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박찬용 조명탄] 고문관과 매뉴얼

입력 2021. 08. 24   16:07
업데이트 2021. 08. 24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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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보다 나은 방법 만들려면
매뉴얼을 완벽히 익혀야 한다
그래야 나의 방식이 낫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으니까


박찬용 칼럼니스트
박찬용 칼럼니스트


요즘은 고문관이란 말 자체가 사라졌다. 군대에서 다른 전우들과 미묘하게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한 전우를 고문관이라고 했던 것 같다. 이 고문관의 어원이 무엇인지, 그 어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문관이라는 말에는 한미 동맹의 역사가 있고, 미국이라는 나라의 본질이 함축돼 있다.

고문관이라는 말은 일제 식민 강점이 끝난 1940년대 후반에 시작된다. 일본은 역사상 유일무이한 핵폭탄 공격을 받고 단번에 패전을 선언했고, 그 결과 일본 식민치하 조선은 갑자기 무정부 상태에 놓였다. 당시 연합국 중 미국은 한반도 방위를 돕기 위해 군대 훈련과 보급을 지원했다. 이때 만들어진 부대가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이하 KMAG)이고, KMAG는 그 이후 베트남과 이라크 등에서 국가 재건을 지원하는 미군 군사 고문단의 시초가 된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을 고문관이라고 불렀는데, 한국인들이 보기에 고문관이 너무 매뉴얼과 원칙에 치중해서 일이 늦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일을 잘 못하는 사람들을 ‘고문관’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전설 같지만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뿌리 깊은 한미 관계를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 미국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매뉴얼로부터 시작된 나라라는 것이다. 보통의 오래된 나라들은 상징체계로 만들어진 건국 신화가 있다. 미국은 건국 신화의 자리에 독립선언서와 미국 헌법이 있다. 미 합중국은 처음부터 종교 박해를 떠나 대서양을 넘어온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만든 국가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에 모두가 동의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의 합의와 그 결과를 문서로 남기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 합의 과정이 민주주의고 문서가 미국 헌법이다. 헌법은 결국 미국이라는 국가 시스템의 매뉴얼인 셈이다. 미국의 맨 아래 바탕에 매뉴얼이 있다.

매뉴얼을 따라해 보면 안다. 처음에는 답답해 보여도 매뉴얼 대로 하는 게 효율적일 때가 많다. 매뉴얼을 건너뛰고 조금 빨리 하려다 보면 언젠가는 문제가 생긴다. 매뉴얼을 만드는 사람은 그게 일이기 때문에 그걸 보고 한 두 번 따라 해 보는 보통 사람보다 나을 것이 당연하다. 매뉴얼 대로 하나씩 하는 게 나쁜 것도 아니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는 어릴 때부터 “느린 것은 부드러운 것. 부드러운 것이 빠른 것”이라는 말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느리고 부드럽게 일을 하나씩 해 나간 제프 베조스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을 만들고 우주로 로켓을 쏘는 중이다.

매뉴얼이 만능은 아니다. 세상은 매뉴얼보다 넓고 매뉴얼보다 나은 방법도 있을 수 있다. 다만 매뉴얼보다 나은 방법을 만들려면 역설적으로 매뉴얼을 완벽히 익혀야 한다. 그래야 매뉴얼보다 나의 방식이 낫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으니까. 스위스 최고급 시계 브랜드의 광고 문구 중엔 이런 게 있다. “규칙을 부수기 위해서는 우선 그 규칙을 마스터 해야 한다.” 그 말대로 그 회사는 정말 남다르고 정밀하고 값비싼 시계를 만들고, 요즘 같은 스마트워치의 시대에도 그 시계는 늘 인기다.

군대는 조직 특성상 아주 자세한 매뉴얼이 있을 수밖에 없다. 군대가 아니면 누가 내 신발을 잘 닦으라고 하겠나. 살면서 이렇게 매사에 매뉴얼이 있는 조직을 느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자신이 매뉴얼 속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체험해보는 기회가 되니까. 군대에서의 여러 경험이 앞으로 여러분의 삶을 택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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