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
큰 칵테일 잔 닮아 ‘펀치볼’ 이름 붙여
6·25전쟁의 처절한 아픔 간직한 곳
람사르 습지 ‘대암산 용늪’ 숨겨진 보물
자작나무 숲 울창한 ‘평화의 길’ 인기
DMZ 접경지역 희귀 야생화도 볼거리
해마다 6월이면 임진각이나 통일전망대, 땅굴 같은 안보 관광지를 주목한다. 코로나19가 종식되지 않았으니 보다 안전하고 색다른 곳은 없을까? 그래서 생각한 게 휴전선 접경지의 걷기 길이다. 소수 인원만 제한적으로 입장할 수 있는 강원도 양구군 ‘DMZ 펀치볼 둘레길’이 그런 곳이다. 이곳은 6·25전쟁 당시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였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안쪽을 걷는 이색 트레일(걷는 길)이자, 천혜의 자연을 품은 생태관광지다. 양구군 해안면과 인제군 북면에 걸쳐 있는 ‘대암산 용늪’도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이색 여행지다.
운석 충돌한 듯한 지형
펀치볼 둘레길은 2011년 산림청이 양구 해안면에 조성한 걷기 길이다. 펀치볼이 바로 해안면을 일컫는다. 6·25전쟁 당시, 1100m가 넘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을 보고 미국 종군기자가 붙인 이름이다. 펀치볼은 큰 칵테일 잔을 일컫는다.
민통선 안쪽에 있는 펀치볼 마을은 출입 허가 없이도 드나들 수 있지만, 둘레길은 마음대로 걸을 수 없다. 방문 3일 전까지 산림청 ‘숲나들e’ 사이트에서 탐방 신청을 하고 등산 지도사와 함께 걸어야 한다. 안전 때문이다. 해안면에는 미확인 지뢰지대가 많다. 정전 후 펀치볼에서 30여 명이 지뢰 사고를 당했다. 예약비는 따로 없고, 한 명이 신청해도 안내해준다.
4개 코스로 이뤄진 탐방로는 총 73.22㎞ 길이다. 계절마다 탐방객의 선호 코스가 다르다. 여름에는 시원한 숲길이 많은 ‘오유밭길’이 인기다. 오유밭길 코스는 해안면 오유리를 걷는 21.1㎞ 길이다. 전체 탐방은 약 7시간 걸린다.
둘레길 안내센터를 출발하면 3~4㎞는 개천을 낀 밭길을 걷는다. 2시간여를 걸어 부부소나무전망대에 닿으면 비로소 분지 지형의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미국인 종군기자는 칵테일 잔을 떠올렸다는데 한국인 눈에는 큰 사발이 연상된다. 한라산 백록담 같은 거대 분화구 같기도 하고 운석이 충돌해 푹 꺼진 것처럼 보인다.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속 마을이 떠오르기도 했다. 마을 인구는 약 1300명이다.
숲길을 걸으며 맑은 공기를 들이켜고 온갖 식물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야생화의 계절은 4월이지만 초여름에 볼 수 있는 꽃도 제법 많다. 야생화공원에는 불두화, 병꽃나무 등이 만개해 있고 깊은 숲에서 감자난초꽃과 족두리풀꽃 같은 희귀 야생화도 볼 수 있다. 곰취·곤달비·눈개승마 같은 귀한 산나물도 숲 곳곳에서 자란다. DMZ 접경 지역을 왜 천혜의 자연이라 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시래기·인삼… 펀치볼의 맛
오유밭길 못지않게 ‘평화의 길’ 코스도 인기다. 안내센터를 출발했다가 돌아오는 14㎞ 길이다. 숲·마을·안보 현장 등 볼거리가 두루 섞여 있어서 심심하지 않다. 전쟁 당시 격전이 벌어졌던 북한 쪽 가칠봉이 평화의 길에서 가깝다. “가칠봉에서 얼마나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마을까지 흘러온 계곡물이 한참 동안 핏빛이었다”고 회고하는 마을 주민도 있다. 해안면에서는 1951년 9~10월에 걸쳐 40일간 전투가 이어졌다. 적군 2799명, 아군 428명이 목숨을 잃었다.
