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군 초기 공군의 L-4 연락기. 공군은 6.25전쟁 발발 시 단 한 대의 전투기도 없이 연락기와 훈련기만으로 북한군과 싸웠다. 공군 제공
F-51 무스탕 전투기가 대한해협을 건너 비행하는 모습.
대한민국 국군은 100년의 전쟁역사를 갖고 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에 의해 지어진 뒤 1948년 정식 정부 수립 후에도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산하로 편입해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였다. 100년이 넘는 전쟁역사의 출발점이다. 이에 국방저널(국방일보)은 올해부터 지난 100년간 나라를 위해 앞장서서 싸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전쟁영웅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10월호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공군의 창설 주역으로서 일찍이 일제와 무장독립투쟁을 벌이다가 광복 후 6·25전쟁이 벌어지자 공군의 전투를 지휘하며 조국을 구하는 데 앞장선 최용덕 장군이다. 글=정호영 기자/사진=국방일보 DB
강원도 최북단 고성의 통일전망대에 전시된 공군351고지 전투지원작전 기념비와 F-86 세이버 전투기. F-86은 6·25전쟁 중 도입된 서방권 최고의 제트 전투기였다. 조용학 기자
10월 1일은 국군의 날이지만 공군의 창설일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공군은 1949년 10월 1일 창설됐다. 지난 2019년 공군은 창군 70주년을 맞아 공군 창군의 주역인 최용덕 장군 동상을 제막하는 행사를 공군사관학교에서 성대하게 열었다. 공군에서 최용덕 장군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한민국 공군의 정신적 지주로 불리는 최용덕 장군은 타고난 무인이다. 그는 100년의 대한민국 전쟁역사에서 보기 드문 다양한 항일무장투쟁 경력이 있다. 테러 등을 통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의열단을 시작으로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했으며, 때로는 중국군 신분으로 하늘과 땅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도 맹활약한 전형적인 독립투사였다.
해방 이후에는 공군을 창설하기 위해 미군정청의 억지 요구에 당당하게 50세의 나이로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해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시에는 초대 국방부 차관이 돼 국군의 조직을 정비하면서 1949년 10월 1일 공군이 창설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했다. 최용덕 장군은 공군의 가장 큰 어른이었지만 공군이 창설되자 초대 총참모장(참모총장) 자리를 기꺼이 후배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전쟁이 터지자 공군의 작전 책임자가 돼 일선의 전투를 섬세하게 지휘했다. 최용덕 장군은 또 공군 현대화의 선봉장이었다. 전쟁 중 2대 총참모장에 취임해 제트 전투기를 도입하는 사업에 박차를 가해 대한민국 공군을 제트 전투기 시대로 이끌었다.
최용덕 장군은 한평생 청렴한 군인이었다. 그는 중국 공군에 복무하면서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도 활약하던 시절, 월급의 3분의 2를 광복군에게 헌납하며 청빈하게 살았다. 워낙 청렴해 일화도 많다. 6·25전쟁 중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최용덕 장군의 집에 들이닥쳤다가 너무도 초라한 살림을 보고 “이 집이 정말 최용덕의 집이 맞느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돌아간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늘 주변 사람과 부하들을 챙기느라 일흔 살까지 셋방살이를 면치 못했던 그는 별세할 당시 전 재산이 손녀딸에게 우유를 사주고 남은 거스름돈 240원이 전부였다고 전해진다.
하늘은 최용덕 장군의 고향이자 삶의 무대였다. 그는 항상 “우리의 살 곳도 하늘이요, 우리의 죽을 마당도 하늘이요, 우리의 일터도 하늘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는 임종을 며칠 앞두고는 공군 후배들에게 “내가 죽거든 수의 대신 공군복을 입혀주기 바란다”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공군 창설과 강한 공군 육성은 최용덕 장군의 일생을 관통하는 염원이자 이상이었다. 공군의 개척자이자 아버지로서 한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침략자인 북한군과 싸웠던 그를 ‘대한민국의 전쟁영웅’에서 재조명한다.
최용덕(崔用德)은 1898년 9월 19일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봉명학교에 입학해 근대 교육을 받은 뒤 경술국치 이후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북경에서 2년 동안 숭실중학교를 다니며 중국어와 새로운 사상을 배우고 익혔다. 18세가 되던 1916년, 중국 육군군관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은 뒤 중국군 초급간부가 됐다.
