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국전쟁 70주년, 대중가요로 본 6.25전쟁

가족 잃고 홀로 떠난 피난길, 부산 갈매기도 슬피우네

입력 2020. 08. 07   16:07
업데이트 2020. 08. 07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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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953 함경도 사나이 - 손로원 작사/나화랑 작곡/손인호 노래


1·4후퇴 모티브… 흥남부두·연안 연락선 등 배경
혈혈단신으로 피난 온 남자의 설움과 그리움 담아
근현대사 대중가요계 거장 손로원이 노랫말 붙여
‘봄날은 간다’ ‘잘 있거라 부산항’ 그의 손끝서 탄생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얼마 후, 이 노래를 멜로딩한 작곡가 나화랑은 영화녹음 편집을 위해 서울에 있던 중앙청 공보과 녹음실을 방문한다. 이때 녹음 기사 한 사람이 녹음을 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손인호였다. 그때 작곡가는 그가 바로 유행가의 귀인이 될 재목감임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만들어진 노래가 <함경도 사나이>다. 이 노래는 <굳세어라 금순아>와 함께 6·25전쟁 1·4후퇴를 모티브로 만든 노래고, 1952년 발표된 <경상도 아가씨>와 함께 부산의 남포동과 동광동 용두산 공원 아래에 있는 40계단을 모티브로 한 노래다.

노랫말이 절절하다. 흥남부두 울며 찾던 눈보라 치는 그날 밤, 노래 속의 화자는 아내와 자식들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한과 설움이 맺힌 가슴을 안고 혈혈단신으로 부산으로 왔다. 갈매기도 슬피 우는 영도다리 난간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지만 하릴없음을 이내 알아차린다. <굳세어라 금순아> 속의 엄마와 딸은 잡은 손을 놓으면서, ‘부산으로 와라, 영도다리에 보름달이 뜨면 만나자’는 약속이라도 했었건만, <함경도 사나이>는 이런 공활(空豁)한 약속마저도 하지 못한 처지였으니. 노랫말 2절 남포동 동아극장은 1931년 소화관(昭和館)으로 개관해 훗날 동아극장으로 이름을 바꾼다. 


당시 부산에는 국제관(國際館), 행관(幸館), 유락관(遊樂館)이 있었지만, 연이은 화재로 폐관되자 이를 대신하여 지었던 것. 철근 콘크리트 3층 건물인 이 극장은 1946년 조선극장으로, 1949년에는 동아극장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운영하다가 1968년 폐관됐다. 이 극장의 영화 홍보 화보에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시골 풍경이 걸려 있었던 것 같다. 이 그림을 바라보면서 작사가 손로원은 고향도 아내와 자식도 잃어버리고 피란살이를 하고 있는 <함경도 사나이>의 고향을 떠올렸던 것. 덧붙여 양 떼와 송아지를 몰고 가는 전원의 풍경까지를 얽은 서정적인 노랫말이 2절의 하이라이트다. 3절은 부산항에서 여수와 통영으로 가는 연안 연락선이 모티브다. 그 배를 타고 가는 가족들을 바라보면서 이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들을 떠올린다. 


<함경도 사나이>는 1953년 휴전협정체결 이후 부산이 배경이다. 2020년 기준으로 세월은 67년이 흘러갔지만 유행가는 그 시절을 현재로 불러온다. 이것이 유행가의 묘미이고, 그 맛에 ‘내일은 미스트롯’, ‘미스터트롯’과 같은 프로그램에 10대부터 100세까지 어깨를 덩실거리는 것이다.

