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지옥 같았던 폴 포트 정권… ‘킬링필드’ 생생히 증언

입력 2022. 07. 22   16:09
업데이트 2022. 07. 2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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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 78 캄보디아 ②

 
베트남전 영향…미군·남베트남군 침공
1970년 친미정권 ‘론 놀’ 수립
베트남전 종식에도 정부군-반군 내전
미 대사관 철수 후 친미정권 무너져
 
공산 정권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군
250만 프놈펜 시민 집단수용소 보내
아이도 예외 없이 전 정권 관련자 학살
초응 억 학살박물관에 유골탑 등 전시

 

어린아이 처형 장소인 ‘칠드런 트리’ 현장. 나뭇가지에 수많은 추모 리본이 보인다.
어린아이 처형 장소인 ‘칠드런 트리’ 현장. 나뭇가지에 수많은 추모 리본이 보인다.

폴 포트 정권의 ‘킬링필드’ 범죄를 잊지 말자는 학살박물관 내 추모 조형물.
폴 포트 정권의 ‘킬링필드’ 범죄를 잊지 말자는 학살박물관 내 추모 조형물.

1975년 4월 17일, 캄보디아 프놈펜은 공산 정권 폴 포트(Pol Pot)의 크메르루주군이 점령했다.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로 국호를 바꾸면서, 가장 먼저 서구 자본주의 문화 제거를 내세웠다. 서로 간의 호칭은 ‘멧(동무)’으로 통일되었고, 미스터(Mr)·미스(Miss)·서(Sir) 등의 사용은 금지되었다. 도시민은 농촌의 집단농장수용소로 내몰렸고, 자본가·지식인·공무원·종교인은 그 가족과 함께 처형됐다. 배고픔을 못 참아 농장의 토마토 한 개를 훔쳐먹은 어린애도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다. 인간 생명을 새털처럼 가볍게 여기면서도 그들이 부르짖은 것은 ‘공산 유토피아 건설’이었다.

공산정권 시기 농촌 강제수용소의 집단급식 전경.
공산정권 시기 농촌 강제수용소의 집단급식 전경.

가난과 검소함에 익숙한 캄보디아인


프놈펜 교외는 무질서한 교통 상황과 보행로의 노점상으로 정신이 없다. 금방이라도 부딪칠듯한 오토바이·툭툭이·택시·트럭이 뒤엉켜서 움직인다. 이런 가운데서도 오가는 시민들의 표정은 밝다. 바나나 몇 송이와 과자류를 펼쳐놓은 노점상도 늘 입가에 미소를 담고 있다. 가난과 검소함에 익숙한 캄보디아인은 내일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지 교민 평가는 좀 달랐다. 1970년대 ‘킬링필드’ 경험은 오늘날까지도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미친단다. 가급적 나서지 않고, 시키는 일만 한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예컨대 가정부에게 바지 한쪽에 핀을 꽂아 바짓단을 줄여오라고 하면, 다른 쪽은 줄이지 않고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가정부를 책망하면, 오히려 그녀는 “뭐가 잘못된 것인가요?”라고 되묻기도 한단다.


캄보디아로 번진 베트남전 불똥


1969년 3월 17일 밤, 괌의 미 공군기지에서 60대의 B-52 폭격기가 시뻘건 화염을 내뿜으며 출격했다. 목표는 베트남 국경선에 인접한 캄보디아의 ‘호지명 루트’. 3월 18일 새벽, 5시간의 비행 끝에 폭격기가 우박 같은 폭탄을 토해내는 작전명 ‘조찬(Breakfast)’을 개시했다. 중립노선을 걷던 캄보디아가 베트남전에 빨려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1970년 3월, 미 CIA 지원으로 캄보디아에 ‘론 놀(Lon Nol)’ 친미정권이 들어섰다. 공산군 병참선과 군사기지는 점점 더 캄보디아 안쪽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4월 30일, 미군 1만5000명과 남베트남군 5000명이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닉슨 대통령은 “캄보디아를 불법 점령한 4만 북베트남군을 격퇴하기 위한 작전”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호지명 루트’를 폐쇄했던 북베트남은 1970년 가을부터 다시 병력·물자를 투입했다. 이번에는 미군이 공군과 포병부대를 지원하고, 남베트남군 1만7000명이 라오스의 ‘호지명 루트’로 진격했다. 이 여파로 미미한 세력이었던 캄보디아 크메르루주군이 중국·북베트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급성장하였다.


