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356년 4월. 신라 16대 흘해왕이 승하했다. 임종을 지켜보던 석씨 왕실 수장들은 혼돈에 빠졌다. 누구를 용상에 앉힐 것인가. 흘해왕에게는 왕자가 없었다. 같은 시각. 박씨(시조 박혁거세 후손)·김씨(미추왕 후손) 두 왕족도 긴급 구수회동을 갖고 후사 문제를 논의했다. 촌각을 다투는 긴박한 순간, 박·김 왕족이 선수를 쳤다. 석씨 왕실을 제압하고 김씨 왕족을 즉위시킨 것이다. 『삼국사기』는 ‘흘해가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내물이 뒤를 이었다’고 기술해 놓았다.
왕조시대 임금으로 등극하는 데는 천신만고의 신고가 뒤따랐다. 시국이 수상하면 반정 세력에 의한 왕위 찬탈도 감수해야 했다. 차기 임금의 성씨가 교체됨은 정변이었다. 인명 살상이 뒤따랐고 전조(前朝)의 정책과 치적은 묵살됐다. 신라 초기 석씨 왕실은 9대 벌휴왕(재위 184~196)부터 16대 흘해왕(재위 310~356)까지 149년간(13대 미추왕 23년 제외) 유지됐다. 17대 내물마립간(이하 내물왕, 재위 356~402)이 즉위하며 경주 김씨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부각된다.
신라의 왕권 향방은 신라 왕실만의 독특한 혈연관계를 관통해야 퍼즐이 풀린다. 박·석·김 세 성씨가 왕위를 교대할 때마다 이 중 두 성씨 간의 합종연횡이 반드시 전제됐다. 세 왕족 사이 캐스팅보트는 항상 박씨가 행사했다. 내물왕 즉위에는 박·김씨가 결속했다. 내물왕 아버지 말구(김알지 7세손)는 미추왕과 형제간으로 갈문왕 구도(김알지 6세손)의 아들이었다. 내물왕은 미추왕 조카로 구도의 손자이면서 갈문왕 이칠(박씨 왕족 실권자)의 외손자였다. 『삼국사기』에는 ‘내물왕이 미추왕의 조카 겸 사위 자격으로 즉위했다’고 기록돼 있다.
정변으로 왕권을 장악하면 대의명분이 사라지고 백성들이 승복하지 않는 권력은 존립기반이 취약해진다. 흘해왕에게 왕자는 없었지만 출가한 공주와 사위가 있었다. 사위의 대통 승계는 신라 왕실의 오랜 전통이었다. 박·김씨 왕족의 야합으로 석씨 왕위를 탈취한 내물왕 지지 세력은 금상이 미추왕 사위라며 김씨 왕실의 적통임을 내세웠다. 당시 내물왕은 김씨 왕족 중에서도 왕위 계승권에서 한참 벗어난 지위에 있었다. 백성들이 성군으로 추앙하는 미추왕 사위임을 내세워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견강부회 논리였다.
『삼국사기』에도 ‘내물왕 왕비가 미추왕 딸 보반부인’이라고 기록돼 있다. 미추왕이 훙서한 해는 284년이고 내물왕이 즉위한 연도는 356년이다. 미추왕이 죽던 해 보반부인을 낳았다 해도 내물왕 즉위 때 보반부인은 72세였다. 신라 왕실 관습상 임금 나이는 왕비보다 많았다.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70대 중반 즉위한 내물왕이 47년을 재위했으니 120살을 넘게 산 셈이다. 내물왕 사망 당시 장남 눌지(19대 왕)가 어려 왕의 사촌동생 실성이 18대 왕위에 올랐다고 했다. 보반부인은 아들 셋을 출산했는데 100살 넘은 노파가 어찌 아이를 낳는가. 사학계에서는 보반부인을 미추왕의 손녀나 증손녀로 추정하고 있다.
석씨 왕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용상에 앉은 내물왕에게는 이반된 민심 회복이 급선무였다. 국가 체제를 새롭게 정비하고 정국 면모를 일신하고자 했다. 이사금으로 호칭되던 왕의 칭호를 마립간으로 교체했다. ‘마립(麻立)’은 말뚝을 뜻하며 자리를 정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간(干)’은 몽골어로 추장이나 왕을 지칭하고 임금은 마립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마립간 시기를 19대 눌지왕부터 22대 지증왕까지로, 『삼국유사』에는 17대 내물왕부터 22대 지증왕까지로 기록돼 있다. 사학계에서는 『삼국유사』의 여섯 왕 시기를 정설로 수용하고 있으며 거서간-차차웅-이사금보다 존엄성 있는 왕호로 해석하고 있다.
