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 인간

‘문명화’란 이름으로 미화된 ‘아프리카 수난시대’

입력 2021. 04. 21   16:58
업데이트 2021. 04. 2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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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로 포장된 폭력 -리빙스턴의 선의를 악용한 유럽의 식민지 수탈
 
英 탐험가 리빙스턴 선교활동 경로가 아프리카 내륙 침공 길잡이로
문명 전파 미명 아래 원주민 착취·학살…‘인류 사상 최대 범죄’ 오명
조지프 콘래드 소설과 코폴라 감독 변주한 영화 야만성 고발
 
1869년 ‘뉴욕헤럴드’ 신문사는 아프리카 탐험에 나섰다가 실종된 영국의 의사이자 저명한 탐험가인 데이비드 리빙스턴(1813~1873)을 찾아 나서는 탐험 르포를 기획했다. 당시 아프리카의 해안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사막과 밀림에 가로막힌 탓에 아프리카 내륙 지역은 오지로 남아 있었다. 칼라하리 사막을 건너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간 리빙스턴 박사는 몇 년째 소식이 끊겼고 사람들은 리빙스턴이 이미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1871년 3월, ‘뉴욕헤럴드’ 특파원 헨리 모턴 스탠리(1841~1904)가 이끄는 구조대는 리빙스턴의 탐험 루트를 따라 아프리카 내륙으로 진입했다. 그들 역시 리빙스턴이 살아있다고 확신하지 않았다. 스탠리의 탐험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일종의 ‘기획 특종’이었다. 하지만 8개월 후 기적이 일어났다. 스탠리 탐험대가 탕가니카 호반 근처에서 죽어가는 리빙스턴을 발견한 것이다. 신문사는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을 대서특필했다. 죽어가던 리빙스턴은 스탠리가 가져온 의약품으로 목숨을 건졌다. 리빙스턴은 함께 돌아가자는 스탠리의 권유를 거부하며 탐험과 선교활동을 지속했고 2년 후 아프리카 오지에서 사망했다.

탐험가이자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 
 필자 제공
탐험가이자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 필자 제공

리빙스턴의 탐험과 선교 활동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스탠리와 그의 만남은 낭만적으로 채색됐다. 만약 리빙스턴이 더 오래 살아서 그 이후의 현실을 보았다면 아마도 오열했을 것이다. 리빙스턴의 생존을 확인한 스탠리는 유럽 사회에서 유명 인사가 됐고, 그의 모험담은 부풀려졌다.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탐험 기록은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를 침공하는 유용한 길잡이가 됐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1835~1909)는 스탠리를 대리인으로 고용해 중앙아프리카에 벨기에 국토의 76배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선점했다. 유럽 국가들은 다이아몬드·고무·주석·보크사이트 등 엄청난 자원이 매장된 중부 아프리카에 앞다퉈 진출했고, 갈등이 증폭됐다. 1884년 이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서 프로이센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 주재로 ‘베를린 회의’가 개최됐다. 이 회의 이후 아프리카의 식민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오늘날 세계 지도를 보면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경선은 대개 직선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실제로 ‘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 지도 위에 자신들의 영역을 자로 그으면서 나타난 결과다.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흉상에 빨간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벨기에에서는 1885~1908년 중부 아프리카 민주콩고를 식민 지배하면서 원주민을 가혹하게 착취한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을 없애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흉상에 빨간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벨기에에서는 1885~1908년 중부 아프리카 민주콩고를 식민 지배하면서 원주민을 가혹하게 착취한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을 없애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레오폴드왕의 유령』(이종인 옮김, 무우수,  2003).  필자 제공
『레오폴드왕의 유령』(이종인 옮김, 무우수, 2003). 필자 제공

레오폴드 2세는 콩고 지역의 원주민들을 온갖 방법으로 착취하고 학살했다. 원주민들은 상아와 고무 채취에 동원됐고, 할당한 양을 채우지 못한 자들은 손발을 절단하는 형벌을 받았다. 레오폴드 2세 재위 시기에 콩고 지역 인구는 무려 1000만 명 넘게 감소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 피해자의 2배에 이르는 수치였다. 영국 작가 코넌 도일(1859~1930)은 이것을 “인류 역사상 최대의 범죄”라고 규탄했다. 그렇지만 이 끔찍한 학살은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은폐되고 미화됐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벨기에 초콜릿 회사들은 이 시기 카카오를 착취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국제 아프리카 협회’의 초대의장으로 선출된 레오폴드 2세는 자신이 미개한 아프리카에 유럽의 선진화된 문명을 전파하는 대의를 위해서 봉사한다고 선전했다. 대다수 유럽인들은 레오폴드 2세의 감언이설에 동조했다. 폴란드계 영국 작가 조지프 콘래드(1857~1924)도 그들 중 하나였다.

영국 작가 조지프 콘래드. 필자 제공
영국 작가 조지프 콘래드. 필자 제공

조지프 콘래드 『암흑의 핵심』.  필자 제공
조지프 콘래드 『암흑의 핵심』. 필자 제공

리빙스턴을 동경하던 청년 콘래드는 1890년, 콩고 지역을 여행하면서 ‘유럽의 문명’이 ‘미개한 아프리카’에 전파되는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자 했다. 하지만 20대인 청년 콘래드가 마주한 것은 끔찍한 풍경이었다. 그곳에서 유럽인들은 선진 문명을 전파한다는 명목으로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상아를 비롯한 각종 자원을 착취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하찮은 벌레처럼 취급됐다. 문명을 전파한다는 명목 아래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누구보다도 야만적인 짓을 하고 있었다.

콘래드는 콩고를 여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1899)을 발표했다. 벨기에 식민회사의 선장인 주인공 ‘말로’는, 회사의 유능한 주재원 ‘커츠’라는 인물을 데려오라는 지시를 받고 콩고로 향한다. ‘커츠’는 많은 사람에게 칭송받는 전설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말로가 콩고에서 실제로 확인한 커츠는 ‘야만’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나무 말뚝 위에 사람의 머리를 잘라서 얹어 놓는 광기 어린 행동을 했고, 문명을 전파한다는 명분 아래 온갖 폭력을 저지르고 있었다.

커츠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야만을 자각하지 못한다. 커츠라는 인물은 현실의 ‘스탠리’와 ‘레오폴드 2세’를 연상케 한다. 19세기 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과 학살, 자원 착취를 자행하면서 아프리카에 선진문물을 전달한다고 믿었고, 자신들이 누구보다도 야만적이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훗날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은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의 배경을 베트남으로 변주해 반전영화 『지옥의 묵시록』(1978)을 만들었다.

2020년 여름, 벨기에 국왕은 과거 콩고에서 저지른 자국의 범죄 행위를 사과했다. 미국에서 벌어진 인종차별을 목도한 벨기에 국민은 레오폴드 2세의 동상 철거와 함께 과거 벨기에의 중대한 범죄 행위를 역사 교과서에 제대로 기록할 것을 요구했다. 벨기에 교육부 장관은 2021년부터 중학교에서 식민 역사를 가르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풍경을 보면서 씁쓸함을 느낀다. 아직도 일본은 식민 지배로 한반도에 근대 문물이 전파됐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우리 사회 일부 지식인들은 일본의 논리에 여전히 동조한다. 이것은 문명화라는 명분으로 자행된 폭력에 둔감한 결과다. 그들에게 콘래드의 소설과 코폴라의 영화를 권하고 싶다.

<이정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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