평화의 길에 있는 와우산(598m)도 걷기 좋다. 원래 민둥산이었는데, 2000년 산림청이 잣나무·자작나무를 심어 제법 울창해졌다. 자작나무 숲에서는 걷는 속도를 늦추는 게 좋다. 하얀 수피를 입은 나무를 어루만지고 자잘한 잎사귀가 바람에 떨리는 모습을 올려다보면 묘하게 마음이 편해진다. 자작나무 숲 위쪽에는 우리 군이 만든 교통호와 대형 벙커가 있다. 여기서 북한까지 직선거리로 약 2㎞다. 남북이 대북·대남 방송을 할 때 와우산까지 그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고 한다.
독특한 마을 풍광도, 두 눈이 환해지는 자작나무 숲도 좋지만 ‘숲밥’이야말로 펀치볼의 명물이라 할 수 있다. 숲밥은 이름처럼 숲에서 나온 먹거리로 만든 밥이다. 탐방 일주일 전 신청하면 주민들이 시간에 맞춰 준비해준다. 펀치볼 특산물인 시래기·인삼뿐 아니라 머위·우산나물·두릅 등 10여 가지 찬을 내준다. 나물마다 색다른 맛과 향을 음미하며 먹다 보면 숲의 좋은 기운이 입안으로 들어와 온몸으로 퍼지는 기분이다.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1만 원으로 이렇게 질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게 황송하다. 20인분 이상만 신청할 수 있다는 점은 아쉽다.
용이 승천할 것 같은 습지
펀치볼을 두른 산줄기에는 진귀한 세계가 숨어 있다. 양구군 해안면과 인제군 북면에 걸쳐 있는 대암산(1304m) 정상부 ‘용늪’ 이야기다. 습지 보호를 위한 국제협약인 ‘람사르’에 한국 최초로 등록된 진귀한 습지다. 이곳도 펀치볼 둘레길처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다. 정부가 엄격히 출입을 통제해 하루 250명만 방문을 허락한다.
용늪 탐방 코스는 모두 3개다. 인제 가아리 코스와 서흥리 코스, 그리고 양구 코스.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에 꼽힌 대암산의 정취를 만끽하려면 서흥리 코스(10.4㎞)를 추천한다. 용늪 탐방은 어느 코스를 택하든 안내자 겸 감시자 역할을 하는 마을 주민이 동행한다.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출입허가증을 받아야 산에 들어갈 수 있다. 점심식사는 직접 챙겨와야 한다.
해발 1280m 용늪 전망대에 서면 푹 꺼진 산등성이에 초록 융단 깔린 습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부터 전문 해설사의 안내를 받는다. 용늪도 펀치볼 같은 분지다. 빙하기 때 만들어졌다. 한데 그냥 분지가 아니다. 독특한 기후 때문에 이탄(泥炭) 습지가 형성됐다. 용늪 일대는 한 해 170일 이상 안개가 끼어 습도가 높고, 5개월 이상 평균 기온이 영하에 머문다. 하여 4500년 이상 식물이 썩지 않고 켜켜이 쌓여 습지를 이뤘다. 용늪에는 독특한 식생도 많다. 비로용담·개통발 같은 식물은 용늪에서만 발견되며, TV에서나 보던 식충식물 끈끈이주걱도 산다.
