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엘 알라메인, 獨 롬멜 막은 연합군 최후 방어선

입력 2021. 03. 10   16:29
업데이트 2021. 03. 10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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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집트 ⑦
 
치열한 북아프리카 사막전쟁 현장
군사박물관·참전전몰장병묘역 위치
75년 만에 발견된 영국군 항공기 전시
조종사 슬픈 사연과 함께 관람객 맞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과 추축군 간 북아프리카 전역의 결정적 전투가 벌어진 알라메인의 군사박물관 부근 국도 옆에 전시된 영국군 전차.  필자 제공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과 추축군 간 북아프리카 전역의 결정적 전투가 벌어진 알라메인의 군사박물관 부근 국도 옆에 전시된 영국군 전차. 필자 제공

엘 알라메인(El Alamein)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서쪽으로 106㎞ 떨어진 지중해 해변 지역이다. 이곳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2년 7월부터 연합군과 추축군 간 북아프리카 전역의 결정적 전투가 4개월 동안 벌어졌다. 알라메인에는 군사박물관, 참전국 전몰장병묘역이 있으며 주변 사막에서 현재까지도 전장 유기물이 수시로 발견되고 있다.


‘평화’를 꿈꾸지만 역사는 항상 폭력적

알렉산드리아-마트루 국도 중간에서 내려 20여 분을 걸어가면 작은 촌락 속의 알라메인 군사박물관이 나타난다. 근처 해변의 ‘알라메인 신도시’ 공사장에는 40∼50층 빌딩들이 치솟고 있다. 이곳 군사박물관은 해마다 참전국 정상들이 모여 전쟁 역사를 반성하고 우호친선을 다짐하는 소중한 공간으로 활용된다. 박물관 입구에는 알라메인전투 50·60·70·75주년 기념비각과 VIP 어록들이 참전국 글씨들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뜻밖에 ‘평화!’라는 선명한 한글도 한쪽 벽면에 있다. 아프리카전투와는 전혀 관련 없는 한국이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한민족의 염원이 이곳까지 전해진 모양이다. 하지만 인류의 이상은 ‘평화’였지만 역사는 항상 폭력적이었다. 인류기록역사 3200년 중 전쟁이 없었던 해는 270년. 총성이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던 기간은 단지 3주에 불과했다. 전쟁학자들은 인류 역사를 크게 ‘전쟁 중이거나 아니면 전쟁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분류한다.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비각 글씨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지구촌 곳곳에서 분쟁의 총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영국 조종사 ‘멋진 남’의 슬픈 사연

박물관 광장 안으로 들어서면 동체에 무서운 상어 입이 그려진 P-40(War hawk) 전투기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전시대 설명문은 어느 영국 청년의 기막힌 사연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1942년 11월 11일 알라메인에서 밀고 당기는 처절한 전투가 넉 달 동안 계속되었다. 이날 새벽 영국공군 조종사 ‘멋진 남’ 중위는 전선 상공을 정찰비행 중 갑자기 사하라사막의 시커먼 모래 폭풍을 만났다. 급히 조종간을 꺾으며 회피기동을 했으나 세찬 폭풍에 휘말리고 말았다. 우박 같은 모래알이 조종석을 때렸고 전방 시계는 제로(Zero)였다. 미국산 전투기의 동체·엔진은 튼튼했지만 거센 폭풍 앞에서는 추풍낙엽이었다. 휘청거리는 날개를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멋진 남’은 최후수단으로 비상착륙을 결심했다. “쿵!” 소리와 함께 스키장 고난도 코스에서 미끄러지듯 모랫바닥 위를 달렸다. 조종간을 꽉 잡으며 브레이크를 힘껏 밟는 순간 항공기는 깊은 모래구덩이에 처박히고 말았다. 조종석에 거꾸로 매달린 ‘멋진 남’의 희미한 의식 속에는 장래를 약속했던 약혼녀 ‘줄리아’의 얼굴이 스치어갔다. 뒤이어 해일처럼 몰려온 모래가 뒤집힌 항공기를 사정없이 덮어 버렸다. 25세 꽃다운 영국 청년의 인생은 이렇게 사라졌고 75년 세월은 덧없이 지나갔다.

