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부국강병과 군사력 증강 强兵富國
부유할 부 나라 국 강할 강 병사 병
나라를 부유케 하고 강한 군대를 만들다
국방과학연 청계천 드나들며 자료 수집
병기 도면 없어 미군 장비 분해 역설계
M1·기관총 등 개발해 향토예비군 무장
이미 세계 최초로 철갑선 만든 우리
세계 최고 조선산업으로 이어 받아
이젠 이지스 구축함·경항모 등 건조
선조들은 뛰어난 지혜로 세계에서 가장 먼저 철갑선을 만들었다. 국군은 동북아를 넘어 세계 으뜸 강군으로 도약하고 있다. 필자 제공(일러스트 한가영)
내일(10월 1일)은 제73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이 열린다. 국민의 ‘벗’으로, 대한민국의 ‘빛’으로 나아가는 주역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국군은 1970년대부터 강한 군대로 우뚝 서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원동력이었다. 안보의 거친 광야에 길을 내고, 국방의 메마른 사막에 강물을 흘렸다. 강병의 씨앗으로 부국의 열매를 맺었다.
부국강병으로 괄목상대한 발전
부국강병은 국가 흥망성쇠의 으뜸이었다. 역사상 많은 현자가 그 비책을 제안했다. 기원전 316년 진나라 혜문왕은 국가발전 전략을 논했다. 장의는 한나라 공격, 사마착은 촉나라 공격이 국익에 이롭다고 주장했다.
사마착은 “나라를 부유케 하려면 그 땅을 넓히는 데 힘쓰고(欲富國者 務廣其地·욕부국자 무광기지) 군사를 강하게 하려면 백성을 부유케 만드는 데 힘쓰며(欲强兵者 務富其民·욕강병자 무부기민) 왕업을 이루려면 그 덕을 넓히는 데 힘써야 한다(欲王者 務博其德·욕왕자 무박기덕)”라고 했다. 그는 진나라 땅은 좁고 백성은 가난하므로 촉나라를 공격해 땅을 넓혀 백성을 부유케 하면 강대한 나라가 됨을 역설했다. 혜문왕은 사마착 의견에 따라 촉나라를 공격하고, 진장을 보내 다스리게 했다. 『전국책』의 ‘진책’에 나온다.
진나라는 이때부터 7국 중에서 강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이런 발전을 ‘괄목상대’라 하는데 학식이나 능력이 예전보다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는 말이다.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손권은 부하 여몽이 무술에 뛰어났으나 학문에 소홀함을 나무랐다. 여몽은 이때부터 학문에 열중했다. 재상 노숙이 그의 달라진 모습에 놀랐다. 이에 여몽이 “선비가 사흘을 떨어져 있다가 다시 대할 때는 눈을 비비고 대해야 한다(士別三日 卽當 刮目相對·사별삼일 즉당 괄목상대)”라고 말한 『삼국지』의 ‘오지(吳志)’에서 유래됐다. 국군은 강군으로 괄목상대한 발전을 이뤘다.
‘번개사업’으로 군사력 증강 발판 마련
1960년대 중반 한국은 베트남전쟁 참전으로 경제발전 디딤돌이 마련됐다. 경제력은 군사력 증강의 든든한 뒷배였다. ‘부국’은 ‘강병’으로 이어졌다. 1968년 강병의 결정적 계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북한이 일으킨 ‘1·21 사태’와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도발에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말까지 국산 소총과 3.5인치 박격포 등 기본 병기 8종 시제품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국방과학연구소 무기개발팀은 청계천을 드나들며 자료가 될 만한 것들을 수집했다. 당시 청계천에는 주한미군에서 흘러나온 각종 장비와 기술교범이 거래되고 있었다. 작은 철공소에서는 부품 제작도 가능했다.
