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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광복’ 큰뜻 품은 태극기 15選

입력 2020. 08. 13   14:22
업데이트 2020. 08. 1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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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1883년(고종 20)에 조선의 국기로 채택된 이후 국권 상실 시기와 6·25전쟁이라는 고난의 시기를 극복하는 동안 국민들이 가슴에 품고 간직한 태극기들은 나라를 되찾고 지키는 힘이 되었다. 저마다의 태극기에 사연이 없을리 없겠지만, 남다른 애환과 큰 뜻이 담긴 적지 않은 수의 각별한 태극기들이 독립기념관 등에 기증돼 전해져 오고 있다. 이 가운데 의미가 크고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고 태극기들을 사연과 함께 소개한다. 디지털기획팀


■ 한국 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광복군 제3지대 2구대에서 활동하던 문웅명(일명 문수열)이 1945년 2월경 광복군 동료 이정수로부터 선물 받은 태극기. 

1946년 1월 문웅명이 타 부대로 이임하자 동료 대원들이 서명해 주었다. 바탕에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염원하며 결의를 다지는 글귀와 서명이 빼곡히 적혀있다. ‘완전 독립을 위하야 노력하자’, ‘국토의 방제가 되라’, ‘열열한 혁명의 투사가 되어라’, ‘백전백승’, ‘조국을 위하여 희생하자’, ‘피흘림 없는 독립은 값없는 독립이란 것을 자각하자’ 등이다. 

70여 건의 서명 중 김국주는 제17대 광복회장, 김영일은 제18대 광복회장으로 활동했다. 87.8 x 61.8cm 독립기념관 (등록문화재 제389호)


■김구(金九) 서명문 태극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1876~1949) 주석이 1941년에 중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매우사(梅雨絲, 미우스 오그) 신부에게 준 태극기이다. 

이 태극기는 옷감을 덧대 홍색의 양방과 청색의 음방, 흑색의 4괘를 재봉틀로 박음질 했고 태극문양은 세로방향으로 감싸 안는 형태이다. 바탕에는 광복군에 대한 우리 동포들의 지원을 당부한 143자의 김구 선생 친필 묵서가 쓰여져 있다. 김구 선생의 광복 의지가 생생히 담겨있는 태극기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62 x 44.3cm, 독립기념관 (등록문화재 제388호)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은 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이다. 이 태극기는 가로 189cm, 세로 142cm 크기의 마직물에 4괘와 태극문양의 음방과 양방을 오려서 정교하게 박음질했다. 벽면 부착용인 듯 묶음 줄이 있다. 그 묶음 줄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4괘는 가로 상단에 건·이괘, 가로 하단에 감·곤괘를 배치하였는데 전형적인 임시정부의 태극기 형태이다. 독립기념관 소장 (등록문화재 제395-1호)


■ 불원복(不遠復)’ 태극기 

조선 말 전남 구례 일대에서 활약한 담양 창평 출신의 의병장 고광순(1848~1907)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 상단 중앙에 ‘不遠復‘(복원복)’ 글씨를 홍색으로 수 놓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제와 싸우면서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라는 신념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의병활동의 정신적 지주로 삼은 것이다. 128 x 82cm, 독립기념관 (등록문화재 제394호)


■ 남상락(南相洛) 자수 태극기 

독립운동가 남상락(1892~1943) 선생이 1919년 4월 4일 당시 독립만세 운동 에 사용하기 위해 부인과 같이 만들었다. 전체가 손바느질로 제작된 매우 희 귀한 태극기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선생은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인산 을 참관하기 위해 서울에 상경하였다가 탑골공원의 독립만세 시위에 가담한 후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으로 내려와 동지들과 함께 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 를 벌이다 체포됐다. 1986년 10월에 후손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44 x 34cm, 독립기념관 소장 (등록문화재 제386호)


■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게양 태극기 

1942년 이승만 박사가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한국독립 만찬회를 열 때 사용했다고 알려진 태극기. 1930년대 워싱턴의 깃발 제작 회사에서 만들었다. 두꺼운 면직물에 태극문양과 4괘를 재봉틀로 정교하게 겹 박음질했고, 태극은 가늘고 긴 형 태로 맞물려 있다. 1981년 9월 재미동포 김동준씨가 이 호텔에 방문했을 때 옛 태극기 임을 알고 새 태극기와 교환 후 대한민국 국회에 기증했다. 국회 헌정기념관 소장 (등록문화재 제381호)


■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청색과 홍색의 모직 펠트를 가로 71.1, 세로 27.8cm의 크기로 가늘고 길게 연 결해 제작한 삼각형 형태의 깃발. 청색 펠트에는 ‘大韓獨立萬歲(대한독립만 세)’ 글귀가 한자로 박음질 되어 있고 홍색 펠트에는 날 염된 태극기가 부착 되 어 있다. 모양과 재질·재봉틀 솜씨·태극기의 패 등으로 보아 미국에서 광복 전(1930~4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관련 태극 기 변천사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등록문화재 제387호 )


