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국전쟁 70주년, 대중가요로 본 6.25전쟁

다시는 또 다른 에레나 나오지 않기를…

입력 2020. 10. 30   15:50
업데이트 2020. 10. 30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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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1953 에레나가 된 순이
작사 손로원 /작곡 한복남 /노래 한정무 

 
6·25전쟁 휴전되기 5개월 전
서글픈 시대 희로애락 고스란히
1989년에는 문주란 리메이크
다시 들어도 애련한 전쟁통 통곡
‘든든한 나라’ 소중함 다시 상기


유행가는 그 시대 상황을 담아낸 문화이고 역사다. 서민들의 애환을 여과 없이 반영하면서 시대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표현해 내기 때문이다. <에레나가 된 순이>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6·25전쟁이 휴전되기 5개월 전, 휴전선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던 1953년 2월에 만들어진, 서글픈 시대 상황의 유물 같은 노래다.

이 노래를 1989년 문주란이 리메이크했다. 아세아레코드 앨범 ALS-1764 B면 3번 트랙에 실은 곡. 다시 들어도 애련한 전쟁 통의 통곡(痛曲), 70여 년 세월의 강물을 따라 흘러온 우리 누이들의 아픔을 되새기며, 든든한 나라의 소중함을 유행가 가락을 통해 느끼게 해 준다.

우리 역사에서 근현대의 분수령은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태평양전쟁 주범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일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항복 서명을 세 번 했다. 그해 9월 2일 도쿄 앞바다 요코하마 항에 정박한 미 해군 미주리함 선상(船上)에서, 그리고 일본 외무성에서 육군참모총장과 외무대신이 각각 정부를 대표해 항복 서명했다.

이어 조선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1875~1953)가 1945년 9월 9일 오전 광화문 조선총독부 2층 제1회의실에서 미군정청 사령관으로 내한한 미국 육군 제24군단장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1893~1963) 중장 앞에서 항복 서명을 했다.

그리고 한반도의 허리에 38선이 탄생한다. 이때부터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까지를 해방정국기라 한다. 이어서 3년 1개월 1129일간에 걸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포성이 조국 하늘을 뒤덮었다.

역사적으로는 이 시기를 현대의 시발기(始發期)로 친다. 이러한 시대상을 엮어낸 노래가 <에레나가 된 순이>다. 손로원이 노랫말을 쓰고 한복남이 곡을 붙여서 본인이 운영하던 도미도레코드에서 6·25전쟁 당시 혈혈단신으로 월남한 실향민 한정무(1921~1960)가 녹음해 불렀다.

이 노래는 오프닝 대사부터 가슴이 쓰리다. ‘순이, 내가 왔어. 얼마나 순이를 찾았다고. 순이라. 순이가 아니에요. 예전의 못난 순이는 죽고, 이젠 에레나예요. 순이 돌았어? 뜬소문에, 헛소문에, 역마다 돌아서 항구마다 흘러서, 오늘에야 만났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어때요? 보석 귀걸이와 다이아 반지를 보세요. 그래도 순이라고 부르겠어요? 난 싫어요, 싫어. 그 가난하고 비참한 순이가, 순이가 싫어서 에레나가 되었어요….’ 이제 노래 가사를 음미해 보자.

<에레나가 된 순이>는 1959년 안다성(1930~·청주 출생)이 리메이크해 더욱 유명해진다. 그래서 안다성의 노래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 노래에도 오프닝 대사가 낭송된다. ‘전쟁의 뒤안길엔 비극도 많았지. 이런 눈물겨운 해후도 있었더란다. 헬로우 헬로우~ 헬로우 하이~. 하 순희 순희 날 몰라보겠어? … 사람을 잘못 봤지 에이요? …흐흐흐흐흐 하하하하하 니가. 웃겼지비 하하하. 나는 에레나가 아이겠소. 하아하하하하’.

이 곡은 1953년 2월에 만들어졌다. 한복남의 아들인 작곡가 하기송이 2014년 공개한 아버지의 친필 악보가 그 증거다. 가요 곡이라고 적힌 메모. 가요 곡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시절 말기에 유행가 대신 쓰였던 용어다. 2박자 탱고 리듬의 이 노래에는 <잊지 못할 순희>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임종수(1942~)와 조운파(1943~) 콤비가 지어서 태진아가 부른 <옥경이>의 원곡 이름이 <고향여자>인 것과 비슷하다.

한복남(본명 한영순)은 1919년 평남 안주에서 출생했으며 광복 직후 월남해 부산 아미동에 정착했다. 소위 ‘38 따라지’다. 자유대한민국을 향해 무작정 38선을 따라서 넘어온 이들을 일컫는 시대가 낳은 용어다. 이후 1947년 김해송의 주한미군 위문공연단체 KPK악단에 입단해 6·25전쟁을 맞게 된다.

그는 전쟁 중에 부산에서 재봉틀 바늘 장사를 하면서 1948년 <저무는 충무로>와 <빈대떡 신사>를 발표한다. 낮에는 국제시장에서 축음기 부속품 장사도 했다. 이때 녹음기를 구입했다. 마그네틱 타입, 미국산 리베라·암팩스·모타볼 등등.

그는 이 녹음기를 이용해서 1951년 말 도미도레코드를 차렸다. 이때 작곡한 것이 <에레나가 된 순이>다. 그는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은 없으나 특별한 소질로 많은 히트곡을 냈다. 1960년대에는 자작곡 <엽전 열 닷 냥>을 히트시켰으며, 1970년대까지 방송 활동을 하다가 1991년 향년 73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1911년 철원에서 출생한 손로원의 행적은 분명치 않다. 다만 전국을 떠돈 자유로운 영혼, 보헤미안이었던 듯하다.

손로현·손회몽·불방각·손불경·손영감 등 다양한 필명을 사용하면서 <페르시아 왕자>, <샌프란시스코>, <백마강>, <비 내리는 호남선>, <홍콩 아가씨>, <경상도 아가씨>, <봄날은 간다> 등 주옥같은 명곡을 남겼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내 나라 내 땅에 살면서도 다른 나라의 통치를 받아야 하고, 내 이름과 내 몸을 나의 의지대로 유지하기가 어렵다. 지나온 역사에 그 답이 새겨져 있다. <에레나가 된 순이>가 그 증거다. 다시는 이 나라 이 땅에 또 다른 에레나가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든든한 나라를 만들어야 하고, 든든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 아~ 사랑하는 나의 나라여. <유차영 한국콜마 여주 아카데미 운영원장 /예비역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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