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을미의병 창의했지만
친일내각이 동원한 관군에 진압 당해
의병전쟁의 시작 ‘역사적 의미’
을사늑약 계기로 을사의병 일어나
日에 대응… 독립군으로 이어져
지역 의병 연합부대 형성한 정미의병
만주·연해주로 옮겨 독립전쟁 본격화
F.A.매켄지 기자의 『The tragedy of Korea』 206쪽에 실려 있는 정미의병의 모습. 필자 제공
을미의병부터 정미의병까지 의병전쟁의 선봉장 운강 이강년의 영정.
출처=운강이강년기념관
의병에서 독립군,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우리 군의 역사를 조명해보는 ‘국군의 전통과 역사’를 오늘부터 주 1회 연재한다. ‘국군의 전통과 역사’는 국가방위 및 독립전쟁을 통해 국군역사를 되짚어보며 특정 개인을 중심으로 한 영웅주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국군’이란 이름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산화한 국군 전체를 다룬다.
‘민군’이란 이름의 의병 전통
의병은 외침(外侵)을 받아 관군의 응전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위급할 때 국민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자위군으로,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 없이 자원해 종군하는 민군(民軍)이다.
“의병은 민군이다. 나라가 위급할 때 즉시 의(義)로써 일어나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싸우는 사람이다.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이다.”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독립지사이자 사상가, 역사학자였던 박은식은 이렇게 의병을 정의했다. 의병은 국민으로 구성된 군대다. 전통시대 한국사의 국가는 신분제 사회의 왕국이었다. 이 시기 국가의 군대는 관군이며, 농업과 신분제의 기반 위에서 병농일치의 동원체제가 작동했다. 신분제의 특성상 모든 양인에게 군역이 부과됐으며, 농업사회의 성격으로 일정 수만 실제 복무하고, 나머지 병력은 농업에 전념했다. 즉, 전통시대 군인은 넓은 의미로는 일정 나이대 모든 장정이며, 좁은 의미로는 실제 복무하는 관군이었다. 박은식은 이 가운데 의병을 민군, 즉 넓은 의미의 군인이라 정의한 것이다. 전통시대 의병은 엄연히 국가 군대의 일원이었음을 뜻한다.
의병은 이름 그대로 ‘의(義)를 위해 창의한 군대’다. 이때 의(義)는 인륜의 근본으로 충의(忠義)라 표현되며,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유교사상에서 출발한다. 조선시대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은 주로 전직 관료나 사대부로, 유교이념을 깊이 체득한 인물이었던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의병은 시기에 따라 다른 의를 위해 일어났으며, 이는 근왕에서 독립까지 이른다. 왕국에서 근왕(勤王·임금에게 충성을 다함)하는 의병의 창의는 전통시대 의병의 성격을 보여주며, 근대 국민국가의 인식이 확대되면서 독립을 목표로 한 의병전쟁의 성격으로 변화했다.
의병전쟁의 시기 구분
개항 이후 의병에 의해 수행된 호국 전쟁은 의병전쟁에서 시작됐다. 의병전쟁은 시기와 성격에 따라 제1차 을미의병(1895.10∼1896.10), 제2차 을사의병(1904.4∼1907.7), 제3차 정미의병(1907.8∼1910.8)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을미의병은 전기 의병, 을사의병은 중기 의병, 정미의병은 후기 의병으로 불리기도 한다. 근왕의 성격과 전통적인 역사 인식에 입각한 을미의병, 보호국화에 반대해 독립 인식이 시작된 을사의병, 정미7조약과 군대 해산에 직면해 본격적인 독립전쟁으로 발전한 정미의병 등과 같이 의병전쟁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화했다.
을미의병, 일본의 군사강점에 창의하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의 군사강점이 시작된 1895년 10월, 일본은 한민족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초래하는 사건을 벌였다.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이끄는 일본군수비대와 낭인배 등이 경복궁 건청궁 내 옥호루 주변에서 조선의 왕비를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러시아와 조선의 연결을 차단할 목적으로 왕비를 시해한 것이다. 이후 일본은 전국에 단발령을 내려 한민족의 전통관념을 상쇄시키고자 하였지만, 이는 되레 한민족의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초래했다.
을미의병은 근왕창의(勤王倡義)를 기치로 친일내각을 타도하고 일본세력을 몰아내고자 전국 유생들이 토역소(討逆疏)를 고종에게 올리면서 일어났다. 이어 단발령이 시행되자 전국에서 의병이 창의했다. 경기도의 김하호·박준영, 강원도의 이소응·민용호, 충청도의 유인석·김복한, 경상도의 곽종석·권세연·노응규, 전라도의 기우만, 평안도의 조상학 등 의병장이 의병전쟁을 펼쳤다.
