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완결 병영칼럼

[전선애 병영칼럼] 수어<手語>, 덕분에

입력 2020. 09. 21   15:25
업데이트 2020. 09. 21   15:45
0 댓글

전선애 방송작가
전선애 방송작가


요즘 지상파 TV 뉴스를 본 사람이라면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화면 오른쪽 하단에 등장하는 작은 동그라미. 9월부터 KBS를 시작으로 MBC와 SBS까지 지상파 3사 메인 뉴스에 수어 통역이 제공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소한 뉴스만큼은 수어 통역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오랫동안 이어져 왔지만 기술적 문제 등을 이유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터였다. 산불이나 태풍같은 국가재난방송에 수어 통역이 의무가 된 것도 지난해부터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철옹성처럼 세상을 가로막았던 침묵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 2020년 9월. 내일 23일은 UN이 정한 ‘세계 수어의 날’이다.

수어(手語)는 손의 움직임을 통해 의사 소통 하는 농인(청각장애인)들의 시각 언어다. 보통 수화(手話)라고 부르곤 했는데, 2016년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되면서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언어라는 의미로 ‘수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처럼 수어가 주목을 받았던 적이 있었나 싶다. 몇 달째 매일 TV로 중계되는 코로나19 브리핑 화면에선 발표자 바로 옆에 수어 통역사가 나란히 서 있다. 그리고, 누구나 한번쯤 해보았을 그것, 왼 손바닥 위에 엄지를 치켜든 오른손 주먹을 놓는 손동작은 존경과 자부심을 뜻하는 수어다. 헌신하는 의료진의 노고에 이 수어로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덕분에 챌린지’는 전국민에게 수어의 존재를 각인시켜주었다. 얼마전 정부의 의료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펼쳐진 ‘덕분이라며 챌린지’가 비하 논란에 휩싸이면서 수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방송 입문 초기, 장애인 프로그램을 맡았던 나는 생전 처음 농인을 만났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청력을 잃은 한 여성이 교사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불굴의 의지를 담은 감동의 사연을 취재하고자 했었다. 문제는 대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막막하고 두렵기까지 했던 첫 만남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그녀는 입 모양을 보고 나의 말을 읽었고, 소리를 내어 말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그 모습이 진정한 장애 극복처럼 느껴져 마냥 들떠있던 나에게 그녀는 어려서부터 수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강요받으며 소리의 세상을 살아가도록 훈련받아야 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실제로 많은 농인이 모국어나 다름없는 수어 대신 음성언어를 배우며 살아가지만, 음성언어와 이를 기반으로 한 문자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낯선 외국어와 다름없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자신은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이라던 그녀는 ‘불쌍함’이 아닌 ‘불편함’, 그리고 그 뒤에 숨은 ‘불평등’을 놓치지 말아달라 당부했다.

수어는 단순히 말을 대신 전하는 수신호가 아니다. 음성언어와 다른 체계와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이고, 그래서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르다. 특히, 손만 사용하는 게 아니다. 코로나 브리핑 현장에서 수어 통역사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억양에 따라 의미가 다르듯 수어는 표정, 눈빛, 입모양에 따라 다른 표현이 된다. 눈을 크게 뜨거나, 찡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는 움직임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다. 서로 눈을 맞추고 표정을 살피며 상대방의 모든 것에 집중하는 언어가 수어다. 어쩌면 진정한 소통은 소리가 아니라 태도에서 시작되는 게 아닌가 싶다. 내 생각과 마음을 온전히 전하려면 상대방을 바라보고 더 깊이 집중해야 한다는 걸, 수어에서 배운다. 왼손 등 위에 오른손을 옆면으로 두 번 두드려 보자. ‘고맙다’라는 뜻이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