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왕릉으로 읽는 삼국역사

태자 책봉 놓고 암투…우여곡절 끝 삼맥종 낙점

입력 2020. 10. 21   16:56
업데이트 2020. 10. 2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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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신라 법흥왕 ②


정비 보도 왕자 출산 못하자
후궁들 간 이전투구로 혼란
외손자이자 조카 대통 이어

 
원광 살생유택 통치이념 수용
말년엔 입산해 승려로 생 마쳐 

 

경북 경주시에 있는 법흥왕릉 앞 안산. 우측 백호 자락을 압도하고 있어 남자가 위축되는 여인천하의 풍수물형이다.  필자 제공
경북 경주시에 있는 법흥왕릉 앞 안산. 우측 백호 자락을 압도하고 있어 남자가 위축되는 여인천하의 풍수물형이다. 필자 제공

신라 23대 법흥왕(재위 514~540)은 태자를 갈망했다. 왕 3년(516) 1월 역대 왕들의 신주가 봉안된 신궁에 제사 올리며 왕은 보도 정비에게 태기가 있기를 앙원했다. 보도는 21대 소지왕(재위 479~500) 딸로 왕과는 8촌 간이었다. 보도에게 태기가 있어 출산하니 딸이었다. 지소 공주다. 왕은 출산 전갈을 듣고도 지밀궁에 들지 않았다. 왕은 후궁을 물색했다. 보도는 지소를 양육하며 절치액완(切齒扼腕)했다.

법흥왕은 일찍부터 소지왕 후궁으로 7촌 재당숙모인 벽화부인을 흠모했다. 벽화는 당대 신라 최고의 미인이었으나 소지왕 승하(500) 후 퇴궐해 옹색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왕은 벽화를 후궁으로 입궐시켜 딸 삼엽 궁주를 낳았다. 왕은 다시 선혜(소지왕 정비)의 외손녀인 옥진 궁주를 가까이해 왕자 비대를 출산했다. 왕은 환희로 가득 찼다. 궁궐에서 연회를 열고 조정 신료들에게는 1급 승진의 은전을 내린 뒤 백성들에게도 조세 감면 혜택을 베풀었다.

예부터 중원(중국) 제국(諸國)에서는 여성의 연령을 구분해 왕비 간택에 적용했다. 상등은 홍상미판(鴻像未判)이라 하여 초조(初潮)가 비친 14세 미만 순결한 소녀로 온기가 충만해야 했다. 중등은 수경이촌(首經已寸)으로 15~20세의 생기 넘치는 처녀였고, 하등은 미경산육(未經産育)으로 21~25세 미만의 출산 전 풍만한 여인이었다. 이 같은 왕비 간택의 연령 기준은 삼국-고려-조선조를 거치는 동안에도 철저히 고수됐다. 민속학계는 고대의 조혼 풍속 연원을 왕실의 혼인 관습에서 찾고 있다.

어느덧 지소 공주가 홍상미판의 14세 소녀로 성장했다. 법흥왕은 지소에게 갈문왕 입종에게 하가하도록 명했다. 입종은 22대 지증왕 차남으로 법흥왕의 동복 아우였다. 지소는 건장한 왕족 미소년들을 두고 왜 하필 늙은 숙부에게 시집보내느냐며 식음을 전폐하고 두문불출했다. 왕명은 국법이고 지엄했다. 지소가 숙부와 신방을 차려 아들 삼맥종을 낳으니 24대 진흥왕(재위 540~576)이다. 부왕 법흥왕 사후 지소가 역사 전면에 부상하며 신라 중기 왕실에 야기된 성도덕 문란은 사서에 기록된 대로 적시하기가 난감할 정도다.

법흥왕은 옥진 궁주 사이에 출생한 비대를 태자로 책봉하려 했다. 뜻밖에도 비대의 외조부 위화랑(1세 풍월주)이 극력 저지하고 나섰다. 왕의 딸로 왕의 제수가 된 지소 공주도 이에 합세했다. 옥진은 어전에 시립한 위화랑(친정아버지) 앞에 엎어져 대성통곡하며 부녀간 인연을 끊으려는 의도가 무엇이냐고 다그쳤다. 왕실 권력 장악을 위한 위화랑과 지소의 거대한 음모였음은 옥진도 추후에 알게 됐다. 위화랑이 공수(拱手)로 읍하며 왕에게 아뢰었다.

“신(臣)의 처 오도는 선혜 정비가 평민 출신 승려 묘심과 사통해 출생한 사생아입니다. 불민한 신이 오도와 정을 통해 낳은 옥진은 골품이 낮습니다. 옥진은 박영실(법흥왕 생질)을 첫 남자로 섬긴 후 비대를 출산했으므로 골품이 비천한 비대는 태자 위에 오를 수 없사옵니다. 부디 총명을 밝혀 어명을 거두시옵소서.”

왕도 어쩔 수 없어 비대의 태자 책봉을 철회했다. 지소 공주는 쾌재를 불렀고 옥진은 거품을 물고 졸도했다. 왕심의 상처를 수습한 왕이 보과 부인 사이의 왕자 모량을 왕위 승계자로 내정하려 했다. 이번에는 조정 신료들이 “백제 피가 섞인 모량이 신라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며 성난 벌떼처럼 참소했다.

