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 발발 1914년 러시아서 출생
홀어머니와 난민 신분으로 프랑스 정착
성장기 지극한 모성애가 꿈 실현 밑거름
2차 대전 중 프랑스 ‘로렌 비행대’ 소속
작전 60회 참가·관통상 부상 ‘무공훈장’
전쟁터서 쓴 소설 성공…최고 문학상도
로맹 가리. 필자 제공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본명 로맹 카체브)의 삶은 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에 러시아에서 태어난 로맹 가리는 홀어머니(니나)와 동유럽을 떠돌다가 1927년에야 프랑스 남부 해안 도시 니스에 정착한다. 난민 신분으로 프랑스에 정착한 어머니에게 로맹 가리는 그야말로 ‘유일한 꿈’이었다. 비록 현실은 극심한 가난과 모멸의 연속이었지만 니나는 그것을 홀로 감수하면서 아들을 키웠다. 1920년대를 강타한 경제 공황의 고통 속에서도 니나는 아들을 위해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어머니의 맹목적인 헌신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들은 이미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는 러시아계 난민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들은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해안 호텔을 관리하는 삶을 살면서도 어머니는 아들에게 다양한 꿈을 불어넣었다. 위대한 연극배우,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글을 쓰는 작가, 전쟁에서 살아남은 영웅,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외교관, 위대한 음악가와 화가…. 어머니는 로맹 가리에게 끊임없이 꿈을 불어넣으면서 “정의는 승리한다”, “모든 것은 이뤄진다”,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다 얻을 수 있다”라고 속삭였다. 어머니의 헌신으로 세상에 대한 증오와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혐오감을 떨친 로맹 가리는 학업에 열중했고, 어학 과목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로맹 가리의 성장기와 청년 시절을 담은 영화 ‘새벽의 약속’의 한 장면. 필자 제공
로맹 가리는 파리의 법과대학에 진학했지만, 광폭한 시대는 법관이 되는 길을 가로막았다. 1938년,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뮌헨 협정으로 체코의 수데테란트를 차지한 이후 계속 세력을 넓혀갔다. 영국과 프랑스는 뮌헨협정이 실수였음을 깨닫고,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로맹 가리는 사관후보생으로 공군에 입대하여 고등군사교육을 290명 중 4등으로 수료했으나 장교로 임관하지 못했다. 드레퓌스 사건(1894)으로 표출된 것처럼 프랑스 군대의 유대인 혐오는 뿌리 깊었다.
1940년,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공군 조종사 훈련에 다시 소집되었다. 불운하게도 그가 훈련을 마치기 직전 프랑스는 독일에 점령되었다. 공군 조종사 훈련생들은 협력과 저항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로맹 가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특무상사 들라보와 함께 전투기를 몰고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로 탈출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 노게즈 장군은 독일과의 휴전에 합의하고 말았다. 조종사들이 탈출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모든 항공기를 고장 내라는 어이없는 명령이 떨어졌다. 분개한 로맹 가리는 육상으로 탈출하여 영국 군함에 탑승했다.
1940년 8월 8일, 로맹 가리는 영국에서 자유프랑스공군(FAFL)에 편입되었다. 곧 독일군의 폭격이 시작되자 영국 공군 전체가 항공전에 휘말렸다. 자유프랑스공군은 아프리카의 차드로 이동하여 훈련받았다. 그곳에서 장티푸스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로맹 가리는 악착같이 살아남았고 마침내 그가 소속된 ‘로렌 비행대’는 1943년 10월부터 실전에 투입되었다. 로맹 가리는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의 목표물을 폭격하는 작전에 60회 이상 참가했다. 로렌 비행대는 주로 발전소, 조차장, V1 로켓 발사대를 조준 폭격하는 위험한 임무를 떠맡았다. 1943년 11월 25일, 탑승한 폭격기가 대공포에 피격되어 로맹 가리는 복부관통상을 입었다. 조종사는 파편에 눈을 다쳤다. 그런 상황에서 로맹 가리는 조종사를 도와 V1 발사대에 폭탄을 투하하고 무사히 귀환했다.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중위로 진급했고, 1944년 1월에는 드골 장군이 서명한 ‘해방무공훈장’을 받았다.
