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해적 소굴서 경제 부국으로…그 뒤엔 전쟁의 굴곡史

입력 2021. 12. 01   17:21
업데이트 2021. 12. 0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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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싱가포르 ①
 
수백 년간 해적 본거지였으나
영국 해군기지로 변모하며 성장
중일전쟁·식민지 독립운동 요동
태평양전쟁 일·영 전쟁터 변모
국립박물관 참혹한 전쟁사 재현
 
과거 해적 본거지였던 싱가포르 센토사 섬. 사진 오른편에 영국군 해안포대 전쟁유적이 있다.
과거 해적 본거지였던 싱가포르 센토사 섬. 사진 오른편에 영국군 해안포대 전쟁유적이 있다.
1887년 건축된 싱가포르 국립박물관 전경. 내부에는 역사전시관을 포함한 공연장·식물원 등 각종 테마 시설이 있다.
1887년 건축된 싱가포르 국립박물관 전경. 내부에는 역사전시관을 포함한 공연장·식물원 등 각종 테마 시설이 있다.

싱가포르 공화국(Republic of Singapore)은 196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탈퇴해 독립국이 됐다. 국토면적 697㎢(서울의 1.18배)와 인구 600만의 작은 도시국가지만, 연간 국민 개인소득 5만8500달러의 부자 나라다. 싱가포르는 북쪽으로는 조호르해 건너편 말레이시아와, 남쪽으로는 인도네시아와 마주 보고 있다. 인종 비율은 중국계 75%, 말레이계 14%, 인도계 9%, 기타 2% 정도다. 군사력은 현역 5만1000명(육군 4만1000, 해군 4000, 공군 6000), 준 군사부대 7400명(구르카 용병 1800), 예비군 25만2500명을 보유하고 있다. 또 미 해·공군 일부 병력이 기지에 주둔하며, 싱가포르군은 브루나이·호주·대만·태국에서 해외 훈련을 한다.

 
경제 부국 싱가포르의 첫인상


싱가포르 도심에서 25㎞ 떨어진 창이(Changi)국제공항에 밤늦게 도착했다. 이 공항은 2019년 승객 만족도 조사에서 7년 연속 세계 1위였다. 시내까지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으나, 숙소를 또다시 찾아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뒤따른다.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까지 소요 시간과 요금을 물으니 시원시원하게 대답한다.

가끔 도착 후 일어나는 요금 시비는 없을 것 같았고, 공항 도로 주변의 울창한 가로수까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숙소에 도착하자 운전기사는 배낭을 정문까지 옮겨주는 친절함도 보여준다. 거리 분위기는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비슷하나, 심야에도 음식점들이 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버려진 섬 싱가포르의 역사


싱가포르 역사 자료는 14세기 이후 기록에서 간간이 발견된다. 당시 이 섬의 왕국은 자바·수마트라섬 종족의 공격에 말레이반도로 철수했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싱가포르는 은신처가 필요한 해적 소굴이 됐다. 현재 테마파크로 유명한 관광지 센토사(Sentosa) 섬은 말레이어로 ‘풀라우 블라캉 마타(Pulau Blakang Mata·죽음의 뒤편 섬)’다. 해적들이 사람들을 납치해 이 섬 뒤편에서 살해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영국인 래플스(Raffles)가 1819년 센토사로 오면서 싱가포르는 또 다른 역사의 물줄기를 타게 된다. 래플스는 1826년 영국이 말레이반도의 페낭-말라카-싱가포르 해협 식민지를 완성할 때, 이곳 책임자로 임명됐다. 그는 싱가포르를 무관세 자유무역항으로 만들며 발전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어 싱가포르는 아시아와 호주를 지배할 영국 해군기지로 변모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중국 노동자들이 떼 지어 몰려들었고, 돈 많은 상인이 넘쳐났다. 영국은 도시개발을 위해 인도 죄수들까지 대거 투입했다. 1900년대 국제정세는 중일전쟁과 식민지 독립운동으로 요동쳤다. 일본에 맞서는 중국인들은 영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지만, 인도·파키스탄인은 반영 의식이 강했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필리핀·말레이반도를 기습 공격한 일본이 1942년 2월 15일 싱가포르를 점령했다. 점령 기간 3년 반 동안 일본군은 중국인 수만 명을 학살했고, 연합군 포로들은 사는 것이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싱가포르 국립박물관 전시물 절반은 이런 참혹했던 전쟁 역사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싱가포르 역사·문화 보여주는 국립박물관