용늪만 둘러보고 하산해도 되지만 대암산 정상까지 오르길 권한다. ‘지뢰 주의’ 구간이 있고 곳곳에 밧줄을 잡고 오르는 구간도 있지만, 정상에 올라야 비로소 장쾌한 전망이 펼쳐진다. 설악산 대청봉과 펀치볼 마을이 보이고, 날이 좋을 때는 북한 땅과 금강산까지 아른거린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최승표는 중앙일보 레저팀 기자다. 국내외 여행 기사를 두루 써왔다. 현재는 역병의 시대를 맞아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소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
큰 칵테일 잔 닮아 ‘펀치볼’ 이름 붙여
6·25전쟁의 처절한 아픔 간직한 곳
람사르 습지 ‘대암산 용늪’ 숨겨진 보물
자작나무 숲 울창한 ‘평화의 길’ 인기
DMZ 접경지역 희귀 야생화도 볼거리
해마다 6월이면 임진각이나 통일전망대, 땅굴 같은 안보 관광지를 주목한다. 코로나19가 종식되지 않았으니 보다 안전하고 색다른 곳은 없을까? 그래서 생각한 게 휴전선 접경지의 걷기 길이다. 소수 인원만 제한적으로 입장할 수 있는 강원도 양구군 ‘DMZ 펀치볼 둘레길’이 그런 곳이다. 이곳은 6·25전쟁 당시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였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안쪽을 걷는 이색 트레일(걷는 길)이자, 천혜의 자연을 품은 생태관광지다. 양구군 해안면과 인제군 북면에 걸쳐 있는 ‘대암산 용늪’도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이색 여행지다.
운석 충돌한 듯한 지형
펀치볼 둘레길은 2011년 산림청이 양구 해안면에 조성한 걷기 길이다. 펀치볼이 바로 해안면을 일컫는다. 6·25전쟁 당시, 1100m가 넘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을 보고 미국 종군기자가 붙인 이름이다. 펀치볼은 큰 칵테일 잔을 일컫는다.
민통선 안쪽에 있는 펀치볼 마을은 출입 허가 없이도 드나들 수 있지만, 둘레길은 마음대로 걸을 수 없다. 방문 3일 전까지 산림청 ‘숲나들e’ 사이트에서 탐방 신청을 하고 등산 지도사와 함께 걸어야 한다. 안전 때문이다. 해안면에는 미확인 지뢰지대가 많다. 정전 후 펀치볼에서 30여 명이 지뢰 사고를 당했다. 예약비는 따로 없고, 한 명이 신청해도 안내해준다.
4개 코스로 이뤄진 탐방로는 총 73.22㎞ 길이다. 계절마다 탐방객의 선호 코스가 다르다. 여름에는 시원한 숲길이 많은 ‘오유밭길’이 인기다. 오유밭길 코스는 해안면 오유리를 걷는 21.1㎞ 길이다. 전체 탐방은 약 7시간 걸린다.
둘레길 안내센터를 출발하면 3~4㎞는 개천을 낀 밭길을 걷는다. 2시간여를 걸어 부부소나무전망대에 닿으면 비로소 분지 지형의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미국인 종군기자는 칵테일 잔을 떠올렸다는데 한국인 눈에는 큰 사발이 연상된다. 한라산 백록담 같은 거대 분화구 같기도 하고 운석이 충돌해 푹 꺼진 것처럼 보인다.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속 마을이 떠오르기도 했다. 마을 인구는 약 1300명이다.
숲길을 걸으며 맑은 공기를 들이켜고 온갖 식물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야생화의 계절은 4월이지만 초여름에 볼 수 있는 꽃도 제법 많다. 야생화공원에는 불두화, 병꽃나무 등이 만개해 있고 깊은 숲에서 감자난초꽃과 족두리풀꽃 같은 희귀 야생화도 볼 수 있다. 곰취·곤달비·눈개승마 같은 귀한 산나물도 숲 곳곳에서 자란다. DMZ 접경 지역을 왜 천혜의 자연이라 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시래기·인삼… 펀치볼의 맛
오유밭길 못지않게 ‘평화의 길’ 코스도 인기다. 안내센터를 출발했다가 돌아오는 14㎞ 길이다. 숲·마을·안보 현장 등 볼거리가 두루 섞여 있어서 심심하지 않다. 전쟁 당시 격전이 벌어졌던 북한 쪽 가칠봉이 평화의 길에서 가깝다. “가칠봉에서 얼마나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마을까지 흘러온 계곡물이 한참 동안 핏빛이었다”고 회고하는 마을 주민도 있다. 해안면에서는 1951년 9~10월에 걸쳐 40일간 전투가 이어졌다. 적군 2799명, 아군 428명이 목숨을 잃었다.
