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전설적인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1913~1954)의 사진을 접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을 누비면서 찍은 로버트 카파의 사진은 전 세계인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위험을 무릅쓴 취재 정신을 일컫는 용어 ‘카파이즘(Capaism)’은 로버트 카파를 기린 말이다.
카파는 191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이라는 태생적인 신분은 청년 시절부터 카파의 삶을 흔들었다. 18세가 되던 해 헝가리 정부에서는 유대인 추방 정책과 공산당 활동 금지령이 시행되었다. 공산당에 동조했다는 누명을 쓴 카파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독일의 베를린으로 도주했다. 운 좋게도 카파는 베를린에서 한 사진사의 암실 보조를 맡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카메라에 필름을 넣고 암실의 현상액을 갈아 넣는 자잘한 일을 도맡으며 어깨너머로 사진을 배워나갔다. 그러나 불과 2년 후 히틀러가 집권하자 카파는 다시 박해를 피해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프랑스어도 채 익히지 못한 카파는 자신의 유일한 재산인 카메라로 관광객들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연명했다. 빈곤한 삶을 이어가던 카파는 파리에서 게르다 타로라는 여인을 만났다. 유대인 출신 독일인으로 나치의 억압을 피해 파리로 도주했던 게르다는 같은 처지인 카파와 가까워졌고, 두 사람은 곧 연인이 되었다. 게르다는 제대로 된 장비도 없던 카파에게 정장을 입혀 사진업계에서 돋보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안드레 프리드만’과 ‘게르타 포호릴레’였던 자신들의 본명을 각각 로버트 카파와 게르다 타로로 바꾸었다. 게르다는 카파에게 암실을 만들어줬고, 카파는 게르다에게 사진을 가르쳤다. 두 연인은 서로에게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지자 두 사람은 함께 스페인으로 건너갔다. 두 사람은 전쟁터의 사진을 언론사에 넘겨 큰 명성을 얻었다. 게르다는 여성 기자로 큰 명성을 얻었지만 보도 사진을 찍다가 스페인 브루네테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사망한 최초의 여성 종군기자로 기록되었다. 당시 파리에 있던 카파는 이 소식을 듣고 극심한 절망에 빠졌지만, 필름을 챙겨 다시 스페인으로 향했다.
카파가 스페인에서 찍은 사진들은 어떤 기사보다도 전쟁의 비극이 사실적으로 담겨 있었다. 카파의 사진은 곧 유명 잡지에 도배되었다. 특히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이라는 제목이 달린 한 장의 사진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스페인 인민전선파의 한 병사가 참호에서 나오다가 기관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순간을 포착한 이 사진은 스페인내전의 강렬한 상징으로 남았다.
1938년에는 일본과 한창 전쟁 중이던 중화민국의 지도자 장제스가 중일전쟁 선전영화 제작을 요청하여 카파는 중국 한커우에서 촬영에 참여했다. 장제스가 지원한 ‘4억의 민중’이라는 선전영화는 일본군에 맞서는 중국인들의 고통과 용기를 기록한 대작이었다. 연출을 맡은 네덜란드 출신 영화감독 요리스 이벤스(1898~1989)는 게르다를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올 수 있도록 카파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중국에 머무는 동안 카파는 미국의 저명한 잡지 ‘라이프’와 계약을 맺고, 중국에서 찍은 사진들을 전송했다. 피폐해진 중국의 마을과 고통받는 민간인들의 모습을 찍은 보도 사진으로 카파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6개월 동안 중국 활동을 마치고 다시 스페인에 돌아온 카파는 내전의 마지막을 취재했다. 1년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카파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1942년부터 미국 잡지 ‘콜리어스’의 의뢰를 받고 영국으로 건너간 카파는 연합군의 다양한 활동을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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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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