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내전 끝에 평화협정 체결…유엔 재건 돕기 위해 회원국 파병 요청
임무 방향 조정 결정…국회 동의 얻어 ‘앙골라 PKO 파견부대’ 창설
1년 3개월간 3진에 걸쳐 임무 완수…1997년 1월 25일 부대 해단식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앙골라 공병부대 장병들이 1995년 10월 4일 출국 전 환송 행사를 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1995년 2월 유엔은 평화협정이 진행 중인 앙골라에서 지뢰 제거 임무를 수행할 전투공병 파병을 우리 정부에 요청했다. 당시 앙골라는 유엔의 주도로 약 20년에 가까운 내전을 끝내는 기틀을 마련할 때였다. 각국은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동참을 선언하며 지역의 평화 정착을 희망했다. 우리 정부는 소말리아 상록수부대와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의 유엔 PKO를 통해 국제평화협력에 기여하는 과정에서 앙골라 파병을 마주했으며, 적극적으로 이를 추진했다.
앙골라 내전과 유엔 개입
아프리카 서남부 대서양에 인접한 앙골라가 국제사회로부터 본격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앙골라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고, MPLA(인민해방운동당), FLNA(앙골라인민해방전선), UNITA(앙골라완전독립연합) 등 무장투쟁단체가 식민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협력과 경쟁을 펼쳤다. 1975년 1월 이들 세 단체는 포르투갈과 협정을 맺고 과도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단계적 절차를 거쳐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단체들은 군사적 우위와 권력 독점을 추구하면서 충돌을 빚었고, 이는 같은 해 7월 과도정부 해산과 내전으로 이어졌다.
내전은 미국·소련의 냉전체제 이념 대결 양상으로 확대됐다. 쿠바가 전투병력을 보내 MPLA를 지원하는 가운데 미국과 주변국은 이에 맞서 UNITA를 지원했다. 내전은 더욱 격화되다가 미국의 지원이 중지되면서 1979년 9월 MPLA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1988년 12월에는 유엔과 국제사회가 쿠바군의 철수를 종용해 결국 철수에 합의했고, 이에 유엔은 1차 진상조사단을 파견해 쿠바군의 철수 상황을 확인했다.
이후 1991년 4월 MPLA 지도자 산토스가 국제사회의 탈냉전 흐름에 따라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다당제 도입 등의 변화를 추진했다. 당시 국토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던 UNITA도 평화협상에 응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로 하고, 유엔은 2차 진상조사단을 현지에 보냈다.
그러나 1992년 평화협정에 따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MPLA 지도자 산토스가 당선되자 UNITA는 결과에 불복하고 무장투쟁을 재개했다. 유엔은 UNITA에 대한 제재를 결의한 후 중재에 나섰다. 1994년 11월 양측은 정부 주요 직위를 나눈다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해 내전 종결의 계기를 만들었다. 유엔은 평화협정을 감시하는 동시에 앙골라의 재건을 돕고자 1995년 2월 3차 진상조사단을 보냈다. 또 한국과 주요 회원국에 병력의 파병을 요청했다.
유엔의 파병 요청과 준비
1995년 당시 앙골라는 긴 내전으로 인해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상태였다. 도로와 건물은 파괴됐고 교전 지역에는 1500만여 개의 매설 지뢰가 여전히 방치돼 주민들의 피해가 계속됐다. 유엔은 그해 2월 앙골라 내전의 당사자인 MPLA와 UNITA 사이 평화협정 체결과 함께 각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우리나라에도 지뢰 제거 임무를 수행할 전투공병의 파병 요청 공한을 보냈다.
우리나라는 소말리아 상록수부대와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을 통해 유엔 PKO 활동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앞두고 국제사회에서의 역할 증대가 필요한 때였다. 파병에는 긍정적이었으나 지뢰제거 임무 수행에는 여러 제한 요소가 존재했다. 이에 파괴된 교량을 보수·건설하는 것으로 임무 방향을 조정·결정했고 1995년 7월 국회 동의를 얻었다. 이어 8월 1113야전공병단을 모체로 198명을 편성해 ‘앙골라 PKO 파견부대’ 창설식을 가졌다. 부대 고유명칭은 101야전공병대대였으며, 통상명칭은 육군6767부대였다.