을미의병에 당황한 친일내각은 관군을 동원해 진압했으며, 이 과정에 고종은 아관파천을 통해 친일내각을 해산했다. 을미의병은 근왕의 성격이 강한 전통적인 측면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역사적 격동기에 호국을 위해 창의하고 의병전쟁을 펼쳤다. 일본의 군사강점에 대응해 의병전쟁의 시작을 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을사의병, 일본의 보호국화에 대응, 독립전쟁의 길을 가다
아관파천 이후 수립된 대한제국은 독자적인 근대화 및 군사력 확보에 박차를 가했다. 반면 일본은 한반도에서 세력을 확대하며 러시아와 전쟁을 준비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고자 했다. 러일전쟁 이전 중립을 선언했던 대한제국을 압박해 한일의정서·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한일의정서는 전문 6개 조로 정치·군사·외교적으로 일본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보호국화의 한 단계였다. 이후 일명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 불리는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해 외교권을 박탈했다.
일본의 식민지화에 반발해 을사의병이 일어났다. 을미의병으로 유명했던 유인석 의병부대에서 활약한 원용석·박정수, 충청도 홍주성을 점령했던 민종식·안병찬, 위정척사사상을 주장했던 전라도의 최익현 등이 참여했다.
을사의병에는 최익현 외에 경상도의 신돌석 등 이름난 의병장이 많았다. 즉, 을미의병이 근왕의 의병이었다면 을사의병은 일본의 한국보호국화에 대응한 독립전쟁의 성격이 보다 강했다. 무엇보다 고종의 ‘의병창의’ 명령에 따라 창의한 산남의진(山南義陣)은 을사의병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강조하는 친서를 적어 이상설·이준·이위종으로 하여금 만국평화회의에서 세계에 알리도록 하고, 전국에 의병궐기를 촉구하는 밀지를 전달했다. 고종의 시종관이었던 정환직이 밀지를 받아 장남 정용기로 하여금 경상도에서 창의하도록 했다. 이것이 산남의진의 시작이었다.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경상도 의병장 정용기·정환직·최세윤의 창의로 시작되고 군대 해산 이후 우재룡·김성일 등 군인이 합류, 조직과 전술을 재정비해 1910년까지 경상북도에서 활동하다 독립군으로 이어졌다.
정미의병, 독립 위한 의병전쟁을 펼치다
일본은 1907년 헤이그밀사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통감부에 의해 정미7조약이 체결, 통치권을 장악했다.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함으로써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에 반대하는 군사 기반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에 군대 해산을 전후해 대규모 정미의병이 창의했다.
정미의병의 의병전쟁은 대한제국 군대와 연결됐다. 1907년 8월 1일 군대가 해산되자 시위대 제1연대 제1대 대장인 박승환 참령은 권총 자결함으로써 대한제국 군대의 대일본 전투를 불러왔다. 박 참령은 유서에서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며 대한제국 군인의 자세를 보여줬다. 대한제국 군대는 일본군과 시가전을 전개했으며 원주진위대, 강화분견대 등 각지에서 일본군과 전투했다.
정미의병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경상도의 이강년·신돌석, 경기도의 허위, 전라도의 기삼연·전해산, 충청도의 김동신, 황해도의 박정빈, 평안도의 김여석·채응언, 함경도의 홍범도·차도선·최재형·안중근 등이 있다. 정미의병은 이후 독립군으로 이어져 국군의 독립전쟁사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정미의병의 백미는 지역 의병이 연합부대를 형성한 1908년 초 이인영이 구상한 전국의병연합진의 서울진공작전이었다. 정미의병의 의병전쟁은 지역 의병의 한계에서 벗어나 총 48진, 1만여 명의 13도창의군을 결성하고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하고 구체적으로 실행했다는 점에서 독립전쟁의 본격화임을 잘 보여준다.
정미의병은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신분을 초월한 전 한국민이 참여해 창의했다. 해산된 군인이 합류해 무기와 편제가 개선됐으며, 전국 규모의 13도창의군을 구성할 정도로 거국적인 의병전쟁을 수행했다. 정미의병은 점차 지형지세를 활용한 유격전술을 구사하며, 이후 활동근거지를 만주와 연해주로 옮겨 독립전쟁을 수행했다.
한국사에서 국가위기상황에 민군으로 구국활동을 전개했던 의병의 의병전쟁은 청일전쟁 이후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으로 근왕의 전쟁에서 독립전쟁으로 발전했으며, 1910년 이후 일본을 상대로 한 독립군으로 이어져 독립전쟁의 역사에 첫 단추를 끼웠다.
