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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총독 암살하려 한 여성독립군 남자현
‘근대 한국의 여걸’ ‘혁명의 어머니’라 불리는 여성독립군이 있다. 이름은 남자현(南慈賢). 1873년 12월 7일, 명문 유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남편 김영주(金永周)가 의병전쟁에서 전사하고, 친정아버지 남정한(南珽漢)은 정미의병을 창의하여 의병전쟁을 펼쳤다. 남자현은 남편과 친정아버지의 의병전쟁을 헌신적으로 지원했다.
남자현은 의병전쟁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병합되자 1915년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의 독립군이자 교육활동가로 활약했다. 1922년 참의부 중대장 백광운의 지령으로 군자금을 모집하고, 이후 통의부 독립군으로 활발하게 독립전쟁을 펼쳤다. 남자현은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뿐만 아니라 1927년 일본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고자 했다. 은밀하게 국내에 들어왔지만, 함께 잠입했던 동지가 체포되어 무기를 압수당해 암살계획을 접고 만주로 돌아가기도 했다.
만주에서 남자현은 지속적으로 독립운동가를 후원하고 구명 활동을 펼쳤다. 1927년 안창호를 비롯한 독립운동계 지도자 300여 명이 중국 관헌에게 체포된 길림대검거사건이 발생하자 남자현은 구명 활동을 펼쳤다. 체포된 사람 가운데 47명이 길림감옥에 갇히자 남자현은 이들을 옥바라지하고, 이 사건을 여러 독립군과 한인촌에 알리는 한편 비상대책반을 조직하여 구명하고자 했다. 남자현의 활동으로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가 함께 구명 활동을 한 점에서 남자현의 역할을 알 수 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독립군의 만주에서의 활동 여건이 악화되었다. 일본군의 만주침략을 비난하는 국제여론으로 국제연맹 조사대표단이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한 남자현은 대표단에 혈서를 전달하여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호소하고자 했다. 엄중한 경호로 혈서 전달이 실패하자 남자현은 만주에 파견된 일본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를 하얼빈에서 제거하고자 했다. 거사를 앞두고 남자현은 최후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1933년 2월 27일, 하얼빈에서 노파로 변장한 남자현은 거사 장소로 이동 중 미행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다. 가혹한 고문을 받던 61세의 남자현은 단식투쟁을 시작하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1933년 8월 22일 순국하였다.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 의병전쟁을 지원하고, 3·1운동에 참여해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며 일본 총독과 전권대사를 처단하고자 하였던 여성독립군 남자현은 마지막 순간 “독립은 정신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여성광복군, 독립전쟁에 남녀구분이 없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은 2000만 한국인의 정부가 임시정부이듯이 광복군도 당연히 2000만 한국인 남녀노소가 참여하는 군대임을 강조했다. “모든 한국 혁명 남녀는 누구를 물론하고 그의 역사적 사명을 완성하기 위하여 광복군에 참가할 권리와 의무를 똑같이 소유한 것이다”라고 선포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 가릉빈관에서 진행된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에는 당당하게 군복을 입은 여성광복군 민영주·조순옥·신순호·오광심·지복영·김정숙 등 6명이 있었다. 광복군은 중국 영토 내에서 창설되고, 다양한 지역과 형태와 방법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에 광복군의 인원과 명단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1945년 4월 임시정부 군무부장의 보고에 의하면 총사령부와 3개 지대의 장교, 대원, 사병을 포함하여 모두 514명이었다. 이 중 중국군 장교 65명을 제외하면 한국인 광복군은 449명이었다. 이 중 여성광복군은 당당히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군자금 모집, 선전과 초모(招募·사람을 불러 모음) 활동, 전투훈련 등에 참여하고, 군대 내 가사와 구호활동을 펼쳤다.
