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교수실에서

[김희곤 교수실에서] 미래로 가는 메타버스 시대, 선(善)과 선(線)의 관계 맺음

입력 2021. 11. 15   16:12
업데이트 2021. 11. 15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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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희 곤 공주대학교 안보학 교수
김 희 곤 공주대학교 안보학 교수

붓글씨의 핵심은 선(線) 긋기다. 그래서 ‘처음 긋는 선이 창작’이며, 선을 알면 곧 서예를 안다고 한다. 기초가 완성이라는 의미다.

나는 이 창작에 도전했다가 번번이 실패하고 낙담한 경험이 있다. 너무 빤해서 기초를 건너뛰고 다음 단계로 가고 싶음이 아직 선 긋기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이유다.

선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여기서는 사람 관계의 두 가지 선(線과 善)에 대해 말하려 한다. 선 긋기에 대한 고민은 ‘선을 긋는 방식의 기본자세와 방법이 쉬이 범접하기 어렵구나’를 느꼈을 때 시작됐다.

두 번째도 진행 중이며, 고민의 내용과 방향이 여전히 진화 중이다. 선(善)으로 넘어가는 선(線) 긋기에 관한 것인데 미완으로 남을 것 같다. 직선의 종류와 긋는 방법은 이를 가벼이 본 내 부끄럼만큼이나 많다. ‘수직, 수평, 기운 직선’이 있고, 선을 긋는 데도 어느 방향이냐에 따라 몸의 느낌과 근육 사용이 다르다. 사람의 근육은 당기는 데 특화돼 있다. 이것이 손을 뻗을 때와 당길 때 기본자세와 근육 사용법이 다른 이유다.

선 긋기는 사람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사람 관계는 상호작용의 결과로 깊어지거나 멀어진다. 선 긋기를 할 때 기본은 지금 내가 ‘선을 당기는지, 미는지’를 먼저 확실하게 해야 한다. 대부분 당기는 쪽이 잘 그려질 것이다. 근육이 그렇게 발달돼 있고, 미는 것보다 당기는 데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관계도 상황과 시기에 따라 밀고 당기는 마음 근육 사용이 달라져야 한다. 상대가 당기는데 내가 밀면 둘 다 넘어지고 반대 상황이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좋았던 사이도 사소한 일로 틀어지고 만다.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기 때문이다.

선을 당기는지 미는지가 익혀지면 ‘중심축 이동, 강약 조절, A→B점 두 개를 찍고 점을 잇거나 통과하는 선 긋기, 마지막 단계로 선을 하나 긋고 다른 선을 그 선과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것’까지 경험했을 때, 이제 곡선과 원을 그을 준비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선(線)이 선(善)으로 이어지는 단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다시 사람의 관계로 돌아가 보자. 선 긋기는 혼자서 하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 관계는 여러 사람과 어울려 지내며 사회적 상호작용(Social Interaction) 속에서 ‘중심의 이동’과 ‘강약의 조절’ 그리고 ‘서로 다름을 잇거나 또 다른 선과의 연결’ 등 선 긋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변수가 존재한다. 선을 지켜야 할까, 넘어도 될까?

선을 넘으면 더 각별해질 것도 같고, 지키면 중간은 될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선을 넘으면 무례할 것 같고, 지키면 또 멀어질 것 같다.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선’이 애매하다. 우리의 마음 근육이 서로를 세우는 데 사용돼야 하는 이유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관계 맺음 잘하기’가 벅차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코로나19와 언택트(Untact) 상황은 수많은 관계의 변화를 초래하며 낯선 방식의 관계 맺음을 고민하게 한다.

시나브로 익숙해져 가는 이 상황에서 유택트(U-tact) 이른바 메타버스(Metaverse) 시대의 도래는 다시 ‘새로운 방식의 연결, 소통, 협력’을 요구하고 있다.

미래로 가는 메타버스 시대의 사람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이 글의 시작점에서 답을 구해보자. 직선의 선 긋기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곡선과 원을 넘볼 수는 없다. 그러면 영원히 선 긋기의 언저리를 맴돌 것이 뻔하다. 사람의 관계 맺음(연결; 線)도 선(善)함에서 비롯돼야 함은 이와 같은 이치다. 흔들리는 시대, 위기를 맞을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자’다. 기본이 곧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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