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완결 병영칼럼

[설인효 병영칼럼] 기억에 남는 기억

입력 2020. 11. 11   15:36
업데이트 2020. 11. 1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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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인 효 
한국국방연구원 국방현안팀장
설 인 효 한국국방연구원 국방현안팀장


대학생 때 일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2월 중순, 동아리 사람들과 등산을 했다. 그해에 뭔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던 듯 큰 포부를 품고 제법 무리하게 일정을 잡아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문제는 제대로 등산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겨울 산행에 대한 충분한 준비 없이 산에 올랐다는 것이다.

정상에 오르는 데는 3~4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계획대로 목표한 지점까지 능선을 타고 산길을 오르내리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원래 여름에도 하루 만에 주파하기 어려운 거리라 중간에 야영장이 마련돼 있었다. 게다가 짐을 줄인다는 이유로 음식을 적게 준비해 오전 11시경에 모든 음식이 바닥나 버렸다.

험한 산길에 허기까지 지자 정말 한 걸음도 더 떼기 힘든 상태가 됐다. 해가 넘어가며 추위가 엄습하면서 생명의 위협마저 느꼈다. 결국, 목표했던 지점까지 완주를 포기하고 지도에도 표시돼 있지 않은 계곡 길을 통해 하산을 시도하게 됐다.

그나마 물이 흐르던 계곡이 빨리 산을 내려갈 통로 역할을 해 줬다. 문제는 겨울 산행의 기본이라 할 ‘아이젠’이 사람 수의 절반밖에 준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각자 한쪽 발에만 아이젠을 착용한 채 빙판에 수없이 미끄러지며 산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다양한 모임을 통해 엠티를 갔다. 회비를 좀 두둑이 내 꽤 고급스러운 숙소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경치 좋은 곳들도 두루 구경 다녔다. 지역 맛집을 찾아 갹출한 돈으로 별미를 먹었던 경험도 적지 않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억되고 좀처럼 잊히지 않는 추억은 역시 죽을 고생을 했던 그 겨울의 산행이었다.

심리학자들이 한 실험을 했다. 여러 명의 사람을 한 방에 넣고 고리를 던져 말뚝에 거는 놀이기구만을 함께 넣어 줬다. 흥미로운 점은 여러 팀의 방에서 말뚝부터 고리를 던지는 지점까지의 거리가 모두 비슷했다는 것이다. 너무 멀어서 도저히 성공하기 어려우면 거리를 줄이고, 지나치게 쉬워 누구나 쉽게 걸게 되면 거리를 늘리는 과정에서 비슷한 거리로 수렴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쉬운 게임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현대의 과학자들은 한 사람을 바로 그 사람으로 규정해 주는 본질은 그 사람이 일생 쌓아 온 ‘기억’이라 말하고 있다. 사람의 인격도 결국 그 사람이 살고 겪어 온 삶의 내용, 즉 ‘기억의 산물’이라 할만하다.

삶을 평가하는 방식에는 다양한 기준이 있을 수 있다. 결국,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기억을 쌓아 나가느냐가 삶의 중요한 평가 기준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오래 남는 기억’, ‘좋은 추억’이란 꼭 쉽고, 즐겁고, 유쾌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 되면서 우리 모두 큰 불편과 혼란을 겪고 있다. 국가 안보를 보장하는 군은 가장 높은 수준의 자체 방역으로 군내 안전을 보장하고 그 결과 대한민국을 안전하게 지키고 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자유가 제약되고 더 높은 수준의 규율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좋든 싫든 2020년은 코로나19와 함께 우리 모두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더구나 올해 대한민국에서 군 생활을 했다면 평생을 두고 다시 펼쳐볼 기억이 될 게 확실하다. 어렵고 힘든 긴 터널을 통과하고 있지만, 그 점을 기억하면서 작은 위안으로 삼아 본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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