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 인간

전쟁의 기억, 문학적 영감이자 상처의 근원이었다

입력 2021. 05. 12   15:57
업데이트 2021. 05. 1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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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세대’의 치열한 방황 -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삶과 문학


위험 즐기듯 뛰어든 모험과 열정의 삶
군인·특파원으로 세계 곳곳 전장 누벼
스페인 내전·노르망디 상륙작전도 참가
죽음과 폭력 응시한 작품 세계 구축
체험·관찰 바탕 대작으로 노벨문학상

말년의 헤밍웨이. 필자 제공
말년의 헤밍웨이. 필자 제공

제1차 세계대전에 휘말리기 전까지 미국은 거대한 농업 국가에 불과했다.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군수물자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던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생산력에 기대야 했다. 미국의 공장들은 엄청난 양의 물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전쟁 말기 200만에 이르는 미군이 연합군에 합류하자 물량의 격차를 감당하지 못한 독일은 곧 항복했다. 미군의 피해는 다른 연합국에 비해 훨씬 적었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국제적 지위는 급상승했고 호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경제적 호황에 편승하여 상류층을 중심으로 소비향락주의와 비도덕이 기승을 부렸고, 유럽 전선에서 돌아온 병사들은 환멸과 허무에 시달렸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 묘사되었듯이 전후 미국은 화려한 파티와 무질서, 허무와 혼란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1920년대는 미국 문학의 황금기였다. 물질적 풍요는 새로운 사회로 도약하는 토대가 되었고, 1920년대 후반 경제 대공황을 겪으면서 그동안 은폐되었던 많은 문제가 도출되었다. 인종, 성, 계급, 지역 등 수많은 갈등이 불거지면서 그것을 반영한 다양한 문학 작품들이 쏟아졌다.

이 시기 미국 작가들은 물질 만능주의와 실업, 금주령 등에 환멸을 느끼고 파리로 향했다. 그들은 파리에서 유럽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쾌락과 허무를 즐겼다. 미국 시인 거트루드 스타인은 그들을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라고 명명했고 이것은 1차 대전 이후 활동한 미국 작가들을 상징하는 명칭이 되었다. ‘잃어버린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는 바로 195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다. 1899년 일리노이주 오크 파크에서 태어난 헤밍웨이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사냥과 낚시, 권투를 즐기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은 헤밍웨이 세대의 청년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향한 모험심을 자극했다. 1917년, 헤밍웨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대에 자원했으나 시력 탓에 입대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적십자사의 앰뷸런스 부대에 지원하여 이탈리아의 격전지 ‘카포레토’로 떠났다.

헤밍웨이의 청년 시절 모습.  필자 제공
헤밍웨이의 청년 시절 모습. 필자 제공


1918년 7월, 그는 포탄 파편에 맞아 밀라노 병원에 입원하여 무려 237개의 파편을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헤밍웨이는 6개월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일곱 살 연상의 간호사 아그네스 쿠로브스키와 사랑에 빠졌지만, 1919년에 헤밍웨이가 귀국한 후 두 사람은 결별했다. 이 시절의 경험은 훗날 그의 대표작 『무기여 잘 있거라』(1929)의 모티브가 되었다.

『무기여 잘 있거라』(1929).
『무기여 잘 있거라』(1929).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


1921년, 헤밍웨이는 정신적 상처를 앓는 미국 청년들의 도피처가 된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카포레토 전투를 목격하고 부상을 입은 헤밍웨이에게도 전쟁의 기억은 문학적 영감이자 상처의 근원이었다. 그러나 슈테판 츠바이크를 비롯한 유럽의 작가들이 전쟁을 겪으면서 문명의 소멸을 예감하고 은둔에 빠졌던 것과는 달리 헤밍웨이는 ‘파괴되기 쉬운 생명’과 ‘불확실한 미래’를 모티브로 삼아 활발한 창작을 이어갔다. 공포에 맞서 용기를 내고, 패배를 두려워하면서 승리를 꿈꾸는 소설 속 인물들은 그의 간결한 문장으로 생기를 얻었다. 첫 장편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1926)에서는 스페인 여행 중 매료된 ‘투우’를 소재로 삼았고, 에세이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1935)에서는 ‘사냥’을 다루었다. 투우와 사냥은 모두 삶과 죽음이 빠르게 교차한다는 공통점을 지녔고, 그것은 죽음과 폭력의 문제를 응시하는 헤밍웨이의 소설과 더없이 어울리는 소재였다.

무엇보다도 헤밍웨이는 직접 경험한 것을 쓰고자 노력했다. “작가가 관찰을 멈추면 끝장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알고 있고 보아온 것들이 모인 커다란 저장고로 들어간다.” 그는 누구보다도 새로운 경험 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935년에는 ‘북아메리카신문연맹’의 특파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고, 그곳에서 저널리스트인 마사 겔혼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스페인 내전 경험과 마사와의 연애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에 그려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중국을 침략한 일본을 취재하러 가는 마사를 따라나섰고, 미국이 참전하자 자신 소유의 배 ‘팔라’호를 타고 독일 잠수함이 출몰하는 동부해안 순찰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콜리어’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참가하여 많은 기사를 썼다. 그리고 1945년 런던에서 ‘타임’지 기자 메리 웰시를 만나 사랑에 빠져 마사와 헤어지기에 이른다.

2차 대전이 끝나자 헤밍웨이는 쿠바로 건너가 아바나에 묵으면서 대작 『노인과 바다』(1952)를 완성했다. 1953년 메리와 아프리카로 사파리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두 번이나 비행기 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었다. 사고 소식이 언론에 알려지자 그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미국의 신문들은 앞다퉈 그의 부고 기사를 게재했다. 그러나 며칠 뒤 그는 구조되었고, 자신의 사망 기사를 읽으면서 유쾌하게 웃는 여유를 과시했다.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지만, 아프리카에서 입은 부상으로 시상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각종 질병에 시달리던 헤밍웨이는 쿠바로 이주하여 휴식을 취하면서 회복을 도모했다. 그렇지만 그는 말년의 휴식조차 순조롭지 못했다. 1956년 피델 카스트로에 의해 쿠바가 공산화된 것이다. 쿠바 정부가 사유재산 국유화를 선언하자 헤밍웨이는 쿠바를 떠나야 했다.

쿠바를 떠난 후 헤밍웨이는 심각한 악몽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1961년, 그는 엽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헤밍웨이는 삶이 지나치게 문학적인 작가의 문학은 가난하다는 진실을 간단하게 무력화시킨다. 그는 마치 위험한 상황을 즐기듯이 세계의 모든 분쟁지역으로 뛰어들었다. 4차례 결혼했고 3번 이혼했다. 게다가 사냥, 권투, 투우, 낚시 등 온갖 취미 활동을 평생 지속했다. 그는 열정으로 자신을 치유했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그는 위험을 향해 스스로 뛰어들면서 삶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인간은 어디까지 강인해질 수 있는가. 그의 삶과 작품은, 인생에 장식이나 포장 따위는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삶에 지칠 때면 그의 삶과 열정을 떠올리곤 한다.
<이정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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