1895년 을미의병 창의했지만
친일내각이 동원한 관군에 진압 당해
의병전쟁의 시작 ‘역사적 의미’
을사늑약 계기로 을사의병 일어나
日에 대응… 독립군으로 이어져
지역 의병 연합부대 형성한 정미의병
만주·연해주로 옮겨 독립전쟁 본격화
F.A.매켄지 기자의 『The tragedy of Korea』 206쪽에 실려 있는 정미의병의 모습. 필자 제공
을미의병부터 정미의병까지 의병전쟁의 선봉장 운강 이강년의 영정.
출처=운강이강년기념관
의병에서 독립군,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우리 군의 역사를 조명해보는 ‘국군의 전통과 역사’를 오늘부터 주 1회 연재한다. ‘국군의 전통과 역사’는 국가방위 및 독립전쟁을 통해 국군역사를 되짚어보며 특정 개인을 중심으로 한 영웅주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국군’이란 이름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산화한 국군 전체를 다룬다.
‘민군’이란 이름의 의병 전통
의병은 외침(外侵)을 받아 관군의 응전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위급할 때 국민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자위군으로,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 없이 자원해 종군하는 민군(民軍)이다.
“의병은 민군이다. 나라가 위급할 때 즉시 의(義)로써 일어나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싸우는 사람이다.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이다.”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독립지사이자 사상가, 역사학자였던 박은식은 이렇게 의병을 정의했다. 의병은 국민으로 구성된 군대다. 전통시대 한국사의 국가는 신분제 사회의 왕국이었다. 이 시기 국가의 군대는 관군이며, 농업과 신분제의 기반 위에서 병농일치의 동원체제가 작동했다. 신분제의 특성상 모든 양인에게 군역이 부과됐으며, 농업사회의 성격으로 일정 수만 실제 복무하고, 나머지 병력은 농업에 전념했다. 즉, 전통시대 군인은 넓은 의미로는 일정 나이대 모든 장정이며, 좁은 의미로는 실제 복무하는 관군이었다. 박은식은 이 가운데 의병을 민군, 즉 넓은 의미의 군인이라 정의한 것이다. 전통시대 의병은 엄연히 국가 군대의 일원이었음을 뜻한다.
의병은 이름 그대로 ‘의(義)를 위해 창의한 군대’다. 이때 의(義)는 인륜의 근본으로 충의(忠義)라 표현되며,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유교사상에서 출발한다. 조선시대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은 주로 전직 관료나 사대부로, 유교이념을 깊이 체득한 인물이었던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의병은 시기에 따라 다른 의를 위해 일어났으며, 이는 근왕에서 독립까지 이른다. 왕국에서 근왕(勤王·임금에게 충성을 다함)하는 의병의 창의는 전통시대 의병의 성격을 보여주며, 근대 국민국가의 인식이 확대되면서 독립을 목표로 한 의병전쟁의 성격으로 변화했다.
의병전쟁의 시기 구분
개항 이후 의병에 의해 수행된 호국 전쟁은 의병전쟁에서 시작됐다. 의병전쟁은 시기와 성격에 따라 제1차 을미의병(1895.10∼1896.10), 제2차 을사의병(1904.4∼1907.7), 제3차 정미의병(1907.8∼1910.8)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을미의병은 전기 의병, 을사의병은 중기 의병, 정미의병은 후기 의병으로 불리기도 한다. 근왕의 성격과 전통적인 역사 인식에 입각한 을미의병, 보호국화에 반대해 독립 인식이 시작된 을사의병, 정미7조약과 군대 해산에 직면해 본격적인 독립전쟁으로 발전한 정미의병 등과 같이 의병전쟁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화했다.
을미의병, 일본의 군사강점에 창의하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의 군사강점이 시작된 1895년 10월, 일본은 한민족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초래하는 사건을 벌였다.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이끄는 일본군수비대와 낭인배 등이 경복궁 건청궁 내 옥호루 주변에서 조선의 왕비를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러시아와 조선의 연결을 차단할 목적으로 왕비를 시해한 것이다. 이후 일본은 전국에 단발령을 내려 한민족의 전통관념을 상쇄시키고자 하였지만, 이는 되레 한민족의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초래했다.
을미의병은 근왕창의(勤王倡義)를 기치로 친일내각을 타도하고 일본세력을 몰아내고자 전국 유생들이 토역소(討逆疏)를 고종에게 올리면서 일어났다. 이어 단발령이 시행되자 전국에서 의병이 창의했다. 경기도의 김하호·박준영, 강원도의 이소응·민용호, 충청도의 유인석·김복한, 경상도의 곽종석·권세연·노응규, 전라도의 기우만, 평안도의 조상학 등 의병장이 의병전쟁을 펼쳤다.