로맹 가리가 전쟁터에서 부상을 치료하며 쓴 출세작 『유럽의 교육』.
필자 제공
1956년 첫 번째 공쿠르상을 수상한 작품 『하늘의 뿌리』. 필자 제공
로맹 가리에게 두 번째 공쿠르상을 안긴 『자기 앞의 생』. 필자 제공
로맹 가리는 부상을 치료하면서 소설 『유럽의 교육』(1945)을 출간했다. 『유럽의 교육』은 폴란드를 배경으로, 빨치산들의 항독 투쟁에 합류한 열네 살 소년 야네크가 그들과 함께하면서 용기와 사랑에 눈뜨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영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 프랑스에서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전쟁이 끝나고 귀국한 로맹 가리는 ‘해방무공훈장’ 수상자 특혜로 프랑스 외무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외교관이 된 그는 불가리아, 볼리비아, 미국 등에 파견되었다. 외교 활동을 하면서 계속 소설을 발표한 그는 1956년, 장편소설 『하늘의 뿌리』로 프랑스의 가장 권위적인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그가 어머니와 약속한 꿈들이 거짓말처럼 모두 실현된 것이다. 그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영웅이자 외교관이 되었고,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작가가 되었다. 어머니의 믿음은 전쟁터에서도 글을 쓰는 힘이 되었다.
로맹 가리의 연인 진 세버그.. 필자 제공
그러나 어머니와 약속한 꿈들이 실현된 이후 로맹 가리는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되었다. 비평가들은 로맹 가리의 후속작들은 깎아내렸다. 전후 세대가 주요 독자층이 되면서 로맹 가리의 소설들은 평단에서 외면받았다. 드골을 싫어하는 젊은 세대들은 로맹 가리를 ‘철 지난 드골주의자’로 취급했다. 로스앤젤레스 영사 시절에 만나 결혼한 두 번째 부인 영화배우 진 세버그(1938~1979)와의 결혼생활도 흔들렸다. 장뤼크 고다르 감독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의 주연으로 세계적인 인기 배우가 된 진 세버그는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1930~)와 염문을 뿌렸고, 이 사건을 계기로 로맹 가리와 결별했다.
실연과 평단의 외면으로 위기에 몰렸지만 로맹 가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은둔한 채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장편소설 『그로칼랭』, 『가면의 생』, 『자기 앞의 생』, 『솔로몬왕의 고뇌』를 차례로 발표했다. 1975년에 『자기 앞의 생』이 공쿠르상 수상작으로 결정되었으나, ‘에밀 아자르’라는 작가는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1979년에는 진 세버그가 의문사했다. 흑인 인권운동을 비롯한 사회 변혁 운동에 앞장섰던 그녀는 FBI의 대국민 감시 프로그램인 ‘코인텔프로’의 표적이 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로맹 가리는 FBI 연루설을 공개적으로 제기했으나,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로맹 가리는 1980년, 파리에서 스스로 생을 접었다. 사람들은 진 세버그의 죽음과 로맹 가리의 죽음을 연결했지만, 그는 유서에서 그녀와 자신의 죽음은 상관없다고 밝혔다. 로맹 가리는 사후에 발견된 회고록에서 자신이 바로 ‘에밀 아자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같은 작가에게 상을 주지 않는 공쿠르상의 원칙은 그렇게 깨졌다. 그는 자신을 차별한 세상을 향해 쉽게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소설 제목처럼 그는 ‘자기 앞의 생’을 온몸으로 견딘 작가였다. 유서의 마지막에 적은 문장은 그의 치열했던 삶을 대변한다.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1차 대전 발발 1914년 러시아서 출생
홀어머니와 난민 신분으로 프랑스 정착
성장기 지극한 모성애가 꿈 실현 밑거름
2차 대전 중 프랑스 ‘로렌 비행대’ 소속
작전 60회 참가·관통상 부상 ‘무공훈장’
전쟁터서 쓴 소설 성공…최고 문학상도