최용덕은 1919년 3·1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사직하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가 있던 북경은 1910년 경술국치와 1919년 3·1운동 이후 다수의 독립운동가들과 유학생들이 이주해 활동했던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최용덕은 북경의 대한독립청년단에 참여해 갖가지 활동을 벌였다.
이 시기 의열단에도 가입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에서 창립된 신흥무관출신으로 구성된 항일 무장독립운동단체였다. 의열단은 1920년 본거지를 길림에서 북경으로 옮겼고, 최용덕은 이때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최용덕은 1923년 의열단을 떠나 임시정부에 들어가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동시에 중화민국 공군으로 복무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중국의 보정항공학교에 입교해 전투기 조종사로 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보정항공학교를 수료한 후에는 1924년 오패부 군벌 소속으로 제2차 직봉전쟁에 참여했다. 직봉전쟁은 영국과 미국의 세력을 대변하고 있던 오패부와 일본의 지지를 받던 장작림의 봉천 군벌 사이의 내전이었다. 최용덕은 직계군벌인 손전방의 지휘 아래 낙양항공학교에서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하는 한편 직접 전투에도 참여했다.
최용덕은 이어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에 참여했다. 중국국민당의 장개석이 중국 내 군벌 타도를 위한 북벌을 단행하던 시기였다. 당시 국민혁명군에 있던 독립운동 동지인 김홍일의 요청에 따라 국민혁명군 진영으로 합류했다. 1927년에는 운남항공학교 출신 이영무, 권기옥 그리고 소련비행학교 출신 장지철 등과 함께 중화민국 공군 창설에 기여했다. 1928년에는 수상비행대 부대장에 임명돼 북벌에 참여했다.
전투기 조종사로 일제와 맞서 싸우기도 했다. 1932년 일본 해군육전대와 항공부대가 중국 상해를 침공하던 당시 최용덕은 국민혁명군 소속의 항공 부대장으로 재직하면서 일본군과 공중전을 벌였다. 이후 1934년 중앙항공학교 교육처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며 중국 공군 대령으로 활약했다.
이처럼 최용덕은 중화민국 공군에 소속돼 있으면서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일본군이 만주로 침공하자 만주의 독립군과 항일 중국군이 연합으로 일본군과 싸울 당시 지청천 장군 휘하의 한국독립군 소속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만주 대륙의 동서를 오가며 때로는 중국군 소속으로, 때로는 독립군으로 전선을 누볐다.
만주의 한국독립군이 1930년대 중반 남경으로 철수하자 최용덕은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 헌신했다. 그리고 1940년 중일전쟁의 여파로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이전해 광복군을 창설하자 곧바로 합류했다.
최용덕은 한국광복군 비서처 업무를 관장하면서 총사령 이청천을 보좌했다. 1942년과 1943년 총사령부의 편제가 개편되면서 각각 총무처장과 참모처장으로 임명되어 한국광복군의 운영과 실무를 총괄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이범석 초대 국방부 장관(앞줄 중앙) 옆에서 당시 군 수뇌부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최용덕 차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최용덕은 1946년 7월에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귀국 이후 줄곧 군인으로서 공군 창설에 노력했다. 최용덕은 귀국을 계기로 난립해 있던 항공 관련 단체들을 연합해 항공단체통합주비위원회를 결성하고 공군 창설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최용덕은 미 군정이 조선경비대 내에 항공부대 창설을 추진하자 1948년 4월 미국식 군사교육을 이수하고 소위로 조선경비대에 임관했다. 당시 미 군정은 국내 항공계 인사들이 일본군 항공대나 중국 공군 출신이기 때문에 과거 경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새로 훈련을 받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베테랑 조종사 출신의 항공계 지도자들은 치욕이라며 분노했다. 하지만 최용덕은 “과거 이순신 장군도 조국을 위해 백의종군을 했듯이 공군 창설을 위해 참고 견디자”고 설득했다.
그렇게 입교한 최용덕, 이영무, 장덕창, 박범집, 김정렬, 이근석, 김영환 7인을 오늘날 공군에서는 ‘공군 창설 7인의 간부’라고 부른다. 최용덕은 같은 해 6월 조선경비대 항공처장 및 통위부 항공총감으로 부대장에 임명됐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된 다음 날인 8월 16일, 최용덕은 국방부 차관에 발탁됐다. 최용덕은 과거 광복군 동지였던 이범석 국방부 장관과 함께 국군조직을 새롭게 개선하며 내실을 다졌다. 특히 국군조직법 부칙에 ‘육군에 속한 항공병은 필요한 때에 독립한 공군으로 조직할 수 있다’라는 조항을 넣어 공군 창설의 근거를 마련했다.