을미의병에 당황한 친일내각은 관군을 동원해 진압했으며, 이 과정에 고종은 아관파천을 통해 친일내각을 해산했다. 을미의병은 근왕의 성격이 강한 전통적인 측면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역사적 격동기에 호국을 위해 창의하고 의병전쟁을 펼쳤다. 일본의 군사강점에 대응해 의병전쟁의 시작을 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을사의병, 일본의 보호국화에 대응, 독립전쟁의 길을 가다
아관파천 이후 수립된 대한제국은 독자적인 근대화 및 군사력 확보에 박차를 가했다. 반면 일본은 한반도에서 세력을 확대하며 러시아와 전쟁을 준비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고자 했다. 러일전쟁 이전 중립을 선언했던 대한제국을 압박해 한일의정서·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한일의정서는 전문 6개 조로 정치·군사·외교적으로 일본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보호국화의 한 단계였다. 이후 일명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 불리는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해 외교권을 박탈했다.
일본의 식민지화에 반발해 을사의병이 일어났다. 을미의병으로 유명했던 유인석 의병부대에서 활약한 원용석·박정수, 충청도 홍주성을 점령했던 민종식·안병찬, 위정척사사상을 주장했던 전라도의 최익현 등이 참여했다.
을사의병에는 최익현 외에 경상도의 신돌석 등 이름난 의병장이 많았다. 즉, 을미의병이 근왕의 의병이었다면 을사의병은 일본의 한국보호국화에 대응한 독립전쟁의 성격이 보다 강했다. 무엇보다 고종의 ‘의병창의’ 명령에 따라 창의한 산남의진(山南義陣)은 을사의병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강조하는 친서를 적어 이상설·이준·이위종으로 하여금 만국평화회의에서 세계에 알리도록 하고, 전국에 의병궐기를 촉구하는 밀지를 전달했다. 고종의 시종관이었던 정환직이 밀지를 받아 장남 정용기로 하여금 경상도에서 창의하도록 했다. 이것이 산남의진의 시작이었다.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경상도 의병장 정용기·정환직·최세윤의 창의로 시작되고 군대 해산 이후 우재룡·김성일 등 군인이 합류, 조직과 전술을 재정비해 1910년까지 경상북도에서 활동하다 독립군으로 이어졌다.
정미의병, 독립 위한 의병전쟁을 펼치다
일본은 1907년 헤이그밀사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통감부에 의해 정미7조약이 체결, 통치권을 장악했다.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함으로써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에 반대하는 군사 기반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에 군대 해산을 전후해 대규모 정미의병이 창의했다.
정미의병의 의병전쟁은 대한제국 군대와 연결됐다. 1907년 8월 1일 군대가 해산되자 시위대 제1연대 제1대 대장인 박승환 참령은 권총 자결함으로써 대한제국 군대의 대일본 전투를 불러왔다. 박 참령은 유서에서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며 대한제국 군인의 자세를 보여줬다. 대한제국 군대는 일본군과 시가전을 전개했으며 원주진위대, 강화분견대 등 각지에서 일본군과 전투했다.
정미의병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경상도의 이강년·신돌석, 경기도의 허위, 전라도의 기삼연·전해산, 충청도의 김동신, 황해도의 박정빈, 평안도의 김여석·채응언, 함경도의 홍범도·차도선·최재형·안중근 등이 있다. 정미의병은 이후 독립군으로 이어져 국군의 독립전쟁사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정미의병의 백미는 지역 의병이 연합부대를 형성한 1908년 초 이인영이 구상한 전국의병연합진의 서울진공작전이었다. 정미의병의 의병전쟁은 지역 의병의 한계에서 벗어나 총 48진, 1만여 명의 13도창의군을 결성하고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하고 구체적으로 실행했다는 점에서 독립전쟁의 본격화임을 잘 보여준다.
정미의병은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신분을 초월한 전 한국민이 참여해 창의했다. 해산된 군인이 합류해 무기와 편제가 개선됐으며, 전국 규모의 13도창의군을 구성할 정도로 거국적인 의병전쟁을 수행했다. 정미의병은 점차 지형지세를 활용한 유격전술을 구사하며, 이후 활동근거지를 만주와 연해주로 옮겨 독립전쟁을 수행했다.
한국사에서 국가위기상황에 민군으로 구국활동을 전개했던 의병의 의병전쟁은 청일전쟁 이후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으로 근왕의 전쟁에서 독립전쟁으로 발전했으며, 1910년 이후 일본을 상대로 한 독립군으로 이어져 독립전쟁의 역사에 첫 단추를 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