2021년 현재 서훈된 여성광복군은 모두 32명이다. 여성광복군 김봉식(金鳳植)·김숙영(金淑英)·김영실(金英實)·김옥선(金玉仙)·김정숙(金貞淑)·김정옥(金貞玉)·김효숙(金孝淑)·민영숙(閔泳淑)·민영주(閔泳珠)·박금녀(朴金女)·박기은(朴基恩)·백옥순(白玉順)·송영집(宋永潗)·신순호(申順浩)·신정숙(申貞淑)·안영희(安英姬)·오광심(吳光心)·오희영(吳熙英)·유순희(劉順姬)·윤경열(尹敬烈)·이옥진(李玉珍)·이월봉(李月峰)·임소녀(林小女)·장경숙(張京淑)·전월순(全月順)·전흥순(田興順)·정영순(鄭英淳)·조순옥(趙順玉)·지복영(池復榮)·최이옥(崔伊玉)·한영애(韓永愛)·한태은(韓泰恩)이다. 물론 여성광복군 이외에도 많은 여성독립지사들이 임시정부, 중국 방면에서 활발한 독립활동을 전개했다. 여성독립지사는 상해 시절부터 충칭 시절에 이르기까지 어머니, 아내, 며느리, 딸로서 독립단체, 의정원, 임시정부 부서, 광복군, 한국독립당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과 독립전쟁을 전개했다.
여성광복군, 초모·선전 활동 성과 거두다
광복군은 처음에는 총사령부만으로 창설되었다. 이에 병력 충원을 위해 일본군 점령지역의 한인 청년들을 초모하는 활동이 필수적이었다. 특히, 일본군으로 강제 징집된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 초모활동은 효과적인 광복군 작전이었다. 서안에서 펼쳐진 초모활동을 위해 광복군 창설요원이었던 오광심·지복영·조순옥 등이 서안에 파견되어 서안에서 광복군이 활동기반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초모활동은 징모분처에서 전담했는데, 징모제3분처에서 신봉빈이, 징모제6분처에서 오광심·지복영·오희영이 활약했다. 특히, 징모제6분처는 처음 8명이었던 인원이 1945년 3월 말에 초모활동으로 119명이 되었다. 그 결과 징모제6분처는 1945년 6월에 제3지대로 확대 개편되었다.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음을 국내외에 알리는 선전도 필요했다. 임시정부의 군대가 창설되었음은 한국인에게 정당한 독립전쟁의 주체가 생겼음과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선전활동으로 국내외 한국인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할 수 있었다. 선전활동은 기관지 『광복』의 발간을 통해 효율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여성광복군은 『광복』 간행의 실무를 담당했다.
“한국여성동지들아, 활약하자.”
여성광복군의 주요 활약을 보여주는 인물이 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의 딸이자 여성광복군 지복영이다. 지복영은 광복군 창설 당시 사령부 비서업무를 수행한 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하여 독립전쟁의 최전선에 나섰다.
지복영은 선전활동의 일환으로 『광복』을 간행했다. 지복영의 ‘한국여성동지들아, 활약하자’라는 글에서 “2300만 민족의 반수를 차지한 여성동포들은 조국을 광복하고 신국가를 건설하는 데 한 비생역군(批生力軍)인 것을 무릇 한국사람은 다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중삼중의 압박에 눌리어 신음하던 자매들, 어서 빨리 일어나서 이 민족해방운동의 뜨거운 용로(溶爐) 속으로 뛰어오라!”고 외쳤다.
지복영뿐만 아니라 오광심도 “광복은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오, 광복군 취군(聚軍)의 나팔소리는 한국의 비압박적 여성을 부르고 있다”고 주장하며, 한국 여성의 독립전쟁에 참여를 호소했다. 여성독립지사는 의병, 3·1운동, 국내독립운동, 독립군, 광복군으로 활약하며, 독립의 열망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했다. 여성독립군·광복군의 역사적 전통은 현재 대한민국 여군으로 계승되어 국가수호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021년 현재 526명의 여성독립군·광복군을 포함한 여성독립지사의 헌신이 공훈되었다.
국군역사기념관건립추진TF 김경록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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