실상 마지막 장소인 춘추관에 도착한다.

춘추관은 대통령의 기자회견 장소이자 출입기자들이 상주하던 곳이다. 고려와 조선시대 역사기록기관이던 춘추관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언론의 자유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74년 역사를 지나 새로운 출발점에 선 청와대. 이제는 국민과 더욱 가깝게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됐다.

앞으로 청와대가 어떤 역할로 국민의 삶을 담아내는 공간으로 자리를 잡아 갈지 궁금하다.


74년 만에 이뤄진 청와대 개방의 역사


청와대는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된 지난 5월 10일을 기해 전면 개방됐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처음이다. 청와대의 개방, 어떻게 이뤄졌을까?

청와대의 전신인 경무대, 그 시절에도 출입은 제한적이나마 가능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벚꽃 개화 시기가 되면 2~3일간 경무대 경내 일부를 일반에게 공개했다. 공원이나 유원지 등 향락시설이 마땅치 않았던 당시 상춘객에게 가장 매력적인 곳이 경무대였다. 1955년 4월에는 이곳을 찾는 시민 수가 무려 6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 이후 이름이 ‘청와대’로 바뀌었지만 이러한 개방조치는 변함없었다. 하지만 1968년 발생한 1·21사태는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청와대 앞길을 비롯한 주변 도로가 전면 차단되고, 인왕산과 북악산 출입이 금지됐다. 이후 20년 가까이 청와대는 국민 사이에서 다가갈 수조차 없는 삼엄한 장소가 됐다. 특별한 행사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었다.

청와대 개방의 기폭제가 됐던 때는 1993년 2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일반인의 접근을 막던 바리케이드를 철거해 청와대 앞길을 전면 개방하면서다. 같은 날 인왕산 등산로도 일반인의 출입을 허용했다. 2006년 9월엔 1·21사태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경복궁의 북문 ‘신무문’이 38년 만에 개방됐다. 이듬해 4월엔 청와대 뒤 북악산 등산로의 출입이 가능해졌다.

2017년 6월에는 청와대 앞길을 검문 절차 없이 야간에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게 됐다. 주간에만 제한적으로 개방해 온 청와대 본관 앞 분수대~춘추관 구간을 야간에도 시민들이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2018년 5월에는 인왕산이 완전 개방됐다. 이어 2020년 11월 1일 북악산 북측 면이, 2022년 4월 6일 청와대 건물 뒤편으로 이어지는 북악산 남측 면까지 개방됨으로써 54년 만에 북악산 전체가 국민 품으로 돌아왔다.


청와대 주변의 역사유적


북악산 능선에는 사연 많은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정상과 청운대 사이에 있는 소나무다. 풍경에 정신을 팔고 걷다 보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소나무 몸통에는 15개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몸통 구멍을 시멘트로 메우고 그 위에 둥근 모양으로 하얗고 빨갛게 칠했다. 그러고 보니 딱 사격 표적 모양이다. 그 옆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1·21사태 소나무’.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소속의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하다 발각돼 북악산 및 인왕산 지역으로 도주했다.

당시 우리 군·경과 치열한 교전 중 한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게 됐다. 이후 이 소나무를 ‘1·21사태 소나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됐고 주민등록증 발급이 시작됐다. 1호는 박정희 전 대통령, 2호는 육영수 여사였다.

청와대 인근의 삼청동과 청운동 등에서 볼 수 있는 (방호) 연막탄 지주 또한 1·21사태로 인해 생겨난 시대적 산물이다. 청와대 방호와 특정 지역 내 군사작전 수행 등의 목적으로 약 70개가 설치됐다. 주간에는 연막탄 발사대 지주로, 야간에는 조명탄 발사대 지주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10~15m에 이른다.

하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용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도시미관 측면에서도 주변 경관을 해친다는 민원이 제기됐다. 그 결과 2014년 대다수가 철거되고 일부는 전신주로 재활용됐다. 하지만 주위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긴 안내판도 전혀 없어 씁쓸함만 남을 뿐이다.

발길을 돌려 한국금융연수원으로 가면 조선 말기 근대식 무기를 제작하기 위해 설립된 기기국 소속의 병기공장, 번사창(飜沙廠)이 있다. 자주국방의 꿈을 키운 뜻깊은 장소다.

반대편 청와대 서쪽 광장으로 가 보자. 분수대 옆 바닥에는 ‘4·19 최초 발포현장’이라는 글이 새겨진 동판 하나가 누워 있다. 바로 눈에 띄지는 않는다. 일부러 찾아야 보인다.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오후 1시 40분경,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대를 향해 처음으로 총을 쏜 현장이다. 이날 21명이 죽고 17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를 추념해 2018년 서울시가 만들었다.

분수대에서 북쪽으로 길을 건너면 나오는 무궁화동산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숨진 궁정동 안가가 있던 곳이다. 병자호란 때 청에 굴복하기를 거부한 김상헌 집터 옆이기도 하다.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 안가를 헐어 내고 공원으로 만들었다.


이주형 기자 < jataka@dema.mil.kr >
백승윤 기자 < sosee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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