부대는 대대급으로 대대본부, 본부중대, 공병중대로 구분됐다. 대대본부에는 운영과와 지원과를 두고 정보·작전·인사·공보·보급·연락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본부중대는 통신반, 의무반, 정비반, 경비소대로 나눴고, 공병중대는 3개의 공병소대와 차량·정비소대가 편성됐다. 또 공병 장비는 진동롤러, M2장간조립교, 페이로더, 5톤 덤프, 도저, 굴삭기, 5톤 구난차, 60톤 크레인, 그레이더, 지게차, 심정굴삭기 등을 준비했다.
8월 7일 부대가 창설되자 부대원들에 대한 교육·훈련이 이어졌다. 교육·훈련은 주(부)특기훈련, 자위력보강훈련, PKO 관련 업무 교육에 중점을 뒀다. 총 8주 280시간에 걸쳐 진행했으며, 9월 23일 마무리했다. 그사이 8월 말께에는 부대원들의 현지 도착 일정에 맞춰 컨테이너 40개분량의 장비·물자를 수송선에 선적해 현지로 먼저 떠나보냈다. 부대원들은 9월 26일 선발대에 이어 10월 4일 본대가 출국해 10월 5일 앙골라 수도 루안다에 도착했다.
우리 공병부대의 활약
부대는 앙골라 동남부 고지대에 있는 우암보 지역에 주둔지를 구성했다. 10월 말까지 약 한 달간 주둔지를 건설하고 11월부터는 재건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주임무는 앙골라 수도 루안다에서 제2의 도시 우암보를 거쳐 남부 루빙고로 연결되는 도로 상에 파괴된 교량을 복구·신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량 다수가 산악지대에 있거나 지뢰가 매설된 지역에 위치해 작업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대는 1996년 12월까지 약 1년 3개월간 총 3진에 걸쳐 주어진 임무를 모두 완수해냈다. 1진과 2진은 각 4개씩 총 8개의 교량을 건설해 개통시켰으며, 3진은 부가임무를 주로 맡아 비행장 복구, 도로보수·건설, 시설 부지 정리, 장비·기술 지원 임무 등을 수행했다.
아울러 부대는 대민 지원 업무도 병행했다. 의료·방역 지원, 심정개발, 마을회관 보수, 사랑의 학교 운영, 영농교육, 장비 지원 등은 현지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며 자립에 힘을 보탰다. 현지 TV·라디오 매체에서도 우리 군의 활약을 계속 소개하며 부대원들의 헌신에 감사를 표했다. 부대는 또 한국의 날 행사를 열어 우암보 일대에서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우루과이 보병대대, 포르투갈 보급대대, 브라질 의무부대 등 유엔 파병부대 장병들과 교류를 이어가기도 했다.
