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윤
애국심으로 뭉친 ‘백의의 천사’…전쟁 속 희망이었다
전시 간호후보생 교육 길어야 한 달
6·25 기간 치료 부상자만 40만 명
베트남전 등 위험한 의료현장서 활약
생도대 지원·교육 등 다양한 활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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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야전병원은 또 하나의 전장이었다. 부상병들이 물밀듯 밀려들었고, 고통을 호소하는 신음과 단말마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아비규환 속에도 한줄기 따스한 빛은 있었다. 한창 꽃다운 나이에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든 ‘백의의 천사’ 간호장교들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6·25전쟁 기간 간호장교를 비롯한 의료 인력이 치료한 부상자는 무려 40만 명에 이른다. 오늘은 ‘전쟁터의 나이팅게일’로 불리는 간호장교들의 모임 ‘국군간호사관학교(국간사) 총동문회’를 만나본다.
6·25 개전 초기 부상자를 치료할 의료시설 및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육군 의료기관은 5개 육군병원과 1개 요양소뿐이었고, 의료인력은 군의관과 간호장교 250여 명, 위생병과 ‘위생하사관’은 1400여 명 수준이었다.
전시 간호후보생 교육은 길어야 한 달이었다. 10~20일의 속성훈련만 마치고 임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양성된 간호후보생은 6~11기 255명이었다. 일선 부대에서는 부대장 직권으로 민간 간호사를 뽑기도 했다.
이들 역시 간단한 교육만 마치면 즉시 현장에 투입됐다. 간호장교 군번이 없었기에 팔뚝에 ‘○○연대 간호장교’라는 글자를 적어 증명서를 대신했다고 전해진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간호장교 양성이 시급했던 1951년 3월 7일 지금의 ‘국간사’가 문을 연다. 여자의용군훈련소에서 교육 중이던 간호장교 후보생 300여 명이 입교해 총 110명이 임관했다. 6·25에 참전한 간호장교 대다수는 갓 20대를 넘긴 어린 여성들이었다. 전장의 나이팅게일, 간호장교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전쟁 기간 목숨을 잃은 군인들의 숫자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국간사 출신 간호장교들은 6·25 이후에도 베트남전을 비롯한 여러 위험한 의료현장에서 활약했다. 국가에 위기가 닥치면 어떤 위험도 감수하고 최전선으로 향하는 국방 나이팅게일의 애국심과 소명의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최근 코로나19 상황에서는 국간사 60기 신임 간호장교 75명이 졸업·임관과 동시에 국군대구병원에 투입돼 확진 환자들을 돌보며 국민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국간사 출신 간호장교들의 모임인 국간사 총동문회는 모교와 함께 굴곡진 역사를 걸어왔다. 1993년 군내 사조직 활동 금지령에 따른 위기를 겪었고, 1998년에는 모교의 폐교 검토라는 큰 시련까지 겪었다. 당시 총동문회는 ‘학교살리기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서명 운동을 펼쳤고, 이런 피나는 노력은 대한민국 정예 간호장교의 산실인 국간사 존속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국간사 총동문회는 모교 발전을 위한 기금 조성, 생도대 지원, 교육활동, 총회 개최 및 동문교류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위기 당시 총동문회는 후원금 1억 원을 조성해 대구·대전 등 전국 군 병원에 전달하며 현역 간호장교들과 함께 의료 현장으로 달려가고픈 간절한 마음을 대신하기도 했다.
국간사 총동문회 우승란 회장은 “간호장교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제일 위험한 곳에 가장 먼저 달려가고, 마지막까지 현장을 지킨다”며 “6·25 당시 국가 위기 극복을 위해 창설된 국간사의 전통을 훌륭하게 이어가고 있는 후배 간호장교들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강조했다. 황옥경 사무총장은 “6·25에 참전했던 간호장교 선배들 가운데 자신이 유공자란 사실을 잘 모르는 분이 많아 안타깝다”며 “참전하셨던 모든 선배님들이 꼭 유공자 여부를 확인하셔서 명예를 찾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인터뷰]6·25전쟁 참전 간호장교 박명자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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