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지구촌, 미디어 진화의 미래·끝
미디어, 정보 널리 유통 위해 탄생
문자→음성→시각 순으로 진화
디지털, 생산·한계비용 0으로 수렴
소수 플랫폼 독점 ‘빅 브라더’ 경계
‘지구촌’이라는 말은 미디어 비평가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이 1960년대에 만들었다. ‘지구촌’은 미디어 기술이 발전하면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거대한 촌락을 형성하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 개념이었다. 매클루언은 또 하나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백미러를 통해 현재를 본다. 우리는 뒤를 향해 가면서 미래로 간다.” 현재 인간 문명이 어느 단계까지 발전했는지 알려면 과거를 돌아봐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대신 과거를 봐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과거 역사 속에 미래가 들어 있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곧 과거 속에 마련된 미래 이정표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매클루언의 이 말은 미디어의 진화 과정을 설명하는 데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미디어 기술을 발명하기 이전에 인간은 먼저 시각을 활용해 소통했다. 집게손가락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유도했다. 표정과 눈물은 희로애락의 감정을 전달했다. 화려하고 정교한 장식물은 힘과 권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시각 다음으로 발달한 음성언어를 사용하면서 인간은 보이지 않는 존재나 형이상학적인 개념에 대해서 소통할 수 있었다. 신이 세상을 말로써 창조했다면, 인간은 신을 말로써 인식하게 됐다. 말을 사용하면서 자유·정의·진리 같은 추상적인 가치를 생각하고 이에 대해 대화할 수 있게 됐다. 놀이에 언어가 덧붙여지면서 음악과 드라마가 탄생했다. 문자언어는 말하는 순간 사라지는 음성언어를 고정함으로써 언어에 시간적 영속성을 부여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말은 문자로 기록되면서 법이 됐다. 부처·소크라테스·예수·공자의 가르침은 문자로 기록되면서 종교와 철학이 됐다. 구전되던 이야기는 문자로 기록되면서 문학과 역사가 됐다.
미디어는 시각·음성·문자로 이루어진 정보를 사람들에게 널리 유통하기 위해 탄생했다. 매클루언의 말처럼 미디어는 뒤를 향해 가면서 문자·음성·시각 순으로 진화했다. 중세 시대 들어 시작된 미디어 진화의 1단계는 문자였다. 문자로 기록된 정보를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기 위해 인쇄술이 발명됐다. 최초가 『직지심경』이든 구텐베르크 성경이든 인쇄술이 종교 문서를 찍어내는 것으로 시작했음은 우연이 아니다. 18~19세기 이르러 증기기관에 힘입어 교통혁명이 발생하게 되고, 인쇄술은 교통의 발전 덕분에 시장성을 갖게 됐다. 미디어는 최초 생산비용은 많이 들지만 추가생산비용 즉, 한계비용은 낮다. 성경 10부를 찍는 데 100만 원이 들고 1000부를 찍는 데 1000만 원이 든다면 한 부당 생산비용은 10분의 1로 줄어든다. 인쇄술은 시장에서 수익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면서 대중성을 띠는 뉴스·소설·잡지가 성행하게 됐다.
미디어 진화 2단계는 1920년 시작된 라디오 방송이다. 공중파에 소리를 실어 보낼 수 있게 되면서 미디어는 교통이 갖던 공간적 한계를 극복했다. 누구나 라디오 수신기만 있으면 방송국이 전파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라디오는 특히 드라마와 음악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문맹률이 아직 높았던 시절, 라디오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즐거움을 선사했다. 최초 생산비용은 많지만 한계비용은 0에 수렴했던 덕분에 방송국은 막대한 광고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미디어 진화 2.5단계는 1950년대 이후 시각 영상을 전달할 수 있었던 텔레비전이다. 매클루언이 ‘지구촌’이란 말을 만들어낼 당시 최첨단 미디어는 텔레비전이었다. 텔레비전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생활양식, 언어, 문화, 풍습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제 스포츠 경기를 비롯해 영국 왕실 결혼식이나 이라크전쟁을 생중계하면서 텔레비전은 세계인의 극장 노릇도 했다. 지구촌 다수 인구가 실시간으로 공통의 관심사에 눈과 귀를 집중시킨 것은 인간 문명 최초의 경험이었다. 그러면서 텔레비전은 콜라, 햄버거, 운동화 등 상품을 국제적 브랜드로 만들었다.
미디어 진화 3단계는 디지털 기술이다. 디지털 기술은 과거 미디어 진화 과정을 반복했다. 문자의 디지털화가 먼저 이뤄졌다. 뉴스, 백과사전, 대중 서적이 디지털화되면서 인쇄술의 용도가 급격히 줄었다. 컴퓨터를 켜서 인터넷에 접속하면 화면 속에는 종이에 인쇄됐던 거의 모든 정보가 있었다. 그 후 기술은 소리와 영상을 디지털화했다. 방송국이 들려주는 음악이 아니라 개인이 원하는 음악을 인터넷에서 찾아 들을 수 있게 됐고, 영상도 그렇게 변하고 있다. 인쇄기술에 이어 방송전파의 용도가 줄면서, 과거 영화를 누리던 방송국은 최근 생존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다다랐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인쇄술과 방송 전파로 유통됐던 콘텐츠를 디지털로 전환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은 콘텐츠의 최초 생산비용을 0으로 수렴하게 만들었다. 과거에는 한계비용이 0으로 수렴하고 최초 생산비용은 막대했지만, 디지털 기술은 최초 생산비용과 한계비용 둘 다 0으로 수렴하게 만든다. 유튜브에 동영상을 제작해서 유통하는 것은 스마트폰만 가지고 있다면 비용을 들이지 않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면 누구나 그 동영상을 무료로 시청할 수 있다. 다른 나라에 있는 사람도 자유롭게 시청할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은 미디어의 공유 사회를 만들고 있다. 사실 미디어가 역사에 등장하기 이전 콘텐츠나 정보는 상품이 아니라 공유의 대상이었다. 기술적 한계나 지리적 한계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려웠을 뿐이다. 예수는 자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 대가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청중에게 물고기와 빵을 대접했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기술은 과거 공유사회를 세계적인 규모로 실현하는 디지털 지구촌을 미래 비전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지구촌을 낭만주의적으로 대하는 태도는 위험하다. 디지털 지구촌은 소수의 플랫폼 기업이 독점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올해 코로나19를 통해 봤듯, 사람들이 디지털로 연결될수록 이들 기업의 주가는 치솟았다. 주가만 치솟은 것이 아니라 이들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범위도 커졌다. 여러 국가의 정부가 이들을 제어하기 위해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디지털 지구촌에서는 어쩌면 이들이 마을의 ‘빅 브라더’가 될지도 모른다.
국군장병 여러분! 그동안 ‘미디어 프리즘’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힘찬 새해 맞으시기 바랍니다. <김선호 한국
언론진흥재단 선임연구위원·한국
방송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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