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연합군 34만 명 구하라…세기의 구출 작전 여기 지하 방에서 탄생했다

입력 2020. 07. 17   17:35
업데이트 2020. 07. 1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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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영국의 도버성


도버해협 절벽에 지어진 요새
2차대전 영국군 사령부로 사용
덩케르크 연합군 철수작전 추진
지하 해군 지휘소 방 이름 따서
작전암호명 ‘다이나모’로 명명


 현재 도버성에 남아있는 대공포.   사진=픽사베이
현재 도버성에 남아있는 대공포. 사진=픽사베이
도버성 지하터널. 
사진=www.inparkmagazine.com
도버성 지하터널. 사진=www.inparkmagazine.com
1940년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진행된 덩케르크 철수 작전. 
 사진=www.worldwar2facts.org
1940년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진행된 덩케르크 철수 작전. 사진=www.worldwar2facts.org

영국 동남단에 있는 도버는 ‘영국을 여는 열쇠’로 불리는 도버해협에 면하여 있는 항구도시다. 영국이 로마의 지배를 받던 1세기경부터 영국과 유럽 대륙을 잇는 주요 관문 역할을 해왔다. 이곳에는 해발 114m 높이의 석회암 절벽 위에 1066년 정복왕 윌리엄이 요새로 짓고 1188년 헨리 2세가 석조로 개축한 도버성(Dover Castle)이 있다. 이 성이 전쟁사에서 큰 활약을 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1940년 독일군의 전격전(電擊戰·신속한 기동과 기습으로 일거에 적진을 돌파하는 기동작전)으로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영국군과 프랑스군·벨기에군 등 33만8000명을 영국 본토로 이송하기 위한 다이나모 작전이 도버성 지하에 있는 해군 지휘소에서 펼쳐졌다. 2007년까지 도버성에는 군용 막사가 남아 있었고, 해안을 바라보는 성벽에는 제1·2차 세계대전 당시 쓰였던 대공포대가 바다 건너 프랑스를 향해 있다.


1066년 정복왕 윌리엄에 의해 건설

도버(Dover)라는 지명은 지역을 통과하는 도어 강(River Dour)에서 유래했다. ‘참회왕’이라 불리는 에드워드(1003~1066)가 1066년 1월 5일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왕위를 둘러싼 전쟁이 벌어졌다. 노르망디 공국의 정복왕 윌리엄(1028~1087)이 그해 10월 14일 영국 남동부 헤이스팅스에서 해럴드의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하면서 노르만 왕조가 성립됐다. 그 후 윌리엄은 부대를 이끌고 대관식을 위해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진군하던 도중 도버를 점령하고 교회가 지어졌던 부지 옆에 새로운 요새를 지은 것이 도버성의 시초다.

영국의 국가적 기초를 마련한 플랜태저넷 왕조를 세운 헨리 2세(1133~1189)가 왕국의 수비를 재편성할 때, 도버성은 1179년부터 1188년까지 대대적으로 석조로 개축된다. 헨리 2세는 기술자 모리스를 임명해 성의 내외부를 비롯한 그레이트 타워를 건립했다. 그레이트 타워는 왕의 방과 손님방, 연회실, 예배실, 부엌 등으로 구성됐다.


1216년 제1차 남작전쟁 때 佛 포위 막아내

도버성을 무대로 한 첫 번째 전쟁은 제1차 남작전쟁(1215~1217)이다. 1216년 프랑스 왕자 루이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존 왕(1166~1216)에게서 왕위를 뺏기 위해 영국을 침공한다. 존 왕은 성 안에서 반란 귀족과 프랑스 침입자 군대와 맞섰다. 프랑스군은 도버성을 10배가 넘는 병력으로 땅굴 공격까지 동원해 여러 차례 공략에 나섰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 뒤로 도버성은 주요한 군사적 거점으로 떠올랐다.

18세기 말에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을 전쟁터로 만들자 영국은 1793년부터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했다. 도버성은 전쟁 대비로 1794년부터 1795년까지 대규모로 재건됐다. 하지만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격파하면서 나폴레옹은 더 이상 도버해협을 넘보지 못했고 도버성은 별다른 활약을 할 필요가 없었다.


연합군 구출 작전 펼친 다이나모 룸

도버성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덩케르크 철수를 실행한 다이나모 작전의 사령부로 쓰이면서 전쟁사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1940년 5월 독일은 대부분의 기갑부대를 아르덴 숲에 투입하는 낫질(Sichelschnitt) 작전을 펼치며, 이곳에 소수의 방어 병력만 배치하고 주력을 벨기에 북쪽에 집결시킨 프랑스의 급소를 찔렀다. 독일의 기갑사단은 프랑스 방어선을 돌파하고 5월 14일과 15일 뮤즈강을 건넌 다음에 그대로 영국 해협을 향해 서쪽으로 밀고 나갔다. 독일군은 5월 19일 아브빌 서쪽 해안을 확보한 뒤 영국 원정군과 프랑스·벨기에 연합군을 포위했다. 35만여 명의 연합군은 퇴로를 차단당한 채 덩케르크(프랑스 북부의 항구 도시) 해안에 고립돼 그대로 전멸 위기에 내몰렸다.

이때 영국군과 연합군 구출 작전이 도버성에서 펼쳐졌다. 영국군 해군 제독 버트럼 홈 램지(1883~1945) 경은 도버성 지하의 해군 지휘소 중 발전기가 있던 다이나모 룸에서 수상 윈스턴 처칠에게 영국군 구출 작전에 대한 개요를 설명했다. 처칠은 이 작전을 승인했는데, 연합군의 작전명인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은 이 방 이름에서 유래됐다.


덩케르크 철수로 33만8000명 병력 구해

900여 척의 선박을 동원하며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진행된 덩케르크 철수 작전으로 영국군 22만6000명과 프랑스·벨기에 연합군 11만2000명 등 33만8000명의 병력이 무사히 도버 해안으로 철수한다. 이는 다시 독일군을 반격할 수 있는 큰 힘이 됐다. 전쟁 중에 독일군의 폭격으로 도버 일대는 불바다가 됐지만 도버성은 화를 모두 면했다. 도버성이 파괴되지 않은 것은 이 성이 전략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독일군이 일부러 폭격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 이후 1980년대까지 도버성의 지하 터널은 핵 전쟁이 발발할 경우 영국 지방 정부의 피란처로 사용될 수 있도록 설비됐다. 2001년부터 도버성의 지하 터널이 일반에 공개됐다. 잉글리시 헤리티지(영국의 역사적 건축물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 정부에 의해 설립된 단체)는 지난 2007년과 2009년 사이 성 내부를 수리하는 데 254만 파운드(38억3943만여 원)를 사용했다. 천년의 세월을 견뎌낸 도버성은 오랜 전쟁을 마감하고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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