평화의 길에 있는 와우산(598m)도 걷기 좋다. 원래 민둥산이었는데, 2000년 산림청이 잣나무·자작나무를 심어 제법 울창해졌다. 자작나무 숲에서는 걷는 속도를 늦추는 게 좋다. 하얀 수피를 입은 나무를 어루만지고 자잘한 잎사귀가 바람에 떨리는 모습을 올려다보면 묘하게 마음이 편해진다. 자작나무 숲 위쪽에는 우리 군이 만든 교통호와 대형 벙커가 있다. 여기서 북한까지 직선거리로 약 2㎞다. 남북이 대북·대남 방송을 할 때 와우산까지 그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고 한다.
독특한 마을 풍광도, 두 눈이 환해지는 자작나무 숲도 좋지만 ‘숲밥’이야말로 펀치볼의 명물이라 할 수 있다. 숲밥은 이름처럼 숲에서 나온 먹거리로 만든 밥이다. 탐방 일주일 전 신청하면 주민들이 시간에 맞춰 준비해준다. 펀치볼 특산물인 시래기·인삼뿐 아니라 머위·우산나물·두릅 등 10여 가지 찬을 내준다. 나물마다 색다른 맛과 향을 음미하며 먹다 보면 숲의 좋은 기운이 입안으로 들어와 온몸으로 퍼지는 기분이다.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1만 원으로 이렇게 질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게 황송하다. 20인분 이상만 신청할 수 있다는 점은 아쉽다.
용이 승천할 것 같은 습지
펀치볼을 두른 산줄기에는 진귀한 세계가 숨어 있다. 양구군 해안면과 인제군 북면에 걸쳐 있는 대암산(1304m) 정상부 ‘용늪’ 이야기다. 습지 보호를 위한 국제협약인 ‘람사르’에 한국 최초로 등록된 진귀한 습지다. 이곳도 펀치볼 둘레길처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다. 정부가 엄격히 출입을 통제해 하루 250명만 방문을 허락한다.
용늪 탐방 코스는 모두 3개다. 인제 가아리 코스와 서흥리 코스, 그리고 양구 코스.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에 꼽힌 대암산의 정취를 만끽하려면 서흥리 코스(10.4㎞)를 추천한다. 용늪 탐방은 어느 코스를 택하든 안내자 겸 감시자 역할을 하는 마을 주민이 동행한다.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출입허가증을 받아야 산에 들어갈 수 있다. 점심식사는 직접 챙겨와야 한다.
해발 1280m 용늪 전망대에 서면 푹 꺼진 산등성이에 초록 융단 깔린 습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부터 전문 해설사의 안내를 받는다. 용늪도 펀치볼 같은 분지다. 빙하기 때 만들어졌다. 한데 그냥 분지가 아니다. 독특한 기후 때문에 이탄(泥炭) 습지가 형성됐다. 용늪 일대는 한 해 170일 이상 안개가 끼어 습도가 높고, 5개월 이상 평균 기온이 영하에 머문다. 하여 4500년 이상 식물이 썩지 않고 켜켜이 쌓여 습지를 이뤘다. 용늪에는 독특한 식생도 많다. 비로용담·개통발 같은 식물은 용늪에서만 발견되며, TV에서나 보던 식충식물 끈끈이주걱도 산다.
용늪만 둘러보고 하산해도 되지만 대암산 정상까지 오르길 권한다. ‘지뢰 주의’ 구간이 있고 곳곳에 밧줄을 잡고 오르는 구간도 있지만, 정상에 올라야 비로소 장쾌한 전망이 펼쳐진다. 설악산 대청봉과 펀치볼 마을이 보이고, 날이 좋을 때는 북한 땅과 금강산까지 아른거린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최승표는 중앙일보 레저팀 기자다. 국내외 여행 기사를 두루 써왔다. 현재는 역병의 시대를 맞아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소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