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이탈리아의 산탄젤로 성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 영묘
5세기 교황청의 요새로 개조
전염병 퇴치 ‘천사의 성’ 유래
성 꼭대기에 미카엘 석상 우뚝
바티칸 연결하는 비밀통로 건설
전쟁 때 교황의 도피처 되기도
1930년 군사박물관으로 변모
|
|
6세기에 이르러 이곳은 교황의 성채(성과 요새)가 됐다. 590년 교황 그레고리오 1세(540?~604)가 당시 창궐하던 흑사병의 퇴치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다 대천사 미카엘이 전염병이 퇴치됐음을 선언하는 의미로 성의 상공에서 칼을 칼집에 넣는 환영을 목격하고 나서 ‘성스러운 천사’라는 뜻의 산탄젤로(Sant’Angelo)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를 기리기 위해 성의 꼭대기에 대천사 미카엘의 조각상이 세워졌다.
중세 시대에 성은 교황의 전용 피난처이자 요새, 그리고 감옥 등으로 사용됐다. 눈 속에서 맨발로 3일간 서서 사면받은 ‘카노사의 굴욕(주교를 임명하는 서임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교황과의 싸움에서 교황이 승리한 사건)’을 당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1050~1106)는 자신에게 모욕을 안긴 그레고리우스 7세(1020?~1085) 교황을 몰아내기 위해 로마를 점령했다. 이에 교황은 산탄젤로 성으로 도피했다가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거쳐 노르만 세력이 다스리던 살레르노로 망명을 떠났다. 1277년 교황 니콜라오 3세(1225?~1280)는 위험에 처했을 때 교황들이 안전하게 달아날 수 있도록 산탄젤로 성과 성 베드로 대성당을 연결하는 800m 길이의 비밀통로인 파세토(Passetto·이탈리아어로 복도라는 뜻)를 건립했다.
이탈리아 전쟁 때 파세토 통해 교황 피신
이탈리아 전쟁(1494~1559)은 이탈리아의 지배를 둘러싸고 교황령,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에스파냐 등이 8차례에 걸쳐 각축을 벌인 전쟁이다. 제1차(1494~1498) 시기인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1470~1498)가 나폴리왕국의 왕위계승권을 요구하며 로마를 침략했을 때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31~1503)가 비밀통로를 이용해 산탄젤로 성으로 도망쳤다. 당시 프랑스에 대항해 교황을 중심으로 신성로마제국, 베네치아, 밀라노, 에스파냐 등이 결탁해 대프랑스동맹을 결성했는데, 이를 발단으로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발루아 가(家) 대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가(家)의 전쟁 무대가 됐다.
교황 클레멘스 7세(1478~1534)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배후를 조종하다 양측의 분노를 일으켰다. 결국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군대가 차례로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제5차(1526~1530) 시기인 1527년 5월 6일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1500~1558)의 군대가 로마에 입성하자, 교황을 포함한 수백 명이 파세토를 통해 산탄젤로 성까지 도피했다. 교황이 도망쳤다는 사실을 안 카를 5세는 성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였다. 교황은 7개월 동안 성에 갇혔다. 신성로마제국 군은 로마를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이로써 르네상스 시대도 마감됐다. 요새와 감옥으로서 기능은 프레스코화와 대리석 장식물의 보존과 복원이 시작된 1901년에 끝났다. 성은 1930년대 초에 군사 박물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이곳의 둘레는 86m, 총 높이는 54m다. 사각형으로 둘러싸인 직경 70m, 높이 30m의 원형탑이 세워져 있으며, 내부는 홀과 주택, 중정, 감옥 등으로 구성돼 있다. 사각형의 각 모서리에는 망루가 있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전 세계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산탄젤로 성에 나타났던 대천사 미카엘이 다시 한 번 기적을 펼쳐주길 바란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