왕자 모량은 소지왕 15년(493) 백제 24대 동성왕(재위 479~501)이 신라에 혼인 동맹을 요청했을 때 혼인 사절단과 동행한 원종(법흥왕 본명)이 동성왕 딸 보과 공주를 은밀히 만나 낳은 아들이다. 임신 사실을 뒤늦게 안 보과가 신라로 월경해 원종과 해후했다. 모량 왕자와 남모 공주를 낳고 법흥왕 후궁이 되었다. 비로소 왕은 깨달았다. ‘삼맥종(입종 아들)도 짐의 외손자이자 조카가 아니겠는가. 삼맥종으로 대통을 잇게 하리라.’
봉토 유실을 방지하는 호석. 이끼에 1500년 세월이 얹혀 있다.  필자 제공
봉토 유실을 방지하는 호석. 이끼에 1500년 세월이 얹혀 있다. 필자 제공

법흥왕은 내·외치에 주력했다. 왕 1년(514) 금관가야(김해)의 묵인 아래 점령한 임나가야(경남 함안)를 순행하고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병부를 새로 설치(517)해 조정을 개편한 뒤 율령 반포(520)를 통해 나라 기강을 바로잡았다. 금관가야 10대 구형왕(재위 521~532)이 요청한 혼인 동맹을 수용해 경계심을 없앤 뒤 종국에는 금관가야를 합병했다. 연호 건원을 제정(536)해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양(梁)나라와 사신 교환으로 고구려·백제의 파상 공세에 외교적으로 대처했다.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공인(527)한 뒤 전 국토의 정토화를 위해 불심을 고양했다.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살생을 금지(529)해 삼라만상과 공생하는 현생 극락을 추구하려 했다. 왕의 통치 이념은 후일 원광(555~638) 법사의 세속오계 중 오계(戒)인 살생유택으로 수용되었다. 원광은 숙명(24대 진흥왕 후궁·지소 공주 딸) 궁주의 장남으로 숙명이 진흥왕 몰래 이화랑(위화랑 아들·4세 풍월주)과 사통해 낳았다. 풍월주는 화랑 우두머리에 대한 별칭이다.

법흥왕은 재위 기간 내의 탁월한 통치로 백성들 신망을 얻었지만, 사적으로는 불우했다. 7척이 넘는 거구의 모후(연제부인·22대 지증왕 정비)는 7촌 조카딸이자 며느리인 보도 정비를 원수처럼 미워했다. 고부는 끝내 화해하지 못하고 보도가 왕자를 못 낳는다는 구실로 강제 입산시켜 비구니로 생을 마감하게 했다. 손녀 지소(보도 딸) 공주가 둘째 아들 입종에게 출가해 며느리가 되었지만, 보도처럼 미워했다. 법흥왕은 왕족 여인들 간 얽힌 금생에서의 악연에 크게 상심하며 삼간 모옥의 필부를 동경했다.

어느 날 법흥왕이 양나라에서 입국해 불법을 전하고 체류 중인 노승 원표에게 화두를 던졌다. “사문이시여, 생과 사의 근원은 무엇이며 중생에게 저승은 왜 두려움으로 다가오는가?” 원표가 잠시 묵상에 들더니 독백으로 화답했다.

“전생의 일이 궁금하거든(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지금 살고 있는 모습을 보라(금생수자시·今生受者是)/내생의 일이 걱정되거든(욕지내생사·欲知來生事)/지금 짓고 있는 행위를 보라(금생작자시·今生作者是).”

순간, 법흥왕 뇌리에 섬광 같은 지혜와 함께 뇌성보다 더 요란한 깨우침이 대해처럼 일렁였다. 돈오돈수(頓悟頓修·단박에 깨쳐서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의 경계를 찰나에 허문 활연대오(豁然大悟·막힌 것 없이 밝게 깨달아 아는 것)였다. 원표는 그 길로 왕궁을 떠나 자취를 감추었고 왕은 애공사로 입산해 법운이란 법명으로 생을 마쳤다. 비구니 보도가 법운 거사를 합장으로 맞았다. 법흥왕 능이 애공사 북쪽 능선에 조영된 내력이다.
군주시대 임금에게 왕자가 없으면 왕실이 혼미했다. 차기 왕권 향배를 둘러싼 왕족 간 권력 암투로 살상을 초래하는가 하면, 역모를 통한 왕위 찬탈도 간단없이 자행됐다. 왕은 정비를 통해 왕자를 출산하고자 했다. 천재일우의 홍복으로 정비에 간택됐다 하더라도 사자(嗣子·대를 이을 아들)를 낳지 못하면 목전의 영화가 풍비박산 나고 지밀궁 소박데기로 전락했다. 왕은 정비에게 태자가 없을 경우 후궁 소생 왕자로 대통을 승계했다. 후궁 출생 왕자가 여럿이면 후궁들 간 이전투구로 지밀 안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규원 『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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