<함경도 사나이> 노랫말을 지을 당시 손로원은 42세였다. 1911년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손희몽·불방각·손영감·나경숙·부부린·남북평 등의 예명을 사용했으며, 우리나라 근현대사 속에서 대중가요계 불세출의 작사거장(作詞巨匠)이라 할 만하다. <물방아 도는 내력>, <봄날은 간다>, <잘 있거라 부산항>, <홍콩아가씨>,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샌프란시스코>, <페르시아 왕자>, <백마강>, <비 내리는 호남선>, <경상도 아가씨> 등등이 그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부산에서 단칸방 벽에 세계지도를 붙여 놓고 이국 정서가 가득한 노랫말을 만들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와 <병원선>은 당시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부산항에 들어온 병원선에 타고 있는 간호사를 보고 선물을 하려고 노래를 지었단다. 손로원의 성장기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정규교육을 받은 근거는 없으며, 독학으로 대중가요 작사를 익힌 것으로 본다. 그는 반야월과 함께 1950∼1960년대를 대표하는 작사가로 활동했으며, 두주불사(斗酒不辭) 주종물문(酒種不問)의 애주가로 유명했다. 사적인 삶에 관한 자료나 증언은 거의 없으며 1973년 12월 11일 향년 6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전국을 떠돌며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단다. 자유영혼의 소유자였던 집시 예술가가 그립다.

<함경도 사나이>의 작곡가 나화랑은 김천 출생이다. 본명은 조광환(1921~1983)이다. 고려성이라는 예명을 사용한 조경환(1910~1956)의 친동생으로 김천 갑부의 아들인 금수저였다. 그는 김천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중앙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고, 형 조경환의 주선으로 1942년 폴리돌레코드사에 입사해 처녀작곡 <삼각산 손님>을 신인가수 태성호가 불러 성공했다. 그는 백년설의 권유로 가수가 됐지만 작곡으로 전향해 나화랑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으며, KBS전국노래자랑 심사위원을 역임한 딩동댕아저씨 작곡가 임종수의 스승이다. 임종수는 나훈아의 <고향역>(원곡: 차창에 어린 모습)을 작곡 노트 속에서 8년 만에 잠 깨운 장본인이다.

<함경도 사나이>를 부를 당시 27세였던 손인호(본명 손효찬)는 1927년 평북 창성에서 태어나 보통학교 6학년 때 만주 창춘으로 이사를 간다. 수풍댐 건설로 고향마을이 물에 잠겼던 것. 그는 광복 후 귀국해 평양 관서콩쿠르에서 <집 없는 천사>를 불러 1등을 차지했다. 이때 가수가 되려면 남쪽으로 가라는 심사위원장의 말을 듣고 1946년 무작정 서울로 온다. 그는 <울어라 기타줄>, <해운대 엘레지> 같은 1950~1960년대를 대표하는 노래들을 히트시키며 10여 년간 정상에 있는 동안에도 방송무대에 전혀 서지 않았다. 당시 그의 신분이 공보처 공무원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본업은 영화녹음기사였으며, 가수로 약 150여 곡의 노래를 발표했지만 영화녹음기사로서는 무려 2000여 편의 녹음작업을 했다. 그의 아들 손동준도 가수다. 손인호는 77세에 한국가수협회에 가입한 가장 나이가 많은 신인가수였다. 그는 월남해 김해송의 KPK악단 가수모집에서도 1등을 한다. 6·25전쟁 중 그는 국군7사단 공작대 소속으로 위문활동을 했으며, 전쟁 후 공보처 녹음실에 입사해 대한뉴스를 담당하면서 가수활동을 했다. 그의 처남이 우리나라 영화녹음역사의 산증인 한양녹음실 책임자였던 이경순(1921~2008. 평북 창성 출생, 한양스튜디오 설립자)이다. 그는 2003년(77세)에 가수협회에 가입한 노년 신인가수였고, 영화녹음기사로 1950년대~1980년대 초까지 한양스튜디오(대표 이경순: 손인호 6세 손위 처남, 평북 창성 동향)에서 활동했으며, 2016년 향년 89세로 타계했다.

유 차 영 
한국콜마홀딩스 전무 
예비역 육군대령
유 차 영 한국콜마홀딩스 전무 예비역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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