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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단체 릴레이 탐방] ⑫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

최한영

입력 2020. 07. 15   17:09
업데이트 2023. 08. 17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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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방어선 최후 보루… 55일 사투 끝 지켜내”


328고지 주인 아홉 번 바뀔 정도 치열 
150명 중대원 한 번 전투에 50명 전사
빈 자리 학도병 등 보충병 메꾸며 싸워
다부동서 이겼기에 인천상륙작전 가능
함께 싸운 전우·미군 희생 꼭 기억해야


지난해 10월 경북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열린 구국영령추모제 후 백선엽(앞줄 가운데) 장군, 박형수(앞줄 오른쪽 둘째)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장 등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다부동전적기념관
지난해 10월 경북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열린 구국영령추모제 후 백선엽(앞줄 가운데) 장군, 박형수(앞줄 오른쪽 둘째)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장 등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다부동전적기념관

 

 

경북 칠곡 다부동지구전적비 기념관 전경. 사진=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
경북 칠곡 다부동지구전적비 기념관 전경. 사진=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


6·25전쟁 발발 한 달여 만인 1950년 7월 말, 북한군은 우리 국토의 92%를 수중에 넣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월턴 워커(Walton H. Walker) 중장은 이른바 ‘워커 라인(낙동강방어선)’을 최후 저지선으로 설정하고 국군과 유엔군에 ‘무조건 사수’를 명령했다. 워커 라인이 뚫리면 대구는 물론 부산도 지척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반면 북한군은 “올해 8·15 행사를 대구에서 열겠다”며 자신만만했고, 대구 북방 22㎞ 지점 요충지인 다부동에 화력을 집중했다. 

 
뺏고 뺏기는 고지전 


낙동강방어선을 사수하기 위한 최후 보루였던 다부동을 놓고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간 벌어진 다부동전투는 그렇게 시작됐다.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 박형수(예비역 육군대령·육군사관학교 7기) 회장은 육군1사단 15연대 1대대 3중대장(대위)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박 회장은 국방일보와 인터뷰하면서 “다부동이 넘어갔다면, 대구가 단숨에 돌파당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 없어질 수도 있었다”고 단언했다.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에 따르면 55일간의 전투에서 아군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전차를 앞세운 적 3개 사단의 공격은 매서웠다. 다부동전투 중에서도 328고지를 놓고 8월 12일부터 24일까지 이어진 공방전은 주인이 아홉 차례나 바뀔 정도로 치열했다.

“미군 폭격이 끝난 12일 오후 1시, 대대 소속 1·2·3중대가 공격을 시작했다. 상부에서는 폭격으로 북한군이 다 죽었다고 판단했지만, 논바닥을 건너던 1중대와 2중대에 집중사격이 쏟아져 (두 중대가) 사실상 전멸했다. 육사 동기였던 2중대장도 그때 전사했다. 어쩔 수 없이 후퇴한 다음 13일 재차 폭격을 거쳐 14일에 공격, 고지를 점령했지만, 밤이 되자 북한군이 올라와 다시 밀렸다.”

고지를 뺏고 뺏기는 과정에서 병력 손실은 불가피했다. 박 회장이 전한 구체적인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참혹했다. “중대 병력이 150여 명인데, 한번 전투가 벌어지면 50명은 전사하고 50명은 다쳤다. 남은 자리는 학도병 등의 보충병으로 메꿨다. 보충병 중 하루 교육받고 투입된 사람도 있었는데, M1 소총에 탄약을 장전하는 것도 익숙지 않았다. 장교와 하(부)사관들이 이들을 오가며 탄약을 장전해주다가 전사했다.” 수암산(518고지), 유학산(839고지) 등을 놓고 벌어진 고지전에서도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북한군 8월 공세 저지 북진 가능

하지만 다부동에서 국군의 혈투는 헛되지 않았다. 북한군은 다부동전투에서 전·사상자 1만7500여 명, 전차 손실 30대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박 회장은 “다부동전투에서 이겼기에 북한군의 8월 공세를 저지할 수 있었으며, 이후 북진과 평양 입성도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다부동전투를 발판 삼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도 가능했다고도 설명했다.

국군 못지않게 미군의 역할도 컸다. 박 회장은 다부동전투, 나아가 6·25전쟁 과정에서 미군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다부동전투에서 미1기병사단·미24사단이 국군과 합동작전을 펴 북한군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6·25전쟁 발발 다음 해인 1951년 미 보병학교로 유학을 떠났던 박 회장은 미국 도착 직후 ‘이곳은 낙원이구나’라는 생각을 절로 했다고 한다.

박 회장은 “당시 미군들에게 물어보니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며 “제임스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 아들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실종된 지미 밴플리트 공군중위 등 한국에서 사망·실종된 미군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른 역사관 가져야


다부동전투는 지난 10일 별세한 고(故) 백선엽 장군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도 빠질 수 없다. 6·25전쟁 발발 당시 육군1사단장이었던 백 장군은 다부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백 장군이 “후퇴하면 나라가 망한다. 내가 선두에 설 테니 후퇴하면 나를 쏘라”며 물러서려던 장병들을 설득한 일화는 유명하다.

박 회장은 지난해 10월 다부동전투구국영령추모제에 고인이 참석한 사진을 보여주며 “백 장군이 ‘휠체어를 타고 가서라도 전사한 전우들의 영혼을 달래고, 살아있는 전우들을 격려하기 위해 (추모제에) 마지막으로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편 박 회장은 인터뷰 내내 “다시는 이 땅에서 6·25전쟁과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젊은 세대들이 바른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평균 연령 90세인 구국용사회 회원들이 이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노병(老兵)들의 노력이 꽃을 피울지 지켜볼 일이다. 

최한영 기자 < visionchy@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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