1949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254호에 의해 공군이 창설됐다. 육군항공사령부가 대한민국 공군으로 독립한 것이었다. 당시 공군의 전력은 병력 1600여 명과 연락기 20여 대가 전부였다. 초대 공군 총참모장(참모총장)에는 32세의 젊은 김정렬 대령이 임명됐다. 공군에서는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최용덕이 최고 서열이었지만, 최용덕이 초대 국방부 차관의 중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김정렬이 임명됐다.
바로 이날 중국에서는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군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의 모택동이 북경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이때부터 중국 공산당의 실체를 잘 알고 있는 최용덕을 비롯한 국민혁명군 출신들은 앞으로 닥쳐올 공산주의의 침략을 예감했다.
불행하게도 미국은 소련과 중공의 원조를 받아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는 북한의 위협에 너무도 안일했다. 미국은 전투기를 원조해 달라는 우리 정부의 요청을 번번이 거부했다. 반면 북한군은 수백 대의 전차는 물론 100대가 넘는 전투기를 보유하며 침략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최용덕은 전쟁이 터지기 열흘 전 국방부 차관에서 공군으로 복귀했다. 현지 임관으로 공군 준장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보직은 공군사관학교 교장이었고, 전쟁 당일인 6월 25일에는 김포지구 전투사령관 자리를 겸하도록 발령됐다. 그렇게 어수선한 상황에서 기어코 전쟁은 터졌다.
최용덕 장군은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된 25일 아침 북한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했다는 전쟁 소식을 들었다. 전투기 한 대 없는 상황에서 6·25전쟁을 맞닥뜨린 최용덕은 장군은 망연자실했다.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는 공군의 현실을 개탄하며 공군사관학교 생도와 항공기지사령부의 장병 100여 명으로 혼성부대를 편성했다. 무기라고는 일본군이 쓰던 소총이 전부였다.
6월 27일 국방부로부터 후퇴를 명받자 공군은 T-6 훈련기 9대와 연락기 12대 등 총 21대를 수원비행장으로 대피시켰다. 최용덕도 부하들과 함께 후방으로 후퇴했다. 이후 최용덕 장군은 항공기지사령부와 공군사관학교, 보급창, 헌병대, 공군병원 등을 통합한 ‘공군후방사령부’의 사령관을 맡아 공군전력을 보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공군이 전투기를 들여온 것은 전쟁이 발발한 지 열흘이 지나서였다. 전쟁 다음 날인 6월 26일 저녁에 대한민국 공군 10인의 조종사들이 미군이 보낸 수송기를 타고 일본의 미 공군기지로 날아갔다. 이어 이들 10인의 조종사들은 일본에서 간단히 비행훈련을 받고 태극마크가 그려진 10대의 F-51 전투기를 조종해 7월 2일 대구 비행장에 도착했다. 대한민국 공군의 염원이던 전투기 보유가 전쟁이 터지자 10일 만에 이뤄진 셈이었다.
개전 초기 일방적으로 밀리던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아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미 극동공군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북한군에 비해 모든 것이 열세였던 국군은 제공권을 장악하고 지상군을 근접 지원한 미 공군의 도움으로 버틸 수 있었다. 비록 F-51 전투기 9대에 불과했지만 대한민국 공군도 적극적으로 활약했다.
최용덕 장군은 1950년 11월 28일, 공군참모부장에 임명됐다. 공군의 모든 전략과 전투 임무를 책임지는 자리였다. 당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수세에 몰리던 시기였다. 최용덕은 공군의 전투력을 재정비한 뒤 1951년 이후 고지전으로 전황이 바뀌자 근접 전투지원에 역량을 집중했다. 52년 12월에는 2대 공군총참모장(참모총장)이 돼 전쟁이 끝날 때까지 351고지 전투지원작전 등 공군의 모든 작전을 지휘하며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1956년 공군 중장으로 전역한 후에는 체신부 장관과 주 중화민국(대만) 대사 등을 역임한 뒤 1969년 8월 별세했다.
최용덕 장군은 공군의 아버지이자 개척자로서 평생을 부끄러움이 없는 강직한 군인의 삶을 살았다. 일찍이 이역만리 중국에서 독립을 위해 항일무장투쟁을 하고 해방 후에는 공군 창설과 강한 공군 육성을 위해 헌신한 최용덕 장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자랑스러운 전쟁영웅이다.