내물왕은 귀족들로 구성된 중앙정청회의를 친히 주재하며 명실상부한 최고 통치자로 군림했다. 독단적 외교권 행사로 신라의 생존 전략을 새로 수립했지만, 경륜 부족으로 인한 시행착오가 거듭돼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다. 주변국 정변이 발생할 때마다 일관성 없는 등거리 외교로 국격이 추락했고 백성들은 불안에 떨었다. 흘해왕 공적을 부정하고 새 업적을 달성하겠다는 성급함에서 야기된 혼란이었다.
신라를 에워싼 국제 정세도 녹록하지 않았다. 내물왕 재위기간 고구려는 4왕(16대 고국원왕, 17대 소수림왕, 18대 고국양왕, 19대 광개토왕)이 교체됐다. 백제는 5왕(13대 근초고왕, 14대 근구수왕,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17대 아신왕)이 새로 즉위했다. 중원 대륙과 왜에서도 왕권 도전세력이 도처에서 준동하며 내란으로 이어졌다. 내물왕은 초조해졌다. 왕 22년(377). 신라 사신을 고구려 사신 수행원으로 보내 전진 왕 부견(338~385)을 배알하고 굴욕적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고구려에는 사촌동생 실성(18대 왕)을 볼모로 보내 조공동맹을 자청했다. 양국 동맹에 위기를 감지한 백제·가야·왜가 3국 동맹으로 맞섰다.
내물왕 44년(399) 10월. 백제·가야·왜의 3국 동맹군이 신라를 일시에 침공했다. 고구려 광개토왕 9년, 백제 아신왕 8년, 가야 이시품왕(5대) 55년이다. 이 전쟁은 한반도 고대 국가 지형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뻔한 역사적인 싸움이었다. 육로와 해로를 통한 3국 군의 공격에 신라 국토는 초토화됐고 수도 금성이 완전 포위됐다. 3국은 신라를 멸망시킨 후 영토 분할을 밀약했다.
당시 내물왕은 70세가 넘은 노인이었다. 왕은 고구려 사신에게 무릎을 꿇고 읍소했다. 영원한 속국이 되겠으니 나라를 구해 달라고 애원했다. 『삼국사기』에도 ‘내물왕 45년(400) 왕이 타고 다니던 궁중의 말이 무릎 꿇고 눈물 흘리며 슬피 울었다’고 은유적으로 표현돼 있다. 내물왕 맹세를 확인한 광개토왕이 보병·기병 5만 병력을 급파했다. 3국 군은 지쳐 있었다. 고구려 군대가 신라 땅에 진군하기도 전 3국 군은 앞다퉈 도주했다. 고구려군은 가야에 숨어든 왜병까지 색출해 전멸시켰다. 가야·백제·고구려에 앞서 신라가 먼저 역사에서 사라질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
내물왕 재위 당시 4국은 항상 준전시 상태로 편한 날이 없었다. 혹독한 자연재앙으로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상식(相食)하는 참상 속에서도 왕들은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고구려와 백제는 한반도가 아닌 중원대륙에서 패권을 다투느라 두 나라 왕까지 전사했다. 특히 광개토왕(재위 391~413)과 아신왕(재위 392~405)은 불구대천 앙숙으로 중원대륙과 한반도 국경에서 사생결단했다. 신라와 가야는 동·서 국경을 접하고 있어 일진일퇴의 영토 전쟁을 거듭했다.
내물왕은 왕 47년(402) 2월 오욕으로 점철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조정에서는 김알지(경주 김씨 시조)가 태어난 계림 숲 옆에 왕릉(경북 경주시 교동 14·사적 제188호)을 조영했다. 자좌오향의 정남향으로 햇볕 잘 드는 너른 평원의 평지장이다. 첨성대 인근 황남동 고분군(대릉원)에 가까운 지점이다. 원형 봉토분으로 주변의 대형 고분들에 비해 작은 규모(지름 22m, 높이 5.7m)다. 봉분 기저에 자연석 일부가 노출돼 있고 호석(護石)이 둘려 있어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1994년 상석과 배례석(제주가 절하는 자리)을 설치했고 1999년 보호 철책을 둘렀다. <이규원 시인 『조선왕릉실록』 작가>
서기 356년 4월. 신라 16대 흘해왕이 승하했다. 임종을 지켜보던 석씨 왕실 수장들은 혼돈에 빠졌다. 누구를 용상에 앉힐 것인가. 흘해왕에게는 왕자가 없었다. 같은 시각. 박씨(시조 박혁거세 후손)·김씨(미추왕 후손) 두 왕족도 긴급 구수회동을 갖고 후사 문제를 논의했다. 촌각을 다투는 긴박한 순간, 박·김 왕족이 선수를 쳤다. 석씨 왕실을 제압하고 김씨 왕족을 즉위시킨 것이다. 『삼국사기』는 ‘흘해가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내물이 뒤를 이었다’고 기술해 놓았다.