2012년 5월 알라메인 부근에서 기적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이집트 정유회사가 탐사작업 중 우연히 사막에 파묻힌 ‘멋진 남’의 항공기 동체를 발견했다. 사막기후 영향으로 원형이 거의 유지된 상태였다. 이집트공군 정비창에 보관하던 이 항공기는 복원작업을 거쳐 2017년 알라메인전투 75주년 기념행사 때 전시되었다. 정확하게 ‘멋진 남’은 100세 되는 해에 환생했다. 항공기 발굴 과정의 설명문에 추가하여 나머지 사연은 필자가 재구성하였다.


1000㎞에 걸친 북아프리카 사막전쟁

참전 국가별 전시실에는 영연방·독일·이탈리아·리비아·이집트의 참전 과정, 무기 장비가 정리되어 있다. 전장의 의료진은 적·아군 부상병을 가리지 않고 치료하였고, 심지어 전사자들은 같은 묘역에 매장되었다.

1940년 9월 13일 무솔리니는 리비아 주둔 이탈리아군에게 이집트 침공을 명령했지만, 영국군을 만나자 고전을 면치 못했다. 무솔리니의 다급한 지원 요청에 독일군이 북아프리카로 건너왔다. 1941년 3월, ‘사막의 여우’ 롬멜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수에즈운하로 향했다. 알라메인은 이집트판 ‘낙동강 방어선’이었다. ‘사막의 생쥐’ 영국군 몽고메리 장군은 “나를 포함한 영연방 제8군은 죽더라도 모두 여기서 죽는다. 한 발짝이라도 전진한 다음 죽을 수 있다면 더욱 좋다”라며 확고한 사수 의지로 맞섰다. 1000㎞에 걸친 북아프리카·지중해전투의 피아 전사상자는 무려 84만 명에 달했지만, 결국 연합군 승리로 끝났다.

알라메인 군사박물관 영국군 전시실에서 만난 ‘사막의 생쥐’몽고메리 장군의 사진과 자료들. 
   필자 제공
알라메인 군사박물관 영국군 전시실에서 만난 ‘사막의 생쥐’몽고메리 장군의 사진과 자료들. 필자 제공

현대전의 승패, 군수지원이 좌우한다


롬멜의 결정적인 패배 요인은 군수지원 부족이었다. 식량·유류·탄약·수리부속은 지중해를 건너면서 연합군에 의해 거의 수장되었다. 독일군의 열악했던 전선 상황이다. 사막에서의 가장 중요한 보급품은 물이었다. 일일 3ℓ 물을 제공하다가 1ℓ로 줄이자 병사들이 불볕 사막에서 발작 상태에 이르렀다. 땀과 때에 찌든 군복을 모래에 비벼 세탁하지 않으면 가죽처럼 빳빳해져 입을 수 없었다. 지역 풍토병까지 만연했고, 신선한 채소 부족으로 롬멜 장군까지 위장병과 황달로 독일로 후송됐다. 뜨겁게 달아오른 전차 안에서 주포를 사격하면 온도가 80도까지 치솟아 탈진한 전차병들이 졸도했다. 군수품 지원을 요청하는 롬멜의 애타는 호소문에 불같이 화를 낸 히틀러는 “불굴의 의지만으로 적 대부대를 격파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라고 응신했다. 이미 독일 전쟁지도부는 이성적 판단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이집트 시골의 대중교통 경운기 택시


군사박물관장은 현역 대령이며 상당수 병사가 사복으로 근무하고 있다. 역사학과 대학생들의 안내를 마친 관리장교가 필자에게 왔다. 당시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치 않았던 이집트는 주로 후방지원 작전만 담당하여 자기 나라 전시 자료는 거의 없다고 한다. 카이로 10월 전쟁 기념관의 모하메드 중위와는 동기생이라며 반갑게 대해준다. 그는 기왕이면 리비아 국경에 가까운 마트루(Matruh)의 롬멜 장군 지휘소벙커를 답사해보라고 권유한다. 친절하게 버스정류소로 가는 택시까지 불러주었으나 한참 후에 달려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화물운반용 경운기였다.



필자 신종태 전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는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50여 개국의 전쟁유적지를 배낭여행으로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쟁유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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