개발팀은 병기 도면이 없어 미군 장비를 분해해 역설계했다. 소재를 구할 수 없어 무기 외형만 알루미늄 주물로 제작하며 악전고투했다. 작업 착수 40일 만에 M1과 카빈 소총, 기관총, 60·81㎜ 박격포, 3.5인치 로켓 발사기, 크레모어, 대전차 지뢰 시제품을 개발했다. 이 무기들은 성능개량을 거쳐 향토예비군 250만 명이 무장했다. 비로소 자주국방 기틀이 다져졌다. 정부는 방위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했다. 창원공업단지를 방위산업 메카로 만들었다. 1974년부터는 전력증강 사업인 ‘율곡사업’을 시작해 강군으로 거듭났다.
“해봤어”로 대양을 누비는 거북선 후예들
이 무렵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조선소 건설에 착수했다. 문제는 차관 외화 도입이었다. 그땐 전 국민이 1년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는 10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는 1970년 일본과 미국에서 거절당하고 영국 바클레이즈 은행의 문을 두드렸다. 은행 융자에는 사업계획서와 추천서가 필요했다.
그는 A&P애플도어사(社) 롱바통 회장을 만났다. 그에게 추천서를 부탁했으나 거절당할 순간이었다. 그에게는 조선소를 지을 울산 미포만의 모래사장을 찍은 흑백사진 1장뿐이었다. 사진에는 아무 구조물도 없는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집 몇 채뿐인 초라한 백사장이 전부였다. 정주영은 그때 주머니에서 500원 지폐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이 지폐 그림이 거북선이다. 우리는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든 두뇌가 있다. 영국보다 300년 앞섰다. 단지 쇄국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다.” 정 회장은 추천서를 받는 데 성공했고 이는 세계 최고 조선산업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그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위기는 기회’ 표준서로 읽히고 있다.
오늘날 거북선 후예들은 차세대 이지스 구축함과 경항공모함 건조를 추진하고 있다. 우리 손으로 한국형 전투기 보라매(KF-21)도 개발하고 있다. 내일 경북 포항에서 상륙작전을 재현할 국군 장병의 우렁찬 함성이 동해 건너 태평양에 울려 퍼진다.
필자 오홍국 국제정치학박사는 역사안보·전략전술 등 다양한 분야 집필과 기고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손자와 클라우제비츠에게 길을 묻다』 『간접접근코드』 등이 있다.
38 부국강병과 군사력 증강 强兵富國
부유할 부 나라 국 강할 강 병사 병
나라를 부유케 하고 강한 군대를 만들다
국방과학연 청계천 드나들며 자료 수집
병기 도면 없어 미군 장비 분해 역설계
M1·기관총 등 개발해 향토예비군 무장
이미 세계 최초로 철갑선 만든 우리
세계 최고 조선산업으로 이어 받아
이젠 이지스 구축함·경항모 등 건조
선조들은 뛰어난 지혜로 세계에서 가장 먼저 철갑선을 만들었다. 국군은 동북아를 넘어 세계 으뜸 강군으로 도약하고 있다. 필자 제공(일러스트 한가영)
내일(10월 1일)은 제73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이 열린다. 국민의 ‘벗’으로, 대한민국의 ‘빛’으로 나아가는 주역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국군은 1970년대부터 강한 군대로 우뚝 서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원동력이었다. 안보의 거친 광야에 길을 내고, 국방의 메마른 사막에 강물을 흘렸다. 강병의 씨앗으로 부국의 열매를 맺었다.
부국강병으로 괄목상대한 발전
부국강병은 국가 흥망성쇠의 으뜸이었다. 역사상 많은 현자가 그 비책을 제안했다. 기원전 316년 진나라 혜문왕은 국가발전 전략을 논했다. 장의는 한나라 공격, 사마착은 촉나라 공격이 국익에 이롭다고 주장했다.
사마착은 “나라를 부유케 하려면 그 땅을 넓히는 데 힘쓰고(欲富國者 務廣其地·욕부국자 무광기지) 군사를 강하게 하려면 백성을 부유케 만드는 데 힘쓰며(欲强兵者 務富其民·욕강병자 무부기민) 왕업을 이루려면 그 덕을 넓히는 데 힘써야 한다(欲王者 務博其德·욕왕자 무박기덕)”라고 했다. 그는 진나라 땅은 좁고 백성은 가난하므로 촉나라를 공격해 땅을 넓혀 백성을 부유케 하면 강대한 나라가 됨을 역설했다. 혜문왕은 사마착 의견에 따라 촉나라를 공격하고, 진장을 보내 다스리게 했다. 『전국책』의 ‘진책’에 나온다.
