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동굴에서 시작된 수도원… 천 년 역사를 바라보다

입력 2020. 09. 29   16:05
업데이트 2020. 09. 2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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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도원


수도사 거주지·공동묘지 사용
독소전쟁 등으로 심각한 피해
소련에 강제 합병되며 완전 폐쇄
우크라이나 독립 후 복원 이뤄져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도원 전경.            사진=www.ukrainetogo.com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도원 전경. 사진=www.ukrainetogo.com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 있는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도원(또는 키예프 동굴 수도원)은 1051년 설립된 유서 깊은 동방 정교회(동로마제국의 국교로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발전한 기독교의 한 교파)이다. 천 년의 역사가 있는 이곳은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의 종교와 교육, 학술에 큰 영향을 주었던 수도원이다.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도원은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몽골족과 타타르족의 침입으로 크게 파괴됐으며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됐다. 1941년 독소전쟁(1941~1945) 때는 키예프를 점령한 독일군이 수도원 내 우스펜스키 대성당을 폭파했다. 우스펜스키 대성당은 1991년 우크라이나가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에 복원됐다. 수도원은 키예프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과 함께 199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독소전쟁 중인 1941년 11월 3일 독일군이 폭파한 수도원의 우스펜스키 대성당. 
 사진=www.ranker.com
독소전쟁 중인 1941년 11월 3일 독일군이 폭파한 수도원의 우스펜스키 대성당. 사진=www.ranker.com


성 안토니우스가 시초…엄격한 신앙생활 영위

키예프(Kiev)는 동유럽에서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네 명의 도시 건설자 중 한 명인 키(Kyi)에서 유래됐다. 9세기경 키예프를 중심으로 형성된 키예프 공국(公國·군주가 아닌 공이 통치하는 소국)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뿌리이다. 키예프 공국의 수도였던 키예프는 드네프르강을 이용해 흑해와 발트해를 연결한 무역으로 번성했다.

1051년 성 안토니우스(983~1073)가 그를 따르는 테오도시우스와 함께 그리스 아토스 산에 있는 수도원을 본떠 드네프르강 언덕에 동굴을 파서 수도 생활을 시작한 것이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시초다.

개미굴처럼 좁고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성 안토니우스와 수도사들은 금욕적이며 엄격한 규칙에 따라 예배를 올리는 신앙생활을 영위했다.

동굴은 수도사들의 거주지이자 생을 다한 이들의 공동묘지로 사용됐다. 1062년 수도사들은 지상에 교회와 수도원을 짓기 시작했다. 1089년 수도원에서 우스펜스키 대성당이 봉헌됐다. 12세기로 접어들 무렵 수도원에는 1000여 명의 수도사들이 거주했으며 동방 정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 중심지로 그 지위도 상승했다.

수도원 지하 동굴에 있는 묘지. 
 사진=theculturetrip.com
수도원 지하 동굴에 있는 묘지. 사진=theculturetrip.com


1240년 몽골족 침략받아 수도원 파괴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던 키예프 공국은 13세기 초에 주변 공국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 때 수차례 점령되면서 세력이 점차 약해졌다. 1240년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킵차크 칸국의 제1대 군주인 바투 칸(1207~1255)이 이끄는 몽골족의 공격으로 키예프 공국은 쇠퇴하고, 수도원은 파괴됐다. 이후 키예프를 비롯한 우크라이나는 몽골족, 리투아니아 대공국, 폴란드의 지배를 받으며, 슬라브 민족의 주도권은 후발주자였던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옮겨갔다.

몽골족 가운데 한 부족인 타타르족은 14세기부터 지속적으로 키예프를 침략했는데, 1399년과 1416년 수도원에 큰 피해를 주었다. 1470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왕자들이 수도원에 혜택과 재산을 제공하면서 첫 재건이 이뤄졌다. 하지만 1482년 수도원은 타타르족의 침입으로 또 파괴됐다.

수도원은 이후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의 지배를 받은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됐다. 수도원은 높이 96.5m의 대수도원 종탑을 비롯해 수도사들의 묘가 있는 지하 동굴인 블리주니 페체리와 우스펜스키 대성당, 삼위일체 대문 교회, 베레스토베 구세주 교회 등으로 구성돼 있다.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도원 내부 전경. 
 사진=www.dookinternational.com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도원 내부 전경. 사진=www.dookinternational.com


독소전쟁 중 우스펜스키 대성당 폭파

수도원의 가장 혹독한 시기는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이후에 시작됐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혁명 후의 혼란과 제1차 세계대전 속에서 독립을 시도해 민족국가를 건설했으나, 1922년 12월 소련에 강제 합병됐고 이듬해부터 소련 헌법의 적용을 받았다. 종교를 부정했던 소련 정권은 1926년 수도원을 완전히 폐쇄했다.

1934년 키예프는 소련 내 우크라이나의 수도가 됐으며 모스크바,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다음 가는 제3의 도시로 성장해간다. 하지만 그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과의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한 독소전쟁이 일어났을 때, 키예프에 위기가 찾아온다. 독일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우크라이나 등의 세 경로로 소련에 병력을 투입했다. 독일의 침공으로 키예프는 무참히 파괴됐다. 독일이 키예프를 점령하는 동안 수도원에 민간인으로 구성된 경찰서가 만들어졌지만 나치에 의해 약 500명이 살해됐다.

1941년 11월 3일 독일군은 약탈자의 흔적을 숨기고 정복된 민족의 국가 정체성을 약화시키기 위해 수도원에서 가장 오래된 우스펜스키 대성당을 폭파했다. 1943년 소련은 키예프를 해방한 후에 수도원을 복원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다. 1961년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총리가 반종교 정책을 펴는 동안 수도원은 다시 폐쇄됐다.

우스펜스키 대성당은 1991년 8월 소련 붕괴를 앞두고 우크라이나가 독립하고 난 후, 1995년 복원을 시작해 2000년 8월 24일 봉헌됐다.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도원은 우크라이나의 종교적 상징이자 천 년이 넘는 역사가 서린 건축물로서 전쟁을 마감하고 평화를 누리고 있다. 현재 100명 이상의 수도사가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이상미 문화·예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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