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과정에서 두 발로 걸으면서 손은 몸무게를 지탱하는 역할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 덕분에 훨씬 더 섬세한 일을 할 수 있게 되면서 그것이 뇌를 자극했고, 그 결과 오늘날의 인간이 됐다던가. 그런데 두 발로 걷는 것이 기계적인 관점에서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로봇의 발달 과정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로봇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만 실제 두 발로 잘 걷고 잘 달리는 직립보행 로봇은 요즘에야 등장하고 있다.
진화의 관점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도 걷기의 의미는 크다. 걷기는 이동이면서 운동이고 동시에 사색이다. 신기하게도 생각은 떠오르게 하고 감정은 다스려 준다. 그러니 뭔가 출구가 필요한 답답한 상황에서 걷기란 최고의 처방일 것이다. 저 멀리는 산책을 통해 사유하고자 했던 그리스의 소요학파가 있었다. 이후 괴테, 베토벤, 칸트 등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전원의 숲을 산책하면서 영감을 얻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았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시작되면서 걷기는 또 다른 차원으로 변화하는데, ‘도시 산책’이 그것이다. 독일의 철학자이며 평론가인 발터 벤야민은 그의 저서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이동이나 운동이 아닌, 걷기 그 자체를 목적으로 도시를 걷는 것의 현대적 의미를 이야기했다. 그는 현대 도시를 체험하고 그 현실의 일부가 되는 행위로서 걷는 사람을 ‘산보객(flaneur)’으로 불렀고 이후 매우 유명한 단어가 됐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또한 이런저런 이유로, 혹은 별다른 이유 없이 당시의 경성 시내를 걷다가, 전차를 탔다가, 다시 걷다가 하며 돌아다닌다. 그가 소설 속에서 보여준 불연속적이고 혼란스러운 내면의 세계를 우리는 ‘의식의 흐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현대인은 자동차나 기차, 비행기만 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이며 의도적인 걷기를 실천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한국 사회는 조금씩 이러한 걷기의 의미를 이해해 가고 있는 듯하다. ‘걷고 싶은 거리’는 이제 도시 디자인의 핵심 개념이다. 산과 들, 강과 호수 주변에는 이런저런 이름으로 불리는 수많은 산책로가 조성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산책로 중 상당수가 역사도 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의 한양도성이 그렇고 수원의 화성 또한 그러하다. 한반도의 역사가 워낙 길다 보니 어느 한두 곳이 아닌, 그야말로 전국적인 현상이다.
이런 곳을 걷다 보면 한참 자연 속에 있는가 싶다가 어느덧 시내의 한복판으로 나오기도 하는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도대체 어떤 복장을 갖출 것인가라는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된다. 등산복 차림이면 시내에서 어색하고, 평상복 차림이면 산속에서 불편하다. 여기저기에 잘 알려진 맛집, 가볍게 쉬어 갈 수 있는 곳들도 많다. 좀 걷다가 옆으로 빠져도 그만,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다.
이왕 걷게 된 장소의 역사를 찾아보면, ‘아하, 여기가 이런 곳이었나’라는 즐거운 발견을 할 수 있기도 하다. 임진강처럼, 유장하게 흘러가는 아름다운 강 주변이 역사상 중요한 격전지임을 깨닫게 될 수도 있다. 역사가 오래되고, 자연이 아름다우며, 도시 문명이 빠르게 발전해 온 한반도야말로 걷기의 즐거움을 매우 잘 느낄 수 있는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진화 과정에서 두 발로 걸으면서 손은 몸무게를 지탱하는 역할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 덕분에 훨씬 더 섬세한 일을 할 수 있게 되면서 그것이 뇌를 자극했고, 그 결과 오늘날의 인간이 됐다던가. 그런데 두 발로 걷는 것이 기계적인 관점에서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로봇의 발달 과정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로봇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만 실제 두 발로 잘 걷고 잘 달리는 직립보행 로봇은 요즘에야 등장하고 있다.
진화의 관점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도 걷기의 의미는 크다. 걷기는 이동이면서 운동이고 동시에 사색이다. 신기하게도 생각은 떠오르게 하고 감정은 다스려 준다. 그러니 뭔가 출구가 필요한 답답한 상황에서 걷기란 최고의 처방일 것이다. 저 멀리는 산책을 통해 사유하고자 했던 그리스의 소요학파가 있었다. 이후 괴테, 베토벤, 칸트 등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전원의 숲을 산책하면서 영감을 얻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았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시작되면서 걷기는 또 다른 차원으로 변화하는데, ‘도시 산책’이 그것이다. 독일의 철학자이며 평론가인 발터 벤야민은 그의 저서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이동이나 운동이 아닌, 걷기 그 자체를 목적으로 도시를 걷는 것의 현대적 의미를 이야기했다. 그는 현대 도시를 체험하고 그 현실의 일부가 되는 행위로서 걷는 사람을 ‘산보객(flaneur)’으로 불렀고 이후 매우 유명한 단어가 됐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또한 이런저런 이유로, 혹은 별다른 이유 없이 당시의 경성 시내를 걷다가, 전차를 탔다가, 다시 걷다가 하며 돌아다닌다. 그가 소설 속에서 보여준 불연속적이고 혼란스러운 내면의 세계를 우리는 ‘의식의 흐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현대인은 자동차나 기차, 비행기만 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이며 의도적인 걷기를 실천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한국 사회는 조금씩 이러한 걷기의 의미를 이해해 가고 있는 듯하다. ‘걷고 싶은 거리’는 이제 도시 디자인의 핵심 개념이다. 산과 들, 강과 호수 주변에는 이런저런 이름으로 불리는 수많은 산책로가 조성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산책로 중 상당수가 역사도 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의 한양도성이 그렇고 수원의 화성 또한 그러하다. 한반도의 역사가 워낙 길다 보니 어느 한두 곳이 아닌, 그야말로 전국적인 현상이다.
이런 곳을 걷다 보면 한참 자연 속에 있는가 싶다가 어느덧 시내의 한복판으로 나오기도 하는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도대체 어떤 복장을 갖출 것인가라는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된다. 등산복 차림이면 시내에서 어색하고, 평상복 차림이면 산속에서 불편하다. 여기저기에 잘 알려진 맛집, 가볍게 쉬어 갈 수 있는 곳들도 많다. 좀 걷다가 옆으로 빠져도 그만,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다.
이왕 걷게 된 장소의 역사를 찾아보면, ‘아하, 여기가 이런 곳이었나’라는 즐거운 발견을 할 수 있기도 하다. 임진강처럼, 유장하게 흘러가는 아름다운 강 주변이 역사상 중요한 격전지임을 깨닫게 될 수도 있다. 역사가 오래되고, 자연이 아름다우며, 도시 문명이 빠르게 발전해 온 한반도야말로 걷기의 즐거움을 매우 잘 느낄 수 있는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