왕조시대 임금으로 등극하는 데는 천신만고의 신고가 뒤따랐다. 시국이 수상하면 반정 세력에 의한 왕위 찬탈도 감수해야 했다. 차기 임금의 성씨가 교체됨은 정변이었다. 인명 살상이 뒤따랐고 전조(前朝)의 정책과 치적은 묵살됐다. 신라 초기 석씨 왕실은 9대 벌휴왕(재위 184~196)부터 16대 흘해왕(재위 310~356)까지 149년간(13대 미추왕 23년 제외) 유지됐다. 17대 내물마립간(이하 내물왕, 재위 356~402)이 즉위하며 경주 김씨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부각된다.
신라의 왕권 향방은 신라 왕실만의 독특한 혈연관계를 관통해야 퍼즐이 풀린다. 박·석·김 세 성씨가 왕위를 교대할 때마다 이 중 두 성씨 간의 합종연횡이 반드시 전제됐다. 세 왕족 사이 캐스팅보트는 항상 박씨가 행사했다. 내물왕 즉위에는 박·김씨가 결속했다. 내물왕 아버지 말구(김알지 7세손)는 미추왕과 형제간으로 갈문왕 구도(김알지 6세손)의 아들이었다. 내물왕은 미추왕 조카로 구도의 손자이면서 갈문왕 이칠(박씨 왕족 실권자)의 외손자였다. 『삼국사기』에는 ‘내물왕이 미추왕의 조카 겸 사위 자격으로 즉위했다’고 기록돼 있다.
정변으로 왕권을 장악하면 대의명분이 사라지고 백성들이 승복하지 않는 권력은 존립기반이 취약해진다. 흘해왕에게 왕자는 없었지만 출가한 공주와 사위가 있었다. 사위의 대통 승계는 신라 왕실의 오랜 전통이었다. 박·김씨 왕족의 야합으로 석씨 왕위를 탈취한 내물왕 지지 세력은 금상이 미추왕 사위라며 김씨 왕실의 적통임을 내세웠다. 당시 내물왕은 김씨 왕족 중에서도 왕위 계승권에서 한참 벗어난 지위에 있었다. 백성들이 성군으로 추앙하는 미추왕 사위임을 내세워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견강부회 논리였다.
『삼국사기』에도 ‘내물왕 왕비가 미추왕 딸 보반부인’이라고 기록돼 있다. 미추왕이 훙서한 해는 284년이고 내물왕이 즉위한 연도는 356년이다. 미추왕이 죽던 해 보반부인을 낳았다 해도 내물왕 즉위 때 보반부인은 72세였다. 신라 왕실 관습상 임금 나이는 왕비보다 많았다.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70대 중반 즉위한 내물왕이 47년을 재위했으니 120살을 넘게 산 셈이다. 내물왕 사망 당시 장남 눌지(19대 왕)가 어려 왕의 사촌동생 실성이 18대 왕위에 올랐다고 했다. 보반부인은 아들 셋을 출산했는데 100살 넘은 노파가 어찌 아이를 낳는가. 사학계에서는 보반부인을 미추왕의 손녀나 증손녀로 추정하고 있다.
석씨 왕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용상에 앉은 내물왕에게는 이반된 민심 회복이 급선무였다. 국가 체제를 새롭게 정비하고 정국 면모를 일신하고자 했다. 이사금으로 호칭되던 왕의 칭호를 마립간으로 교체했다. ‘마립(麻立)’은 말뚝을 뜻하며 자리를 정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간(干)’은 몽골어로 추장이나 왕을 지칭하고 임금은 마립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마립간 시기를 19대 눌지왕부터 22대 지증왕까지로, 『삼국유사』에는 17대 내물왕부터 22대 지증왕까지로 기록돼 있다. 사학계에서는 『삼국유사』의 여섯 왕 시기를 정설로 수용하고 있으며 거서간-차차웅-이사금보다 존엄성 있는 왕호로 해석하고 있다.
