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영
해군 총참모장 시절 도입한 최초 전투함 백두산함
6 25 초기 부산 앞 바다서 北 수송선 격침…전세 전환 평가
국방부 장관 취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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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군은 100년의 전쟁역사를 품고 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에 의해 지어진 뒤 1948년 정식 정부 수립 후에도 계승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산하로 편입해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였다. 100년이 넘는 전쟁역사의 출발점이다. 이에 국방저널(국방일보)은 올해부터 지난 100년간 나라를 위해 앞장서서 싸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전쟁영웅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6월호의 주인공은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을 창설해 해군 총참모장이 된 뒤 6·25전쟁 개전초 북한군의 침략을 해상에서 격퇴한 손원일 제독이다. 글=정호영/사진=국방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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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조국의 미래를 보다
손원일 제독은 1909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인 손정도 선생은 김구·여운형 선생과 함께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에서 일한 독립운동가였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손원일은 일찍부터 애국심이 남달랐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세계열강들의 조계가 설치돼 있던 중국 상해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손원일은 바다에 조국의 미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세계 강국은 해양강국이었고, 상해 앞바다에 즐비한 각국 해군 함정을 보며 해양력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손원일은 남경의 중앙대학교 항해과에 입학했다. 한때 중화민국 해군이 될 생각도 했지만 특정 지역 파벌이 장악하고 있는 중국의 배타적 분위기 탓에 상선사관이 되는 길을 택했다. 대학을 졸업한 손원일은 외국 상선의 항해사가 돼 5대 양을 누볐다. 이 시기 손원일은 해운업계에서 폭넓은 경험을 쌓으며 독일과 미국, 일본 등지에서 경제학과 정치 등 다양한 학문을 익히며 견문을 넓혔다. 부친의 부음 소식도 독일의 1만5000톤급 람세스 호를 타고 인도양을 항해하던 1931년 초 배 안에서 전보로 알았다.
손원일은 1934년 13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그런데 일제 형사가 느닷없이 찾아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첩자라는 누명을 씌워 수개월간 온갖 고문을 자행했다. 이때의 후유증으로 손원일은 평생 협심증과 신경통에 시달리게 된다. 이후 가까스로 풀려난 손원일은 출국 금지된 채 울분의 나날을 보내다가 큰 매형의 도움으로 사업가로 새롭게 출발했다.
1937년 7월에 발발한 중일전쟁은 손원일이 중국으로 다시 나갈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전쟁특수를 노리던 한 식료품 회사에서 일본어, 중국어, 영어, 독일어 등 5개국 언어에 능통한 손원일을 중국 지점장으로 영입했던 것이었다. 일제에 의한 출국 금지 조치도 풀리면서 손원일은 사업가로서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며 재산을 모았다.
1945년 8월 15일, 손원일은 중국 봉천역에서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손원일은 중국에서 그동안 모아둔 재산을 뒤로하고 단숨에 서울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하루빨리 해방된 조국에서 해군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앞섰다. 훗날 대한민국 해군의 역사는 이날 서울행 열차 안에서 밑그림이 그려졌다.
해방된 조국에서 해군을 건설하다
손원일은 8월 16일 서울로 오자마자 해군 창설을 서둘렀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해 1945년 11월 11일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가 되는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설했다. 미 군정청 운송국의 해사과장인 칼스텐 소령을 만나 담판을 벌인 결과였다. 미 군정청은 해안경비대 정도의 수준을 생각했고, 손원일은 해군 건설을 원했다. 양측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 해방병단이었다. 미 군정청은 이틀 뒤인 11월 13일 오늘날 국방부의 전신인 국방사령부를 설치했다.
미 군정청 국방사령부는 1946년 1월 15일 진해군항 내에 해방병단 총사령부를 설치했다. 총사령관에는 해방병단장인 손원일이 그대로 보임됐다. 손원일은 이어 참령(소령)에 임명됐고, 해군 장교 군번인 80001번의 군번을 받았다.
손원일은 해군을 발전시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1월 17일 진해 해방병단 총사령부에서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학교를 개교했다. 초대 교장도 직접 맡았다. 해군병학교는 이후 해안경비대사관학교-해안경비대학-해사대학-해군대학으로 바뀌었고, 1949년 1월 15일 오늘날의 해군사관학교가 됐다.
1946년 1월 7일, 손원일은 해방병단 조함창을 창설했다. 조함창은 함정을 만들고 수리하는 기관으로, 함정을 확보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확보해야 하는 부대였다. 해방병단은 1946년 6월 15일 국방경비대와 함께 각각 조선해안경비대와 조선경비대로 명칭이 바뀌었다.