■데니 (O.N.Denny) 태극기 

구한말 고종이 미국인 외교고문 데니(Owen Nickerson Denny, 1838~1900) 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 데니는 1886년 3월 28일 조선에 와 활동 하다 1891년 1월 22일 떠났으므로, 이 태극기는 1891년 이전에 제작됐을 것이 다. 지금까지 발견된 태극기 실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태극기 바탕은 광목 두 폭을 이어 만들었으며, 깃대에 걸(맬) 수 있도록 끈이 달렸다. 데니의 후손 (William Ralston)이 1981년 우리나라에 기증했다. 가로 262cm, 세로 182.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록문화재 제382호)


■ 배설 태극기 

배설(Ernest Bethell)이 영국기와 함께 유품으로 남긴 태극기이다. 배설의 사 망 시기인 1909년 5월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발이 고운 옥양목 바탕 에 오려 메우기 박음질 기법이 사용되었다. 배설 사망 후 그의 부인인 마리 모 드 게일(Mary Maude Gale)이 영국으로 가져갔던 것이다. 등록문화재 제483호. 신문박물관 소장


■ 태극기 목판 

태극기를 찍어내기 위해 목재에 4괘와 태극문양을 새긴 목판이다. 3·1운동 때 태극 기를 대량으로 찍어내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가로 32cm, 세로 30cm의 사각 형 형태로 6.5cm의 두꺼운 원목에, 4괘가 네 모서리까지 꽉 차게 조각되어 있 고 둘레는 약 1.8cm 너비의 테두리가 있다. 인쇄기술을 이용하기가 쉽지 않은 일제강점기에 사용되던 목판으로 매우 희귀한 자료일 뿐 아니라 당시 제작기 법과 상황을 헤아릴 수 있는 것으로서 가치가 큰 자료이다. 등록문화재 제385호. 독립기념관 소장


■ 동덕여자의숙 태극기 

1908년 동덕여자의숙 개교와 함께 교정에 게양된 태극기. 국권 피탈 이후 36년간 장롱 속 나무상자 및 땅속에 간직되다 1945년 광복 후에 동덕여자고등학교 교정에 다시 게양된 바 있다. 

6·25전쟁 때에는 조동식 교장이 태극기를 옷속에 꿰매고 괴나리봇 짐 속에 넣어 피난하는 등 소중하게 간직되어왔다. 휴전 이후에는 동덕여자고등학교 강당에 걸어 놓았다는 연혁만큼이나 세월의 흔적처럼 많이 낡았다. 그러나 여러 곳을 보수하고 또 10곳 이상을 배접하여 지금까지 보존해왔다. 태극기의 역사 속에 올올이 배어 있는 교육자의 애국과 교육정신도 함께 느껴진다. 이 일화는 초등학교 5학년 도덕교과서에 실린 적이 있다. 옷감재료나 바느질법 등에서 시대성을 볼 수 있고 사용 내력과 함께 100년 동안 학교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한 상징성이 크다. 등록문화재 제384호.


■ 명신여학교 태극기

순헌황귀비 엄씨가 1906년 5월 설립한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초기에 쓰 인 태극기. 당시로는 흔하지 않은 물감 사용 태극기라는 점, 4괘의 배치가 특 이한 점, 교육현장에서 발견된 최초의 태극기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 다. 등록문화재 제468호. 숙명여자고등학교 소장


■ 진관사 태극기

진관사 태극기는 1919년 독립운동 현장에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 90년이나 벽 속에 숨겨져 있다가 2009년 5월에 서울시 은평구 소재 진관 사(津寬寺) 칠성각(七星閣) 해체 보수과정에서 발견됐다. 사찰에서도 인적이 드문 칠성각에 비밀스럽게 숨겨놓은 점은 당시 불교계를 중심으로 벌어지던 항일운동이 얼마나 절박하게 전개됐는지를 보여준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 은 이 태극기가 일장기 위에 덧그려졌다는 점이다. 일장기를 거부하고 일본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등록문화재 제458호. 은평한옥역사박물관


■ 강릉선교장 태극기

강릉 선교장 태극기는 강릉지방 청소년들 대상으로 근대지식 보급과 인재 양성 목적으로 선교장 내에 설립한 동진학교에서 1908년경 사용되던 2개의 태극기 중 하나.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문 닫은 후 광복될 때까지 땅속에 묻어 뒀었다. 1891년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고종이 하사했거나 이강백 강릉 선 교장 관장의 증조부인 이근우 옹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등록문화재 648호.


■ 봉오동전투 태극기 

봉오동전투 당시 사용된 태극기. 바탕의 얼룩은 핏자국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기념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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