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이시우 조명탄] 누구나 오늘을 삽니다

입력 2021. 04. 14   16:25
업데이트 2021. 04. 14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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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 우 전통예술엔터사 JCENM 대표
이 시 우 전통예술엔터사 JCENM 대표


오랜만에 시간을 내 아내와 강원도로 드라이브를 떠났다. 그런데 첫 번째 터널에 진입하자 기분이 이상해진다. 경사진 터널이 괜히 신경 쓰인다. ‘경사가 있네. 원래 그랬었나?’ 다시 바라봐도 여전히 경사가 있는 터널이다.

“여보! 지금 터널이 경사진 게 맞아?” 선잠에 빠져 있던 아내가 실눈을 뜬다. “원래 터널은 조금씩 경사가 있잖아.”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이 불안감은 아마도 얼마 전에 만난, 공황장애에 시달렸던 뮤지컬 배우 형님의 영향 같기도 하다.

1990년대 초.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와 완벽한 가창력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형님은 갑자기 뮤지컬 무대를 떠났다. 이제 막 뮤지컬계에 들어온 나에게 우상과도 같았던 형님이 무대를 떠난 이유는 ‘정신병’이었다. 그렇게 완벽하고 멋있는 형님이 정신병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그 후 형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경기도 외곽에 카페를 개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당시 친하게 지내던 선후배들과 함께 형님을 찾았다. “지금은 공황장애가 많이 알려졌지만 나 때만 해도 이게 무슨 병인지조차 몰랐어.”

은발을 멋스럽게 넘긴 얼굴로 커피를 내리는 형님을 보니 마음이 쓸쓸해졌다.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드라이브가 갑자기 무서워지고, 지하터널을 통과하려 하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극심한 공포가 밀려오고, 건물이 갑자기 기울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뛰쳐나오고, 뭉게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이 갑자기 내 위로 무너질 것 같고,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꼭 뭔가 일어날 것 같아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그런 일들이 일상다반사가 되니 도저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가장 힘든 건 무대 위에 섰을 때였어. 그토록 사랑하던 무대가 너무 무서웠어. 가사가 갑자기 기억나지 않으면 어쩌지? 다음에 해야 할 연기가 기억나지 않아서 작품을 완전히 망치면? 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바닥에 막 뒹굴면 어쩌지? 이런 생각이 가득해서 더 이상 무대에 오를 수가 없었어.”

공감을 위해 건넬 이야기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좀 어때요?” 향이 진한 드립커피를 내 앞으로 내밀며 형님이 말한다.

“글쎄….” 형님은 대답 대신 두 번째 커피에 물을 붓는다. 형님의 가장 큰 고민은 불안감이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 내일이나 일주일 후의 고민을 굳이 오늘로 끌고 와서 불안해하고, 심할 때는 먼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밤잠을 못 이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가혹할 정도로 완벽함을 요구했고, 결국 완벽하지 못한 자신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그냥 그날 하루하루를 잘 살면 되는데… 나는 그게 참 안 되더라고.” 형님이 두 번째 커피를 내밀면서 말한다.

“핸드 드립 커피는 내릴 때마다 맛이 다 달라. 완벽하게 똑같은 맛을 낼 수가 없더라고. 그냥 그걸 인정하면 되는데… 그 쉬운 걸 나는 참 오랫동안 하지 못했어.”

맞다. 우리는 항상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의 마음은 ‘미래’에 먼저 가버린 경우가 많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마음을 빼앗기고 불안함에 붙잡혀 오늘을 실패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오늘을 정성스럽게 차곡차곡 쌓다 보면 기분 좋은 미래가 오늘이 되어 있지 않을까? 누구나 오늘을 살고 결국 미래는 오고야 마니까. 그나저나 내릴 때마다 맛이 다른 핸드 드립 커피라… 이 형님… 커피 내리는 것 자체가 문제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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