조선해안경비대의 최초 군함은 1946년 9월 15일 미 군정청이 양도한 LCI(387톤급 상륙용 주정) 2척이었다. 이 2척 중 한 척이 10월 29일 서울정으로 명명됐고, 또 다른 한 척은 11월 11일 진주정으로 명명식을 열었다. 우리 기술진이 처음으로 만든 함정은 287톤급 충무공정이다. 1947년 2월 조함창이 7개월간에 걸친 조함 결과 독자적으로 건조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하자 조선해양경비대는 국군의 해군이 됐다. 이에 따라 손원일의 직책도 해군 총참모장(해군참모총장)으로 바뀌었다. 이때 육군의 병력은 5만 명이었고, 해군은 3000여 명의 병력을 보유(공군은 1949년 10월 1일에 창설)했다.
해군 총참모장에 취임한 손원일은 충무공 이순신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을 지표로 삼았다. 손원일은 1948년 10월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의 좌익계열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해군 함정을 급파했다. 이때 반란군 토벌작전에 참가한 공정식 정장(대위)으로부터 해병대 창설 건의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해병대가 창설됐다.
손원일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군이 철수하자 해군의 전력증강에 고심했다. 반면 북한은 소련의 원조를 받아 급속도로 군사력이 증강돼 위기의식을 느꼈다. 1949년 5월 당시 해군의 함정세력은 모두 36척이었다. 이들 함정은 미군과 일본 해군이 쓰던 소해정이나 상륙용 주정 또는 어선을 개조한 잡선이었다. 한마디로 3인치 이상의 함포가 장착된 전투함은 단 1척도 없었다.
이에 손원일은 함정건조 모금운동을 벌여 전 장병과 간부 부인들이 동참해 1만5000 달러를 모았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도 정부 보조금 4만5000 달러를 내주었고, 총 6만 달러의 돈으로 함정구매를 추진하게 됐다.
손원일은 1949년 10월 1일 전투함 구입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렇게 미국에서 처음으로 구입한 전투함이 450톤 규모의 PC(구잠함)였다. 1만8000 달러에 구입한 이 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잠수함과 싸운 전투함이었다. 해군 인수요원들은 오랫동안 방치됐던 이 배를 수리한 뒤 백두산함으로 이름을 붙였다.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701함이다.
백두산함은 1950년 3월 중순, 하와이에서 3인치 포를 설치했다. 이어 괌에서 포탄 100 발을 구입한 후 1950년 4월 10일 진해에 입항했다. 반면 손원일은 미국에 남아 백두산함과 같은 PC 세 척을 척당 1만2000 달러에 추가 구매했다. 이 세 척의 PC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9일 전인 1950년 6월 1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국을 향해 장도에 올랐다.
북한군을 무찌르고 조국을 구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전면 기습 남침을 개시했다. 3·8선 전역으로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운 북한군에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이때 손원일과 세 척의 PC는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해 있었고, 전쟁 발발 소식을 전보로 전해 들었다.
6·25 전사에 의하면 전쟁 초기 북한군의 기습도발에 최초로 승전보를 전한 국군은 해군이었다. 해군은 손원일 참모총장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즉각 대비태세를 통해 옥계해전을 비롯해 PC 701함(백두산함)이 적함을 침몰시킴으로써 풍전등화에 놓인 조국을 구했다.
옥계해전은 동해안 경비 임무를 맡고 있던 해군 YMS 509정이 6월 25일 북한군 766유격부대를 태운 적선을 격침한 해전이다. 또한 대한해협해전은 손원일 참모총장이 구매한 백두산함이 6월 25일 긴급 출동해 삼척으로 항진하다 부산 앞 공해상에서 북한군을 태운 수송선을 발견, 교전 끝에 격침한 해전이다. 대한해협해전은 전쟁 초기 남해안에 상륙을 꾀하던 북한군 특수부대 600여 명을 태운 수송선을 격멸함으로써 후방의 교란을 막았다는 점에서 전쟁의 흐름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손원일은 전쟁 발발 21일이 지난 7월 16일 진해항에 도착, 쉴 틈도 없이 곧바로 일선의 해군을 지휘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인천과 월미도 등에서 첩보를 수집하기 위해 실시된 X-ray 작전의 성공적 지휘가 대표적 사례다. 또한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될 때는 장병들과 함께 인천 해안에 상륙하는 용기를 보이며 앞장섰다. 전쟁 기간 중 미국으로부터 30여 척의 함정을 무상으로 인수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손원일은 지금도 대한민국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성공적으로 체결한 주역이다. 전쟁이 끝나기 한 달여 전인 1953년 6월 30일, 손원일은 44세의 젊은 나이에 국방부 장관에 취임했다. 그리고 첫 임무로 협의 중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손원일은 ‘해군의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국군현대화의 기반을 닦은 ‘국군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20개 사단으로 늘어난 육군을 효과적으로 재정비했고, 육해공군의 무기와 장비를 현대화했다. 1956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뒤에는 주서독 대사를 지냈고 1980년 서거했다.
대한민국 해군에서 이순신, 장보고와 함께 추앙받는 3대 제독 중 한 명으로 평가되는 손원일 제독은 해방 후 불모지인 조국 땅에서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하고 초석을 닦은 해군의 아버지이자 북한군으로부터 조국을 구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전쟁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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