부대 철수는 1996년 12월이었다. 앞서 같은 해 10월 유엔은 앙골라에서의 유엔 임무 규모를 축소하기로 하고, 우리나라를 포함해 우크라이나, 브라질, 루마니아 등의 파병 병력 감축을 결정했다. 유엔의 감축 결의에 따라 우리 군도 부대 철수를 신속히 진행했다. 연내 철수를 목표로 계획과 실행이 이어졌고, 컨테이너 8동과 6개 품목 4500만 원 상당의 물자 등은 우암보 주 정부에 기증했다. 철수 준비를 끝낸 3진 장병들은 12월 22일 앙골라를 떠나 이튿날 귀국했다. 이후 신체검사, 물자 정리, 위로 휴가 등 귀국 후 정리 기간을 거친 뒤 1997년 1월 25일 부대 해단식과 함께 임무를 종료했다. 서현우 기자
오랜 내전 끝에 평화협정 체결…유엔 재건 돕기 위해 회원국 파병 요청
임무 방향 조정 결정…국회 동의 얻어 ‘앙골라 PKO 파견부대’ 창설
1년 3개월간 3진에 걸쳐 임무 완수…1997년 1월 25일 부대 해단식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앙골라 공병부대 장병들이 1995년 10월 4일 출국 전 환송 행사를 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1995년 2월 유엔은 평화협정이 진행 중인 앙골라에서 지뢰 제거 임무를 수행할 전투공병 파병을 우리 정부에 요청했다. 당시 앙골라는 유엔의 주도로 약 20년에 가까운 내전을 끝내는 기틀을 마련할 때였다. 각국은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동참을 선언하며 지역의 평화 정착을 희망했다. 우리 정부는 소말리아 상록수부대와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의 유엔 PKO를 통해 국제평화협력에 기여하는 과정에서 앙골라 파병을 마주했으며, 적극적으로 이를 추진했다.
앙골라 내전과 유엔 개입
아프리카 서남부 대서양에 인접한 앙골라가 국제사회로부터 본격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앙골라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고, MPLA(인민해방운동당), FLNA(앙골라인민해방전선), UNITA(앙골라완전독립연합) 등 무장투쟁단체가 식민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협력과 경쟁을 펼쳤다. 1975년 1월 이들 세 단체는 포르투갈과 협정을 맺고 과도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단계적 절차를 거쳐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단체들은 군사적 우위와 권력 독점을 추구하면서 충돌을 빚었고, 이는 같은 해 7월 과도정부 해산과 내전으로 이어졌다.
내전은 미국·소련의 냉전체제 이념 대결 양상으로 확대됐다. 쿠바가 전투병력을 보내 MPLA를 지원하는 가운데 미국과 주변국은 이에 맞서 UNITA를 지원했다. 내전은 더욱 격화되다가 미국의 지원이 중지되면서 1979년 9월 MPLA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1988년 12월에는 유엔과 국제사회가 쿠바군의 철수를 종용해 결국 철수에 합의했고, 이에 유엔은 1차 진상조사단을 파견해 쿠바군의 철수 상황을 확인했다.
이후 1991년 4월 MPLA 지도자 산토스가 국제사회의 탈냉전 흐름에 따라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다당제 도입 등의 변화를 추진했다. 당시 국토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던 UNITA도 평화협상에 응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로 하고, 유엔은 2차 진상조사단을 현지에 보냈다.
그러나 1992년 평화협정에 따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MPLA 지도자 산토스가 당선되자 UNITA는 결과에 불복하고 무장투쟁을 재개했다. 유엔은 UNITA에 대한 제재를 결의한 후 중재에 나섰다. 1994년 11월 양측은 정부 주요 직위를 나눈다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해 내전 종결의 계기를 만들었다. 유엔은 평화협정을 감시하는 동시에 앙골라의 재건을 돕고자 1995년 2월 3차 진상조사단을 보냈다. 또 한국과 주요 회원국에 병력의 파병을 요청했다.
유엔의 파병 요청과 준비
1995년 당시 앙골라는 긴 내전으로 인해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상태였다. 도로와 건물은 파괴됐고 교전 지역에는 1500만여 개의 매설 지뢰가 여전히 방치돼 주민들의 피해가 계속됐다. 유엔은 그해 2월 앙골라 내전의 당사자인 MPLA와 UNITA 사이 평화협정 체결과 함께 각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우리나라에도 지뢰 제거 임무를 수행할 전투공병의 파병 요청 공한을 보냈다.
우리나라는 소말리아 상록수부대와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을 통해 유엔 PKO 활동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앞두고 국제사회에서의 역할 증대가 필요한 때였다. 파병에는 긍정적이었으나 지뢰제거 임무 수행에는 여러 제한 요소가 존재했다. 이에 파괴된 교량을 보수·건설하는 것으로 임무 방향을 조정·결정했고 1995년 7월 국회 동의를 얻었다. 이어 8월 1113야전공병단을 모체로 198명을 편성해 ‘앙골라 PKO 파견부대’ 창설식을 가졌다. 부대 고유명칭은 101야전공병대대였으며, 통상명칭은 육군6767부대였다.
