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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안 물을게…獨 기술 사활 건 美·蘇 막후 전쟁

입력 2021. 06. 30   16:21
업데이트 2021. 06. 3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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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과학자 확보 작전 -‘페이퍼클립’ 작전과 ‘오소아비아킴’ 작전
 
2차대전서 위력 입증 나치 무기 눈독
음속 전투기·장거리 로켓 최대 관심
첩보 조직 총동원 고급인력 확보 혈안
 
미·소 건너간 독일 기술 세계사 바꿔
달착륙·최초 인공위성 등 우주 개척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유럽 전선의 소련과 미국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쟁이 전개되었다. 양국은 독일의 과학자들을 1명이라도 더 확보하고자 혈안이 되었다. 연합군과 소련군은 독일군의 뛰어난 무기들과 비슷한 무기를 제작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독일군이 지닌 MG42 기관총은 엄청난 연사속도를 지녔다. 전쟁 후반기에 등장한 보병용 대전차 화기 ‘팬저 파우스트’와 ‘판처 슈레크’는 현재에도 운용될 만큼 뛰어났다. 독일군의 ‘타이거 전차’는 연합군이 지닌 어떤 전차보다 화력과 방어력이 우수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등장한 독일군의 V2 로켓이 발사되고 있는 모습. 필자 제공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등장한 독일군의 V2 로켓이 발사되고 있는 모습. 필자 제공

세계 최초의 음속 전투기 Me262.  필자 제공
세계 최초의 음속 전투기 Me262. 필자 제공

무엇보다 연합군과 소련군이 놀란 것은 음속 전투기 ‘Me262’와 장거리 로켓 ‘V1’ ‘V2’였다. 프로펠러 동력 전투기보다 훨씬 빠른 음속 전투기 ‘Me262’가 만약 독일군의 파일럿들이 소진되기 전에 대량 생산되었더라면 전쟁은 더 길어졌을 것이다. ‘V1’은 속도가 느린 탓에 비행 중 많은 수가 격추되었지만, 미국은 V1의 시스템에 정교한 항법장치를 보강하여 훗날 순항미사일 ‘토마호크’를 개발했다. ‘V2’는 음속으로 대기권을 통과한 다음 목표물로 낙하하는 세계 최초의 탄도 미사일이었다. 독일군은 전쟁 말기에 영국 런던과 벨기에 앤트워프 항구에 수천 발의 V2 로켓을 발사했다. 음속의 5~6배에 달하는 속도를 지닌 V2를 막을 방도는 전혀 없었다. V2는 정확도가 개선되어 일찍 등장했다면 전쟁의 결과를 완전히 달라지게 했을 무서운 무기였다. 독일이 핵무기를 개발하여 V2에 탑재하지 못한 것은 인류에게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미국 탐사전문기자 애니 제이콥슨의 저서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이동훈 옮김, 인벤션, 2016)
미국 탐사전문기자 애니 제이콥슨의 저서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이동훈 옮김, 인벤션, 2016)

1944년, 미국과 영국은 합동 첩보조직을 발족하여 독일 과학자들의 소재 파악에 나섰고. 독일의 패망이 다가온 1945년에는 본격적으로 독일의 과학자와 기술진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1945년 11월부터 ‘페이퍼클립(Paperclip)’으로 명명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종전 후 시작된 냉전과 소련의 핵무기 개발로 인해 이 작전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미국 첩보기관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총동원하여 점령지에 거주하는 독일 과학자들을 분류하고, 그들을 미국으로 데려가고자 했다. 소련도 ‘오소아비아킴(Osoaviakhim)’으로 명명한 작전을 펼쳐 점령지에서 붙잡은 독일 과학자들을 자국으로 이송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독일 과학자들의 가족까지 한꺼번에 데려갔다.

