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언제 한번’이 아닌 ‘지금 바로’
“언제 밥 한번 먹자.”
습관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약속을 실제로 지킨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터. 서로가 빈말인 것을 알고 있고 기약 없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악수하며 헤어질 때나, 전화를 그냥 끊기 뭐해서, 메일의 마지막 문장을 좀 더 그럴싸하게 끝마치려고, 우리는 ‘언제 한번’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왜 그래야만 할까?
SK텔레콤은 지난 2004년부터 2005년까지 ‘새로운 대한민국 이야기’라는 광고 캠페인을 전개했다. 기업에서는 보통 상업적 목적 때문에 광고를 하지만, 이 캠페인에서는 사회 공동의 선(善)을 환기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의 태도나 정서를 바꾸고자 했다. ‘대한민국을 새롭게 하는 이야기’ 캠페인의 첫 번째 광고인 ‘언제 한번’ 편(2004)을 보기로 하자. 이 광고에서는 “‘언제 한번’이란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라는 헤드라인 아래, ‘언제 한번’은 오지 않으니 지금 바로 시도하고 사랑을 미루지 말라고 했다. 보디카피는 다음과 같다.
“이런 약속 지켜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언제 한번 저녁이나 함께 합시다.
언제 한번 술이나 한잔 합시다.
언제 한번 차나 한잔 합시다.
언제 한번 만납시다.
언제 한번 모시겠습니다.
언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언제 한번 다시 오겠습니다.
언제 한번 연락드리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입에 붙어버린 말 ‘언제 한번’.
오늘은 또 몇 번이나 그런 인사를 하셨습니까.
악수를 하면서, 전화를 끊으면서, 메일을 끝내면서,
아내에게, 아들딸에게, 부모님께, 선생님께,
친구에게, 선배에게, 후배에게,
직장 동료에게, 거래처 파트너에게….
‘언제 한번’은 오지 않습니다.
‘오늘 저녁 약속’이 있느냐고 물어보십시오.
‘이번 주말’이 한가한지 알아보십시오.
아니, ‘지금’ 만날 수 없겠느냐고 말해보십시오.
‘사랑’과 ‘진심’이 담긴 인사라면,
‘언제 한번’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미루는 것이 아닙니다.”
이 광고는 사람들 사이에서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광고에는 화려한 그림이나 사진도 없다. 요란하게 기교를 부리지도 않았고 과장되게 포장하지도 않았다. 시종일관 소박한 느낌을 유지했다.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를 소환해 마치 편지 쓰듯 담담하게 써내려간 카피가 광고 메시지의 대부분이다. ‘언제 한번’이라는 약속을 지킨 적이 거의 없었기에 사람들은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로 다가간 것이다. 형식적인 약속의 허황됨을 꼬집은 광고 내용에 사람들이 자신의 공허한 빈말을 되돌아봤다.
기업 이미지를 알리는 광고는 보통 모호할 때가 많다.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카피라이터들도 기업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한 카피 쓰기를 가장 어려워한다. 기업이나 브랜드를 너무 내세우면 잘난 체하는 메시지가 되기 쉽고,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으면 기업과의 상관성이 전혀 없는 맨숭맨숭한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광고는 기업의 지향점을 노골적으로 표명하지 않으면서도 기업의 가치를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며들게 했다. 카피의 힘이 공감 유발의 원천이었다.
이 광고를 시작으로 SK텔레콤은 작게는 개인이 일상생활에서 놓치고 있던 소소한 잘못에서부터 크게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다양한 이야기들을 광고에 소환했다. 사소한 것들을 조금씩 고쳐나가는 노력이 ‘대한민국을 새롭게 하는 힘’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시리즈 광고들은 같은 크기, 같은 위치, 심지어 게재하는 날짜에 이르기까지 일관성을 유지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너무나 지당한 계몽적 메시지로 흐르기 쉬운 법인데, 카피라이터의 감각적인 솜씨는 상투적 계몽성을 넘어서기에 충분했다.
이 광고는 광고가 상품 판매에만 집중하지 않고 얼마든지 순기능을 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공헌 활동 혹은 사회 캠페인을 전개할 수도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새로운 대한민국 이야기’의 주제는 SK텔레콤의 사업 영역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 것들도 많았다. 그렇다면 광고비를 쓸데없이 낭비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캠페인에 많은 사람이 수긍하고 공감을 표시했다면 결국 기업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높이는 데 기여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이 광고가 나간 지 15년이 지난 지금에도 사람들의 태도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새로운 대한민국 이야기에 관한 캠페인을 다시 전개할 때가 돌아온 것 같다.
모두가 힘들어하는 시간이 지속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언제 한번’이라는 빈말을 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하겠다. 빈말은 공수표이자 기약 없는 약속이다. 10년 후 첫눈 오는 날 우체국 앞에서 만나자거나, 지금은 헤어져 있어도 언젠가는 백발이 성성해지더라도 꼭 만나자는 말에는 설렘과 기대감이라도 있다. 하지만 ‘언제 한번’은 말한 사람도 듣는 사람도 돌아서는 순간 잊어버린다.
“약속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폴레옹도 기약 없는 약속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뜻에서 이런 명언을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이 ‘언제 한번’이라며 물어보면 ‘지금 바로’ 하자고 말해보자. 그리고 상대방에게도 ‘언제 한번’이라고 묻지 말고 ‘지금 바로’ 번개로 만나자고 제안해보자. 이 또한 우리 모두에게 힘이 되는 약속일 테니까. <김병희 서원대학교
광고홍보학과 교수>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