진나라는 이때부터 7국 중에서 강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이런 발전을 ‘괄목상대’라 하는데 학식이나 능력이 예전보다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는 말이다.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손권은 부하 여몽이 무술에 뛰어났으나 학문에 소홀함을 나무랐다. 여몽은 이때부터 학문에 열중했다. 재상 노숙이 그의 달라진 모습에 놀랐다. 이에 여몽이 “선비가 사흘을 떨어져 있다가 다시 대할 때는 눈을 비비고 대해야 한다(士別三日 卽當 刮目相對·사별삼일 즉당 괄목상대)”라고 말한 『삼국지』의 ‘오지(吳志)’에서 유래됐다. 국군은 강군으로 괄목상대한 발전을 이뤘다.
‘번개사업’으로 군사력 증강 발판 마련
1960년대 중반 한국은 베트남전쟁 참전으로 경제발전 디딤돌이 마련됐다. 경제력은 군사력 증강의 든든한 뒷배였다. ‘부국’은 ‘강병’으로 이어졌다. 1968년 강병의 결정적 계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북한이 일으킨 ‘1·21 사태’와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도발에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말까지 국산 소총과 3.5인치 박격포 등 기본 병기 8종 시제품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국방과학연구소 무기개발팀은 청계천을 드나들며 자료가 될 만한 것들을 수집했다. 당시 청계천에는 주한미군에서 흘러나온 각종 장비와 기술교범이 거래되고 있었다. 작은 철공소에서는 부품 제작도 가능했다.
개발팀은 병기 도면이 없어 미군 장비를 분해해 역설계했다. 소재를 구할 수 없어 무기 외형만 알루미늄 주물로 제작하며 악전고투했다. 작업 착수 40일 만에 M1과 카빈 소총, 기관총, 60·81㎜ 박격포, 3.5인치 로켓 발사기, 크레모어, 대전차 지뢰 시제품을 개발했다. 이 무기들은 성능개량을 거쳐 향토예비군 250만 명이 무장했다. 비로소 자주국방 기틀이 다져졌다. 정부는 방위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했다. 창원공업단지를 방위산업 메카로 만들었다. 1974년부터는 전력증강 사업인 ‘율곡사업’을 시작해 강군으로 거듭났다.
“해봤어”로 대양을 누비는 거북선 후예들
이 무렵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조선소 건설에 착수했다. 문제는 차관 외화 도입이었다. 그땐 전 국민이 1년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는 10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는 1970년 일본과 미국에서 거절당하고 영국 바클레이즈 은행의 문을 두드렸다. 은행 융자에는 사업계획서와 추천서가 필요했다.
그는 A&P애플도어사(社) 롱바통 회장을 만났다. 그에게 추천서를 부탁했으나 거절당할 순간이었다. 그에게는 조선소를 지을 울산 미포만의 모래사장을 찍은 흑백사진 1장뿐이었다. 사진에는 아무 구조물도 없는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집 몇 채뿐인 초라한 백사장이 전부였다. 정주영은 그때 주머니에서 500원 지폐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이 지폐 그림이 거북선이다. 우리는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든 두뇌가 있다. 영국보다 300년 앞섰다. 단지 쇄국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다.” 정 회장은 추천서를 받는 데 성공했고 이는 세계 최고 조선산업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그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위기는 기회’ 표준서로 읽히고 있다.
오늘날 거북선 후예들은 차세대 이지스 구축함과 경항공모함 건조를 추진하고 있다. 우리 손으로 한국형 전투기 보라매(KF-21)도 개발하고 있다. 내일 경북 포항에서 상륙작전을 재현할 국군 장병의 우렁찬 함성이 동해 건너 태평양에 울려 퍼진다.
필자 오홍국 국제정치학박사는 역사안보·전략전술 등 다양한 분야 집필과 기고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손자와 클라우제비츠에게 길을 묻다』 『간접접근코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