미국과 소련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V2 제작·운용 기술이었다. 대기권으로 나갔다가 재진입하는 기술은 전략 핵무기 개발과 향후 우주로 진출하는 계획에 필수적이었다. 미국은 독일의 로켓 개발 총책임자였던 베른헤르 폰 브라운(1912~1977) 박사와 그의 기술팀을 확보했다. 브라운은 어린 시절 천문학자를 꿈꾸다가 인간을 우주에 보내는 방법을 연구하면서 로켓을 개발하기 시작한 천재 과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기술을 바탕으로 미국·소련과 협상을 벌였다. 나치에 협력한 이력으로 자신과 동료들을 처벌하지 않고, 안정적인 연구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브라운의 요구 사항이었다. 브라운은 고심 끝에 미국을 선택했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2000만이 넘는 사상자를 낸 소련이 포로로 잡은 독일인들을 가혹하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미국 CIA에 대소련 첩보 노하우를 전수한 라인하르트 겔렌 장군.  필자 제공
미국 CIA에 대소련 첩보 노하우를 전수한 라인하르트 겔렌 장군. 필자 제공

1946년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독일의 과학자, 기술자, 학자 등 고급인력은 1600명에 달했다. 이들은 미국의 대학, 연구소, 첩보기관, 항공우주국(NASA)에 배치되었고 각종 최신 기술을 전수했다. 폰 브라운은 미국의 우주선 ‘아폴로호’를 만드는 로켓 개발을 시작했고, 항공의학 분야의 선도자인 후베르투스 슈트루크홀트는 인간이 우주에서 견딜 수 있는 우주복을 개발했다. 항공 우주 분야가 아닌 첩보 분야에서도 미국은 독일의 도움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동부전선 정보책임자였던 라인하르트 겔렌 장군은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대소련 첩보 활동을 지원했다. 겔렌의 정보가 없었다면 CIA의 대소련 첩보 활동은 불가능했다. 소련에 끌려갔다가 1957년 미국으로 망명한 전자공학자 프리츠 칼 프라이크슈아트는 인공위성 통신에 이용하는 위상배열 시스템과 항공기 유도 기술을 전수했다. 모두 오늘날까지 활용되는 고급 기술이었다. 독일의 고속도로(아우토반)를 보고 놀란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는 훗날 대통령이 되자 독일 기술진을 데려와서 미국 전역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망을 구축했다.

한편 소련으로 건너간 독일 과학자 만프레드 폰 아르덴(1907~1997)은 핵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폰 브라운의 동료였던 헬무트 그뢰트룹은 소련의 로켓과 우주선 개발을 선도했다. 그뢰트룹의 활약으로 소련은 1957년 10월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렸고, 한 달 후인 11월에는 ‘스푸트니크2호’에 살아있는 개를 태워서 우주로 보냈다. 1961년에는 소련 조종사 유리 가가린(1934~1968)이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지구 궤도 비행에 성공했다. 소련의 우주 진출에 이른바 ‘스푸트니크 충격’을 받은 미국은 과학 교육과 우주 진출 계획을 개편했다. 마침내 미국은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를 달에 착륙시키는 개가를 올렸다. 소련과 미국의 치열한 우주 경쟁은 사실상 그들이 데려간 독일 기술진들의 경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7년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페이퍼클립’ 작전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 작전은 논란에 휩싸였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크게 반발했고, 나치에 부역한 자들의 기술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윤리 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독일의 우수한 의학 기술은 유대인과 전쟁포로를 대상으로 벌인 생체실험 데이터에 기초한 것이었기에 더욱 논란이 되었다. 미국 정부는 개의치 않고 독일의 기술을 흡수했다. 정의롭지 못하다는 비판에 직면했지만, 미국 정부는 나치가 그 기술을 이용하는 상황보다는 낫다고 일축했다. 독일의 기술을 흡수한 미국과 소련의 행위는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 기술들을 인류의 공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는가. 미국 ‘페이퍼클립’ 작전과 소련의 ‘오소아비아킴’ 작전이 남긴 질문이다.

<이정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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