창군 초기 공군의 L-4 연락기. 공군은 6.25전쟁 발발 시 단 한 대의 전투기도 없이 연락기와 훈련기만으로 북한군과 싸웠다. 공군 제공
F-51 무스탕 전투기가 대한해협을 건너 비행하는 모습.
대한민국 국군은 100년의 전쟁역사를 갖고 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에 의해 지어진 뒤 1948년 정식 정부 수립 후에도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산하로 편입해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였다. 100년이 넘는 전쟁역사의 출발점이다. 이에 국방저널(국방일보)은 올해부터 지난 100년간 나라를 위해 앞장서서 싸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전쟁영웅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10월호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공군의 창설 주역으로서 일찍이 일제와 무장독립투쟁을 벌이다가 광복 후 6·25전쟁이 벌어지자 공군의 전투를 지휘하며 조국을 구하는 데 앞장선 최용덕 장군이다. 글=정호영 기자/사진=국방일보 DB
강원도 최북단 고성의 통일전망대에 전시된 공군351고지 전투지원작전 기념비와 F-86 세이버 전투기. F-86은 6·25전쟁 중 도입된 서방권 최고의 제트 전투기였다. 조용학 기자
10월 1일은 국군의 날이지만 공군의 창설일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공군은 1949년 10월 1일 창설됐다. 지난 2019년 공군은 창군 70주년을 맞아 공군 창군의 주역인 최용덕 장군 동상을 제막하는 행사를 공군사관학교에서 성대하게 열었다. 공군에서 최용덕 장군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한민국 공군의 정신적 지주로 불리는 최용덕 장군은 타고난 무인이다. 그는 100년의 대한민국 전쟁역사에서 보기 드문 다양한 항일무장투쟁 경력이 있다. 테러 등을 통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의열단을 시작으로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했으며, 때로는 중국군 신분으로 하늘과 땅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도 맹활약한 전형적인 독립투사였다.
해방 이후에는 공군을 창설하기 위해 미군정청의 억지 요구에 당당하게 50세의 나이로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해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시에는 초대 국방부 차관이 돼 국군의 조직을 정비하면서 1949년 10월 1일 공군이 창설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했다. 최용덕 장군은 공군의 가장 큰 어른이었지만 공군이 창설되자 초대 총참모장(참모총장) 자리를 기꺼이 후배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전쟁이 터지자 공군의 작전 책임자가 돼 일선의 전투를 섬세하게 지휘했다. 최용덕 장군은 또 공군 현대화의 선봉장이었다. 전쟁 중 2대 총참모장에 취임해 제트 전투기를 도입하는 사업에 박차를 가해 대한민국 공군을 제트 전투기 시대로 이끌었다.
최용덕 장군은 한평생 청렴한 군인이었다. 그는 중국 공군에 복무하면서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도 활약하던 시절, 월급의 3분의 2를 광복군에게 헌납하며 청빈하게 살았다. 워낙 청렴해 일화도 많다. 6·25전쟁 중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최용덕 장군의 집에 들이닥쳤다가 너무도 초라한 살림을 보고 “이 집이 정말 최용덕의 집이 맞느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돌아간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늘 주변 사람과 부하들을 챙기느라 일흔 살까지 셋방살이를 면치 못했던 그는 별세할 당시 전 재산이 손녀딸에게 우유를 사주고 남은 거스름돈 240원이 전부였다고 전해진다.
하늘은 최용덕 장군의 고향이자 삶의 무대였다. 그는 항상 “우리의 살 곳도 하늘이요, 우리의 죽을 마당도 하늘이요, 우리의 일터도 하늘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는 임종을 며칠 앞두고는 공군 후배들에게 “내가 죽거든 수의 대신 공군복을 입혀주기 바란다”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공군 창설과 강한 공군 육성은 최용덕 장군의 일생을 관통하는 염원이자 이상이었다. 공군의 개척자이자 아버지로서 한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침략자인 북한군과 싸웠던 그를 ‘대한민국의 전쟁영웅’에서 재조명한다.
최용덕(崔用德)은 1898년 9월 19일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봉명학교에 입학해 근대 교육을 받은 뒤 경술국치 이후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북경에서 2년 동안 숭실중학교를 다니며 중국어와 새로운 사상을 배우고 익혔다. 18세가 되던 1916년, 중국 육군군관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은 뒤 중국군 초급간부가 됐다.