부대는 대대급으로 대대본부, 본부중대, 공병중대로 구분됐다. 대대본부에는 운영과와 지원과를 두고 정보·작전·인사·공보·보급·연락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본부중대는 통신반, 의무반, 정비반, 경비소대로 나눴고, 공병중대는 3개의 공병소대와 차량·정비소대가 편성됐다. 또 공병 장비는 진동롤러, M2장간조립교, 페이로더, 5톤 덤프, 도저, 굴삭기, 5톤 구난차, 60톤 크레인, 그레이더, 지게차, 심정굴삭기 등을 준비했다.
8월 7일 부대가 창설되자 부대원들에 대한 교육·훈련이 이어졌다. 교육·훈련은 주(부)특기훈련, 자위력보강훈련, PKO 관련 업무 교육에 중점을 뒀다. 총 8주 280시간에 걸쳐 진행했으며, 9월 23일 마무리했다. 그사이 8월 말께에는 부대원들의 현지 도착 일정에 맞춰 컨테이너 40개분량의 장비·물자를 수송선에 선적해 현지로 먼저 떠나보냈다. 부대원들은 9월 26일 선발대에 이어 10월 4일 본대가 출국해 10월 5일 앙골라 수도 루안다에 도착했다.
우리 공병부대의 활약
부대는 앙골라 동남부 고지대에 있는 우암보 지역에 주둔지를 구성했다. 10월 말까지 약 한 달간 주둔지를 건설하고 11월부터는 재건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주임무는 앙골라 수도 루안다에서 제2의 도시 우암보를 거쳐 남부 루빙고로 연결되는 도로 상에 파괴된 교량을 복구·신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량 다수가 산악지대에 있거나 지뢰가 매설된 지역에 위치해 작업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대는 1996년 12월까지 약 1년 3개월간 총 3진에 걸쳐 주어진 임무를 모두 완수해냈다. 1진과 2진은 각 4개씩 총 8개의 교량을 건설해 개통시켰으며, 3진은 부가임무를 주로 맡아 비행장 복구, 도로보수·건설, 시설 부지 정리, 장비·기술 지원 임무 등을 수행했다.
아울러 부대는 대민 지원 업무도 병행했다. 의료·방역 지원, 심정개발, 마을회관 보수, 사랑의 학교 운영, 영농교육, 장비 지원 등은 현지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며 자립에 힘을 보탰다. 현지 TV·라디오 매체에서도 우리 군의 활약을 계속 소개하며 부대원들의 헌신에 감사를 표했다. 부대는 또 한국의 날 행사를 열어 우암보 일대에서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우루과이 보병대대, 포르투갈 보급대대, 브라질 의무부대 등 유엔 파병부대 장병들과 교류를 이어가기도 했다.
부대 철수는 1996년 12월이었다. 앞서 같은 해 10월 유엔은 앙골라에서의 유엔 임무 규모를 축소하기로 하고, 우리나라를 포함해 우크라이나, 브라질, 루마니아 등의 파병 병력 감축을 결정했다. 유엔의 감축 결의에 따라 우리 군도 부대 철수를 신속히 진행했다. 연내 철수를 목표로 계획과 실행이 이어졌고, 컨테이너 8동과 6개 품목 4500만 원 상당의 물자 등은 우암보 주 정부에 기증했다. 철수 준비를 끝낸 3진 장병들은 12월 22일 앙골라를 떠나 이튿날 귀국했다. 이후 신체검사, 물자 정리, 위로 휴가 등 귀국 후 정리 기간을 거친 뒤 1997년 1월 25일 부대 해단식과 함께 임무를 종료했다. 서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