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MZ세대를 말하다

남이 짜놓은 틀은 거부한다, 내 세계에선 내 맘대로

입력 2020. 09. 22   16:18
업데이트 2020. 09. 2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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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공유하며 경쟁하는 세계관 

웹툰·영화·드라마 주인공을 자신에게 투영 ‘콘셉트질’
SNS ‘짝퉁 계정’으로 ‘빙의’ 대화 나누는 ‘페이크슈머’
설정부터 과정까지 누가 더 디테일하고 몰입하나 경쟁 


 

“레슬링은 사기가 아니야. 미리 정해 놓았을 뿐이지. 그래서 어쩌라고(Wrestling isn’t fake. It’s predetermined. So what)?”

1980~1990년대 최고의 인기 프로레슬러인 헐크 호건(Hulk Hogan)의 자서전 『링 바깥에서의 나의 삶(원제: My Life Outside the Ring)』에 나온 구절이다. 프로레슬링이란 게 스포츠가 아니고 짜고 하는 쇼라는 말에 위와 같이 대답했다.

‘얼티밋 워리어(Ultimate Warrior)’라는 이름이 2014년 4월에 한국 검색순위 상위에 올랐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그를 추모하는 게시판이 곳곳에 마련됐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도 그를 추억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초등학교 때 토요일 오후는 미국 프로레슬링을 보면서 지냈다며, 그때 얼티밋 워리어가 우리나라 초등학생들에게까지 영웅이었다는 글들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새삼 헐크 호건의 이름이 함께 오르내렸다.

프로레슬링의 최대 이벤트라고 할 수 있는 레슬마니아(Wrestlemania)에서 1990년대 초 벌인 맞대결이 화제가 됐다. 그 레슬마니아 35회는 미국 뉴욕시 바로 근교의 미식축구경기장을 가득 메운 8만 이상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개막 사회를 담당한 은퇴한 여성 레슬러가 깜짝쇼로 불러낸 인물이 바로 헐크 호건이었다. 그가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관중석은 메인 이벤트만큼 달아올랐다. 초등학생부터 헐크 호건과 동년배로 보이는 이들까지 열광했다.

뉴욕 레슬마니아의 다큐멘터리를 TV로 보면서 헐크 호건이 어떻게 미국의 영웅이 됐고, 복싱 영화 ‘록키’에 출연하며 악역이 됐고, 레슬링에서까지 배신에 배신을 거듭했는지 얘기해줬다. 함께 시청하며 그 얘기를 들은 20대 중반의 친구는 메인 이벤트 대결에서 챔피언 자리에 오른 코피 킹스턴(Kofi Kingston)이 내세울 것 없이 무명의 초기 시절부터 어떤 고난을 거치며 각광 받는 자리에 올랐는지, 가족과 친구들, 레슬링 세계에서의 성장기를 전해줬다. 승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얼마나 그럴듯한가, 극적인가, 이후의 전개나 주변 상황이 맞아떨어지는가, 곧 콘셉트에 충실한가 등이 관심이었다. 밀레니얼들이 얼티밋 워리어를 영접하던 때와 비슷한 나이에 베이비 부머(Baby Boomer)들도 프로레슬링에 빠져 있었다.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은 1960~1970년대 내내 인기였다. 중간에 한 차례 큰 위기가 있었고, 깊은 상처를 안기는 일이 있기는 했다.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유명 선수 자신이 고백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거구들의 대결을 가슴 졸이며 보던 이들 중 프로레슬링이 헐크 호건의 표현으로 ‘사기(fake)’라며 멀리하는 이들이 상당수 나왔다. 재미있게 프로레슬링을 볼라치면 ‘저것 다 쇼야’라면서 초를 치는 잘난 체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지금도 기성세대에서는 레슬마니아 같은 미국 프로레슬링 경기를 보는 MZ세대를 보고는 ‘쇼’에 열광한다며 혀를 끌끌 찬다. 프로레슬링에서도 보는 시각, 재미를 느끼는 요소가 너무 다르다.

승패에만 관심을 두는 결과지상주의 태도가 기성세대에는 두드러진다. 스포츠는 순수하고 각본 없는 드라마라 이변이 있다는 이유가 따른다. 대본에 따라 만든 드라마나 영화는 재미있다고 보면서 그게 나타나는 양식이나 무대가 다른 것으로 프로레슬링을 즐길 수는 없는 걸까. 프로레슬링은 스포츠 너머로 확장되고 있다. 예전에는 링 위, 기껏해야 난투극의 무대로 링 주위 정도로 나가는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선수들의 일상생활, 사교 활동, 프로레슬링 기구와의 관계 등등까지 그야말로 한 ‘세계’가 즐길 거리로 제공되고 있다.