최용덕은 1919년 3·1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사직하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가 있던 북경은 1910년 경술국치와 1919년 3·1운동 이후 다수의 독립운동가들과 유학생들이 이주해 활동했던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최용덕은 북경의 대한독립청년단에 참여해 갖가지 활동을 벌였다.
이 시기 의열단에도 가입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에서 창립된 신흥무관출신으로 구성된 항일 무장독립운동단체였다. 의열단은 1920년 본거지를 길림에서 북경으로 옮겼고, 최용덕은 이때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최용덕은 1923년 의열단을 떠나 임시정부에 들어가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동시에 중화민국 공군으로 복무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중국의 보정항공학교에 입교해 전투기 조종사로 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보정항공학교를 수료한 후에는 1924년 오패부 군벌 소속으로 제2차 직봉전쟁에 참여했다. 직봉전쟁은 영국과 미국의 세력을 대변하고 있던 오패부와 일본의 지지를 받던 장작림의 봉천 군벌 사이의 내전이었다. 최용덕은 직계군벌인 손전방의 지휘 아래 낙양항공학교에서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하는 한편 직접 전투에도 참여했다.
최용덕은 이어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에 참여했다. 중국국민당의 장개석이 중국 내 군벌 타도를 위한 북벌을 단행하던 시기였다. 당시 국민혁명군에 있던 독립운동 동지인 김홍일의 요청에 따라 국민혁명군 진영으로 합류했다. 1927년에는 운남항공학교 출신 이영무, 권기옥 그리고 소련비행학교 출신 장지철 등과 함께 중화민국 공군 창설에 기여했다. 1928년에는 수상비행대 부대장에 임명돼 북벌에 참여했다.
전투기 조종사로 일제와 맞서 싸우기도 했다. 1932년 일본 해군육전대와 항공부대가 중국 상해를 침공하던 당시 최용덕은 국민혁명군 소속의 항공 부대장으로 재직하면서 일본군과 공중전을 벌였다. 이후 1934년 중앙항공학교 교육처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며 중국 공군 대령으로 활약했다.
이처럼 최용덕은 중화민국 공군에 소속돼 있으면서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일본군이 만주로 침공하자 만주의 독립군과 항일 중국군이 연합으로 일본군과 싸울 당시 지청천 장군 휘하의 한국독립군 소속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만주 대륙의 동서를 오가며 때로는 중국군 소속으로, 때로는 독립군으로 전선을 누볐다.
만주의 한국독립군이 1930년대 중반 남경으로 철수하자 최용덕은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 헌신했다. 그리고 1940년 중일전쟁의 여파로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이전해 광복군을 창설하자 곧바로 합류했다.
최용덕은 한국광복군 비서처 업무를 관장하면서 총사령 이청천을 보좌했다. 1942년과 1943년 총사령부의 편제가 개편되면서 각각 총무처장과 참모처장으로 임명되어 한국광복군의 운영과 실무를 총괄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이범석 초대 국방부 장관(앞줄 중앙) 옆에서 당시 군 수뇌부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최용덕 차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최용덕은 1946년 7월에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귀국 이후 줄곧 군인으로서 공군 창설에 노력했다. 최용덕은 귀국을 계기로 난립해 있던 항공 관련 단체들을 연합해 항공단체통합주비위원회를 결성하고 공군 창설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최용덕은 미 군정이 조선경비대 내에 항공부대 창설을 추진하자 1948년 4월 미국식 군사교육을 이수하고 소위로 조선경비대에 임관했다. 당시 미 군정은 국내 항공계 인사들이 일본군 항공대나 중국 공군 출신이기 때문에 과거 경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새로 훈련을 받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베테랑 조종사 출신의 항공계 지도자들은 치욕이라며 분노했다. 하지만 최용덕은 “과거 이순신 장군도 조국을 위해 백의종군을 했듯이 공군 창설을 위해 참고 견디자”고 설득했다.
그렇게 입교한 최용덕, 이영무, 장덕창, 박범집, 김정렬, 이근석, 김영환 7인을 오늘날 공군에서는 ‘공군 창설 7인의 간부’라고 부른다. 최용덕은 같은 해 6월 조선경비대 항공처장 및 통위부 항공총감으로 부대장에 임명됐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된 다음 날인 8월 16일, 최용덕은 국방부 차관에 발탁됐다. 최용덕은 과거 광복군 동지였던 이범석 국방부 장관과 함께 국군조직을 새롭게 개선하며 내실을 다졌다. 특히 국군조직법 부칙에 ‘육군에 속한 항공병은 필요한 때에 독립한 공군으로 조직할 수 있다’라는 조항을 넣어 공군 창설의 근거를 마련했다.