로맹 가리. 필자 제공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본명 로맹 카체브)의 삶은 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에 러시아에서 태어난 로맹 가리는 홀어머니(니나)와 동유럽을 떠돌다가 1927년에야 프랑스 남부 해안 도시 니스에 정착한다. 난민 신분으로 프랑스에 정착한 어머니에게 로맹 가리는 그야말로 ‘유일한 꿈’이었다. 비록 현실은 극심한 가난과 모멸의 연속이었지만 니나는 그것을 홀로 감수하면서 아들을 키웠다. 1920년대를 강타한 경제 공황의 고통 속에서도 니나는 아들을 위해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어머니의 맹목적인 헌신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들은 이미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는 러시아계 난민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들은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해안 호텔을 관리하는 삶을 살면서도 어머니는 아들에게 다양한 꿈을 불어넣었다. 위대한 연극배우,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글을 쓰는 작가, 전쟁에서 살아남은 영웅,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외교관, 위대한 음악가와 화가…. 어머니는 로맹 가리에게 끊임없이 꿈을 불어넣으면서 “정의는 승리한다”, “모든 것은 이뤄진다”,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다 얻을 수 있다”라고 속삭였다. 어머니의 헌신으로 세상에 대한 증오와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혐오감을 떨친 로맹 가리는 학업에 열중했고, 어학 과목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로맹 가리의 성장기와 청년 시절을 담은 영화 ‘새벽의 약속’의 한 장면. 필자 제공
로맹 가리는 파리의 법과대학에 진학했지만, 광폭한 시대는 법관이 되는 길을 가로막았다. 1938년,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뮌헨 협정으로 체코의 수데테란트를 차지한 이후 계속 세력을 넓혀갔다. 영국과 프랑스는 뮌헨협정이 실수였음을 깨닫고,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로맹 가리는 사관후보생으로 공군에 입대하여 고등군사교육을 290명 중 4등으로 수료했으나 장교로 임관하지 못했다. 드레퓌스 사건(1894)으로 표출된 것처럼 프랑스 군대의 유대인 혐오는 뿌리 깊었다.
1940년,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공군 조종사 훈련에 다시 소집되었다. 불운하게도 그가 훈련을 마치기 직전 프랑스는 독일에 점령되었다. 공군 조종사 훈련생들은 협력과 저항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로맹 가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특무상사 들라보와 함께 전투기를 몰고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로 탈출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 노게즈 장군은 독일과의 휴전에 합의하고 말았다. 조종사들이 탈출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모든 항공기를 고장 내라는 어이없는 명령이 떨어졌다. 분개한 로맹 가리는 육상으로 탈출하여 영국 군함에 탑승했다.
1940년 8월 8일, 로맹 가리는 영국에서 자유프랑스공군(FAFL)에 편입되었다. 곧 독일군의 폭격이 시작되자 영국 공군 전체가 항공전에 휘말렸다. 자유프랑스공군은 아프리카의 차드로 이동하여 훈련받았다. 그곳에서 장티푸스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로맹 가리는 악착같이 살아남았고 마침내 그가 소속된 ‘로렌 비행대’는 1943년 10월부터 실전에 투입되었다. 로맹 가리는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의 목표물을 폭격하는 작전에 60회 이상 참가했다. 로렌 비행대는 주로 발전소, 조차장, V1 로켓 발사대를 조준 폭격하는 위험한 임무를 떠맡았다. 1943년 11월 25일, 탑승한 폭격기가 대공포에 피격되어 로맹 가리는 복부관통상을 입었다. 조종사는 파편에 눈을 다쳤다. 그런 상황에서 로맹 가리는 조종사를 도와 V1 발사대에 폭탄을 투하하고 무사히 귀환했다.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중위로 진급했고, 1944년 1월에는 드골 장군이 서명한 ‘해방무공훈장’을 받았다.