선수들이나 관계자들이 등장하는 매체도 다양해졌다. 헐크 호건도 영화에 나왔고, 드웨인 존슨은 ‘더 록(The Rock)’의 주연배우를 맡았다. 주요 선수들은 유튜브나 트위터 같은 SNS를 기본으로 활용한다. TV 드라마로 자신들의 세계를 그려서 알리고, 웹툰이나 만화도 주인공을 달리하면서 관심을 유지·고조하고, 다음 경기에서의 시나리오 밑밥을 까는 역할을 한다. 각각의 무대에 팬들이 참여할 공간이 열려 있다. 설사 따로 마련하지 않더라도 팬들 스스로 시나리오 판을 만들어 논다. 한국의 MZ세대도 다양한 매체에 등장하는 인물·캐릭터들의 어느 한 특징을 잡아서 그것을 중심으로 한 세계, 나름의 세계관을 만들어 즐긴다.
# 몰랐던 재능 찾는 세계관

개그우먼 김민경이 출연 프로그램에서 벌칙을 받았는데, 거기서 놀라운 괴력을 발휘한다. 하는 운동 종목마다 타고난 재능으로 코치부터 시청자까지 감탄하게 했다. 거기서 ‘메타버스’를 살짝 비튼 ‘민경버스’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그냥 하면 잘하는데, 정작 본인은 모르고 살아온 세계를 의미한다. 누구나 자신이 잘하는 분야가 있을 터인데, 사회가 정한 틀에 맞추느라 열등생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버스’가 있다. 그 희망을 민경버스에서 보며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찾는다.



# 바르게 살아보자

아침 요가를 거르지 않고, 플래너에 빡빡하게 적은 일들을 모두 실행하는 순진무구 바른 생활의 화신인 웹툰 캐릭터 본인과 그를 둘러싼 시공간의 정보들을 모아서 치밀하게 재구성해 세계관을 형성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세계관을 자신의 생활, 행동과 말투에서 스타일까지 ‘콘셉트 잡은’ 놀이를 한다. 그 후기를 공유하는데 실제 더 보람차게, 바르게 살면서 체중도 빠지고 성적도 올라갔다고 한다. 과정과 결과 또한 바른 세계관의 구성 요소가 된다. 이에 맞춰 웹툰이나 웹드라마 주인공을 따라 하는 ‘콘셉트질’의 가이드까지 캐릭터에 따라 나왔다.



# 페이크 계정 만들기

캐릭터 콘셉트질의 일종이자 정점으로 캐릭터의 페이크 SNS 계정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한다. 팬이나 작가와 캐릭터로 빙의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원래 콘텐츠의 내용을 SNS 형식에 맞춰 옮기기도 한다. 때로는 창작 방향을 먼저 제시하기까지 한다. 속임수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 거짓인 줄 알면서도 받아주고 반응하면서 즐긴다. 가짜라도 친환경적이고 보다 윤리적이라면 자부심과 함께 소비하는 ‘페이크슈머’의 특성에 익숙한 MZ세대가 캐릭터가 표방하거나 몸담은 세계관을 제대로 즐기는 방식의 하나로 실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자유·공유·경쟁의 세계관

세계관과 관련해서 ‘콘셉트충’ ‘설정충’ ‘과몰입’과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어떤 인물이나 시공간을 잡을 것인지 말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꾸밀 것인지 결정을 강요하거나 구속하지 않는다. 일단 콘셉트를 잡으면 설정에서 최대한의 디테일을 발휘하며, 과정과 결과를 공유하고, 서로 몰입 정도를 가지고 경쟁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세계관의 문이 열리기도 한다.

이제는 그들 세계관 안에 기업들이 마치 지난주 편에 언급했던 세컨드라이프에서처럼 참여하고 있다. 그때처럼 정해진 세트 안에 입점하고 로고를 보이는 형식이 아닌 자체 브랜드의 직접 노출은 최소화하며 그들만의 메타버스를 선보이려 한다. 최대한 쿨하게 ‘이렇게 정해서 노는 거야.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헐크 호건식 자세가 MZ세대의 정서에 차라리 맞다. 가만히 있으면 MZ세대가 알아서 그 바탕 위에 다른 세계관을 만들며 놀 것이다. <박재항 대학내일20대연구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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