내물왕은 귀족들로 구성된 중앙정청회의를 친히 주재하며 명실상부한 최고 통치자로 군림했다. 독단적 외교권 행사로 신라의 생존 전략을 새로 수립했지만, 경륜 부족으로 인한 시행착오가 거듭돼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다. 주변국 정변이 발생할 때마다 일관성 없는 등거리 외교로 국격이 추락했고 백성들은 불안에 떨었다. 흘해왕 공적을 부정하고 새 업적을 달성하겠다는 성급함에서 야기된 혼란이었다.
신라를 에워싼 국제 정세도 녹록하지 않았다. 내물왕 재위기간 고구려는 4왕(16대 고국원왕, 17대 소수림왕, 18대 고국양왕, 19대 광개토왕)이 교체됐다. 백제는 5왕(13대 근초고왕, 14대 근구수왕,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17대 아신왕)이 새로 즉위했다. 중원 대륙과 왜에서도 왕권 도전세력이 도처에서 준동하며 내란으로 이어졌다. 내물왕은 초조해졌다. 왕 22년(377). 신라 사신을 고구려 사신 수행원으로 보내 전진 왕 부견(338~385)을 배알하고 굴욕적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고구려에는 사촌동생 실성(18대 왕)을 볼모로 보내 조공동맹을 자청했다. 양국 동맹에 위기를 감지한 백제·가야·왜가 3국 동맹으로 맞섰다.
내물왕 44년(399) 10월. 백제·가야·왜의 3국 동맹군이 신라를 일시에 침공했다. 고구려 광개토왕 9년, 백제 아신왕 8년, 가야 이시품왕(5대) 55년이다. 이 전쟁은 한반도 고대 국가 지형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뻔한 역사적인 싸움이었다. 육로와 해로를 통한 3국 군의 공격에 신라 국토는 초토화됐고 수도 금성이 완전 포위됐다. 3국은 신라를 멸망시킨 후 영토 분할을 밀약했다.
당시 내물왕은 70세가 넘은 노인이었다. 왕은 고구려 사신에게 무릎을 꿇고 읍소했다. 영원한 속국이 되겠으니 나라를 구해 달라고 애원했다. 『삼국사기』에도 ‘내물왕 45년(400) 왕이 타고 다니던 궁중의 말이 무릎 꿇고 눈물 흘리며 슬피 울었다’고 은유적으로 표현돼 있다. 내물왕 맹세를 확인한 광개토왕이 보병·기병 5만 병력을 급파했다. 3국 군은 지쳐 있었다. 고구려 군대가 신라 땅에 진군하기도 전 3국 군은 앞다퉈 도주했다. 고구려군은 가야에 숨어든 왜병까지 색출해 전멸시켰다. 가야·백제·고구려에 앞서 신라가 먼저 역사에서 사라질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
내물왕 재위 당시 4국은 항상 준전시 상태로 편한 날이 없었다. 혹독한 자연재앙으로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상식(相食)하는 참상 속에서도 왕들은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고구려와 백제는 한반도가 아닌 중원대륙에서 패권을 다투느라 두 나라 왕까지 전사했다. 특히 광개토왕(재위 391~413)과 아신왕(재위 392~405)은 불구대천 앙숙으로 중원대륙과 한반도 국경에서 사생결단했다. 신라와 가야는 동·서 국경을 접하고 있어 일진일퇴의 영토 전쟁을 거듭했다.
내물왕은 왕 47년(402) 2월 오욕으로 점철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조정에서는 김알지(경주 김씨 시조)가 태어난 계림 숲 옆에 왕릉(경북 경주시 교동 14·사적 제188호)을 조영했다. 자좌오향의 정남향으로 햇볕 잘 드는 너른 평원의 평지장이다. 첨성대 인근 황남동 고분군(대릉원)에 가까운 지점이다. 원형 봉토분으로 주변의 대형 고분들에 비해 작은 규모(지름 22m, 높이 5.7m)다. 봉분 기저에 자연석 일부가 노출돼 있고 호석(護石)이 둘려 있어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1994년 상석과 배례석(제주가 절하는 자리)을 설치했고 1999년 보호 철책을 둘렀다. <이규원 시인 『조선왕릉실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