1887년에 지어진 국립박물관은 싱가포르 역사·문화를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들이 있다. 역사전시관은 싱가푸라 왕국(14세기경), 영국점령기(1819-1942), 일본점령기(1942-1945), 현대 싱가포르(1946-현재)로 구분돼 있다. 1800년대 ‘쿨리’로 불리는 중국인들은 하루 몇 센트를 벌기 위해 가혹한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고, 고된 나날을 아편으로 이겨내며 겨우 버텼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노동자가 아편을 피우며 누워 있는 사진은 싱가포르 건설기 사회상을 보여준다. 요란한 공습경보가 울리는 태평양전쟁 전시실은 관람객들을 80년 전의 싱가포르로 안내한다. 1941년 말라야반도에는 영국 퍼시벌(Percival) 중장이 지휘하는 8만 명의 영연방군이 있었다. 그는 싱가포르는 일본군의 해상공격에서 난공불락이며, 반도 북부로부터 침공하더라도 조호르해의 자연적인 방어력을 이용해 능히 저지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정글 전투 훈련이나, 진지 구축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일본군 25군 사령관 야마시타 토모유키(山下奉門)는 1941년 12월 8일 4개 사단을 태국 해안과 말라야반도 코타바루(Kota Bahru)에 상륙시켰다. 일본군 공격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고, 정글 소로길을 수천 대의 자전거부대가 신속히 통과했다. 갑자기 후방에서 나타난 일본군에 영연방군은 맥없이 무너졌다. 1942년 2월 8일 조호르 선에 도달한 일본군은 기습적인 도하로 영연방군을 싱가포르 시내로 밀어붙였다.


전쟁 승패를 판가름했던 최후의 순간

역사전시관 한구석에는 일본군 자전거 10여 대와 영국군의 치욕적인 항복 사진이 있다. 1942년 2월 14일 싱가포르 시내는 물이 떨어졌고 오물과 시체 악취로 가득 찼다. 일본군 역시 탄약은 바닥났고, 보급선은 말라버렸다. 시가전이 벌어진다면 병력이 훨씬 적은 일본군에게는 재앙이 될 수도 있었다.

참모들은 철수를 건의했지만, 독한 야마시타는 마치 탄약이 무한히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릴 것을 지시했다. 영국군이 휴전을 원한다는 소식에 야마시타는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계략이 아닌지 의심하면서, 퍼시벌을 포드자동차 조립공장의 일본군 본부로 불러들였다.


“Yes”, “No”를 강요당한 영국군 사령관

퍼시벌은 항복을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여러 가지 조건을 이야기했다. 이에 야마시타는 책상을 꽝 치며 “Yes!” 혹은 “No!”를 딱 부러지게 이야기하라며 적장을 위협했다. 1942년 2월 15일. 영연방군은 일본군에게 무릎을 꿇었다. 야마시타는 영국군이 3일만 더 버텼다면, 일본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회담 중에도 상대에게 약점을 들키지 않도록 더욱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퍼시벌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최악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강한 의지가 필수적인 지휘관 자질은 부족했다. 실전에서는 양 같은 온순함보다 사자의 용맹성을 가진 독한 군인이 더 필요하다. 2월 17일 수만 명의 연합군 포로가 질서정연하게 25㎞를 행군해 수용소 안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은 3년 이상 고문, 굶주림, 가혹한 노동으로 전투에서 죽는 것이 훨씬 나았다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내일은 싱가포르의 생생한 전쟁유적지 영국군 지하지휘소와 해안포 요새진지에 가보기로 했다.

<신종태 전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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