로맹 가리가 전쟁터에서 부상을 치료하며 쓴 출세작 『유럽의 교육』.
필자 제공
1956년 첫 번째 공쿠르상을 수상한 작품 『하늘의 뿌리』. 필자 제공
로맹 가리에게 두 번째 공쿠르상을 안긴 『자기 앞의 생』. 필자 제공
로맹 가리는 부상을 치료하면서 소설 『유럽의 교육』(1945)을 출간했다. 『유럽의 교육』은 폴란드를 배경으로, 빨치산들의 항독 투쟁에 합류한 열네 살 소년 야네크가 그들과 함께하면서 용기와 사랑에 눈뜨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영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 프랑스에서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전쟁이 끝나고 귀국한 로맹 가리는 ‘해방무공훈장’ 수상자 특혜로 프랑스 외무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외교관이 된 그는 불가리아, 볼리비아, 미국 등에 파견되었다. 외교 활동을 하면서 계속 소설을 발표한 그는 1956년, 장편소설 『하늘의 뿌리』로 프랑스의 가장 권위적인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그가 어머니와 약속한 꿈들이 거짓말처럼 모두 실현된 것이다. 그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영웅이자 외교관이 되었고,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작가가 되었다. 어머니의 믿음은 전쟁터에서도 글을 쓰는 힘이 되었다.
로맹 가리의 연인 진 세버그.. 필자 제공
그러나 어머니와 약속한 꿈들이 실현된 이후 로맹 가리는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되었다. 비평가들은 로맹 가리의 후속작들은 깎아내렸다. 전후 세대가 주요 독자층이 되면서 로맹 가리의 소설들은 평단에서 외면받았다. 드골을 싫어하는 젊은 세대들은 로맹 가리를 ‘철 지난 드골주의자’로 취급했다. 로스앤젤레스 영사 시절에 만나 결혼한 두 번째 부인 영화배우 진 세버그(1938~1979)와의 결혼생활도 흔들렸다. 장뤼크 고다르 감독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의 주연으로 세계적인 인기 배우가 된 진 세버그는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1930~)와 염문을 뿌렸고, 이 사건을 계기로 로맹 가리와 결별했다.
실연과 평단의 외면으로 위기에 몰렸지만 로맹 가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은둔한 채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장편소설 『그로칼랭』, 『가면의 생』, 『자기 앞의 생』, 『솔로몬왕의 고뇌』를 차례로 발표했다. 1975년에 『자기 앞의 생』이 공쿠르상 수상작으로 결정되었으나, ‘에밀 아자르’라는 작가는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1979년에는 진 세버그가 의문사했다. 흑인 인권운동을 비롯한 사회 변혁 운동에 앞장섰던 그녀는 FBI의 대국민 감시 프로그램인 ‘코인텔프로’의 표적이 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로맹 가리는 FBI 연루설을 공개적으로 제기했으나,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로맹 가리는 1980년, 파리에서 스스로 생을 접었다. 사람들은 진 세버그의 죽음과 로맹 가리의 죽음을 연결했지만, 그는 유서에서 그녀와 자신의 죽음은 상관없다고 밝혔다. 로맹 가리는 사후에 발견된 회고록에서 자신이 바로 ‘에밀 아자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같은 작가에게 상을 주지 않는 공쿠르상의 원칙은 그렇게 깨졌다. 그는 자신을 차별한 세상을 향해 쉽게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소설 제목처럼 그는 ‘자기 앞의 생’을 온몸으로 견딘 작가였다. 유서의 마지막에 적은 문장은 그의 치열했던 삶을 대변한다.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