1949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254호에 의해 공군이 창설됐다. 육군항공사령부가 대한민국 공군으로 독립한 것이었다. 당시 공군의 전력은 병력 1600여 명과 연락기 20여 대가 전부였다. 초대 공군 총참모장(참모총장)에는 32세의 젊은 김정렬 대령이 임명됐다. 공군에서는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최용덕이 최고 서열이었지만, 최용덕이 초대 국방부 차관의 중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김정렬이 임명됐다.
바로 이날 중국에서는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군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의 모택동이 북경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이때부터 중국 공산당의 실체를 잘 알고 있는 최용덕을 비롯한 국민혁명군 출신들은 앞으로 닥쳐올 공산주의의 침략을 예감했다.
불행하게도 미국은 소련과 중공의 원조를 받아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는 북한의 위협에 너무도 안일했다. 미국은 전투기를 원조해 달라는 우리 정부의 요청을 번번이 거부했다. 반면 북한군은 수백 대의 전차는 물론 100대가 넘는 전투기를 보유하며 침략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최용덕은 전쟁이 터지기 열흘 전 국방부 차관에서 공군으로 복귀했다. 현지 임관으로 공군 준장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보직은 공군사관학교 교장이었고, 전쟁 당일인 6월 25일에는 김포지구 전투사령관 자리를 겸하도록 발령됐다. 그렇게 어수선한 상황에서 기어코 전쟁은 터졌다.
최용덕 장군은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된 25일 아침 북한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했다는 전쟁 소식을 들었다. 전투기 한 대 없는 상황에서 6·25전쟁을 맞닥뜨린 최용덕은 장군은 망연자실했다.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는 공군의 현실을 개탄하며 공군사관학교 생도와 항공기지사령부의 장병 100여 명으로 혼성부대를 편성했다. 무기라고는 일본군이 쓰던 소총이 전부였다.
6월 27일 국방부로부터 후퇴를 명받자 공군은 T-6 훈련기 9대와 연락기 12대 등 총 21대를 수원비행장으로 대피시켰다. 최용덕도 부하들과 함께 후방으로 후퇴했다. 이후 최용덕 장군은 항공기지사령부와 공군사관학교, 보급창, 헌병대, 공군병원 등을 통합한 ‘공군후방사령부’의 사령관을 맡아 공군전력을 보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공군이 전투기를 들여온 것은 전쟁이 발발한 지 열흘이 지나서였다. 전쟁 다음 날인 6월 26일 저녁에 대한민국 공군 10인의 조종사들이 미군이 보낸 수송기를 타고 일본의 미 공군기지로 날아갔다. 이어 이들 10인의 조종사들은 일본에서 간단히 비행훈련을 받고 태극마크가 그려진 10대의 F-51 전투기를 조종해 7월 2일 대구 비행장에 도착했다. 대한민국 공군의 염원이던 전투기 보유가 전쟁이 터지자 10일 만에 이뤄진 셈이었다.
개전 초기 일방적으로 밀리던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아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미 극동공군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북한군에 비해 모든 것이 열세였던 국군은 제공권을 장악하고 지상군을 근접 지원한 미 공군의 도움으로 버틸 수 있었다. 비록 F-51 전투기 9대에 불과했지만 대한민국 공군도 적극적으로 활약했다.
최용덕 장군은 1950년 11월 28일, 공군참모부장에 임명됐다. 공군의 모든 전략과 전투 임무를 책임지는 자리였다. 당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수세에 몰리던 시기였다. 최용덕은 공군의 전투력을 재정비한 뒤 1951년 이후 고지전으로 전황이 바뀌자 근접 전투지원에 역량을 집중했다. 52년 12월에는 2대 공군총참모장(참모총장)이 돼 전쟁이 끝날 때까지 351고지 전투지원작전 등 공군의 모든 작전을 지휘하며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1956년 공군 중장으로 전역한 후에는 체신부 장관과 주 중화민국(대만) 대사 등을 역임한 뒤 1969년 8월 별세했다.
최용덕 장군은 공군의 아버지이자 개척자로서 평생을 부끄러움이 없는 강직한 군인의 삶을 살았다. 일찍이 이역만리 중국에서 독립을 위해 항일무장투쟁을 하고 해방 후에는 공군 창설과 강한 공군 육성을 위해 헌신한 최용덕 장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자랑스러운 전쟁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