학살박물관의 추모탑 전경. 내부에 발굴 유골들이 전시되어 있다.
학살박물관의 추모탑 전경. 내부에 발굴 유골들이 전시되어 있다.

파리 평화회담과 캄보디아 내전

1973년 1월 27일, 베트남전 종식을 선언하는 ‘파리 평화협정문’에서 캄보디아·라오스 문제는 “이들 나라는 외세 개입 없이 스스로 평화롭게 해결한다”라는 미사여구만 남겼다. 1970년 수백 명에 불과했던 크메르루주군은 5만으로 늘어났다. 캄보디아 정부군과 공산 반군은 곧바로 내전에 휩싸였고, 국민 여론은 친미·반미, 반공·친공으로 쪼개졌다.

반정부 시위가 뒤따랐고, 아군 조종사가 T-28 전투기로 대통령궁을 폭격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1973년 여름, 정부군은 하루에 1만6000명의 청년을 강제 징집하여, 전선으로 투입했다. 평소 3800만 톤이던 연간 쌀생산량이 1974년에는 66만5000톤으로 줄었다. 그나마 미국 지원으로 캄보디아 정부는 겨우 버티었다. 1975년 3월 중순 23만 정부군은 6만 명만 남았고, 공산군이 프놈펜을 포위했다.

적 상황은 정부군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3월 21일 생포된 크메르루주군 장교는 “자신의 연대병력 1200명 중 800명이 희생됐고, 집단탈영과 창궐하는 말라리아에 속수무책”이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4월 12일 미 대사관의 철수가 시작되자, ‘론 놀’ 정권은 썩은 고목처럼 순식간에 무너졌다. 1975년 4월 17일 아침, 검은색 복장에 스카프를 목에 두른 낯선 크메르루주군이 시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환영했고, 일부는 눈물까지 흘렸다. 처절한 내전 종식에 안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진짜 ‘지옥의 서막’이 시작되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탈출자가 밝힌 대학살의 참상

새로운 공산 정권은 가장 먼저 피난민을 포함한 250만 프놈펜 시민들을 강제로 농촌의 집단수용소로 이주시켰다. 수용소 내에서는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살인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론 놀’ 정권과 조금이라도 연관 있는 사람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처형 방식은 아주 잔인했다. 가장 흔한 방식은 도끼로 목 뒷부분을 내려치는 것이었다. 실탄을 아낀다는 이유에서였다. 외국대사관의 치외법권도 인정되지 않았다. 프랑스 대사관에는 외국인 800명, 캄보디아인 600명이 몰렸다. 새 정부는 캄보디아인을 내보내지 않으면, 외국인도 체포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외국인들은 친구·연인·동료들이 끌려나가는 것을 눈물만 흘린 채 바라보았다.

영화 ‘킬링필드’(1985)에서도 실감 나게 이 장면이 묘사된다. 대사관에 피신한 전 정부의 ‘롱 보렛’ 총리와 각료들도 전원 처형되었다. 이런 참상은 기적적으로 태국으로 탈출한 캄보디아 난민들에 의해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했다.


‘킬링필드’ 학살 현장을 가다

프놈펜에서 17㎞ 떨어진 초응 억(Choeung Ek) 학살박물관! 인간이 얼마나 사악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곳이다. 박물관은 크게 유골전시탑, 학살 및 매장 현장, 폴 포트 전시관으로 구분되어 있다. 두 번 다시 기억하기 싫은 역사 때문인지 캄보디아인 단체관람객은 찾아볼 수 없다. 가끔 외국인만 눈에 띌 뿐 넓은 유적지는 스산한 분위기다.

나이별로 구분된 전시탑의 유골은 총탄 구멍이 있거나, 둔기로 맞아 깨진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처형장과 집단매장지가 있는 밀림 속의 생지옥 현장에 들어가려니 무서운 생각이 든다. 발걸음을 멈춘 곳은 어린아이들을 때려죽였다는 ‘칠드런 트리(Childern Tree)’. 살해 장면을 묘사한 그림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그나마 나뭇가지에 매달린 수많은 추모 리본이 아픈 마음을 달래준다. 유적지 한쪽에는 ‘만인이 평등한 지상낙원!’을 내세운 폴 포트의 악행을 알리는 전시관이 있다.

이 공산정권이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은 전국 300개소 처형장에서 ‘양같이 순한 캄보디아인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한 것’이라고 전시물은 증언하고 있다.사진=필자 제공


필자 신종태 전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는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5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쟁유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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