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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력으로 독립 쟁취” 원대한 꿈 펼친 곳

조아미

입력 2020. 07. 14   17:14
업데이트 2020. 07. 14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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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로우스 한인 비행학교는?


노백린 장군·김종림 애국지사 주축
‘조국독립 열망’ 청년들 뭉쳐 개교
재정 지원 어려워져 1년 만에 좌절
출신 훈련생들 독립운동 이어나가
‘비행장교 1호’ 박희성·이용근 등 활약 


윌로우스 비행학교 학생들이 J-1 훈련기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제공=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
윌로우스 비행학교 학생들이 J-1 훈련기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제공=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
윌로우스 비행학교의 미국인 교관 브라이언트(앞줄)와 학생들.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 제공
윌로우스 비행학교의 미국인 교관 브라이언트(앞줄)와 학생들.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 제공
박희성 참위가 국제항공연맹으로부터 받은 비행사 자격증.  독립기념관 제공
박희성 참위가 국제항공연맹으로부터 받은 비행사 자격증. 독립기념관 제공

1920년 7월 5일 美 윌로우스에 창설

1920년 7월 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북부에 위치한 작은 농촌도시인 윌로우스시(市)에 창설됐던 한인 비행학교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비행대 편성 방침을 세웠다. 임시정부 군무총장인 노백린 장군은 공군력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비행대를 창설할 계획을 세웠다. 노 장군은 비행학교 운영을 위해 훈련을 지도할 교관을 초빙하고자 1920년 2월 5일 미국에서도 가장 권위 있었던 캘리포니아의 레드우드(Redwood) 비행학교를 답사했다.

1920년 3월 드디어 윌로우스 비행학교가 임시로 문을 열었다.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취지를 이해한 레드우드 비행학교 교관 출신인 미국인 프랭크 브라이언트가 수석 교관으로 합류했고 정비사 2명도 채용됐다.

비행학교 훈련생들은 주로 이민 1.5세대들이었다. 정비사를 비롯해 학생, 전도사, 실업가 등의 직업을 가진 청년들이었다.

같은 해 6월 22일 J-1 훈련기가 윌로우스 비행학교에 도착하고, 이틀 후 두 번째 비행기가 도착했다. 훈련생, 교관, 비행기 등이 준비되자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1920년 7월 5일 24명의 학생으로 공식 개교했다.

개교식 행사에는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재정지원 김종림, 비행학교 감독 곽임대, 조종사 오림하 외에도 재미 동포 200여 명과 미국인 비행교관 브라이언트가 참석했다.

비행학교에서 가르친 교과과목은 군사학, 비행훈련, 무선전신학, 비행기수선학(정비), 영어, 민족교육 등이었다. 이어 7월 7일 제1회 졸업식이 열렸다. 레드우드 학교에서 훈련 경험이 있던 우병옥, 오림하, 이용식, 이초 등 4명이 첫 졸업생이 됐다. 이들은 졸업과 동시에 비행학교의 훈련 교관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비행학교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 안타깝게 문을 닫게 된다.

비행학교 운영비의 대부분을 지원하던 김종림 애국지사의 농장이 1920년 10월 대홍수의 피해를 입으면서 재정지원이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아울러 비행학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한인 동포들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쌀 특수가 사라지고 대홍수 등의 피해를 입으며 경제적 여력이 사라졌다. 북미지방총회에서는 윌로우스 비행학교에 대한 지원을 협조하기로 결의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결국 당초 계획했던 2년간의 교육일정을 못 채우고,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1921년 4월 1년의 짧은 역사를 뒤로 한 채 폐교했다.

훈련생 중 일부는 생업을 위해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민간인 자격으로 독립운동을 하거나 미군이나 중국군에 들어가 항일투쟁을 이어나갔다. 그중 박희성은 1921년 5월 22일 새크라멘토 비행장에서 조종사 자격증 시험을 치른 뒤 합격해 7월 7일 국제항공연맹(FAI)으로부터 비행사 자격증을 받았다. 이용근도 박희성과 같은 날 비행사 자격증을 받았다. 이들이 파일럿이 됐다는 보고를 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즉시 이들을 장교로 임명했다. 그리고 1921년 7월 18일, 두 조종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육군 비행병참위(현 소위)’에 임관해 비행장교 1호로 탄생했다. 또한 윌로우스 비행학교 출신 이초는 미국전략첩보국 소속으로 한반도 침투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공군은 “윌로우스 비행학교에는 항공력을 바탕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임시정부의 원대한 구상이 담겨있다”면서 “공군은 윌로우스 한인 비행학교의 위대한 첫걸음을 기억하고, 항공독립운동가들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진취적인 도전정신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윌로우스 비행학교 터는 현재 미 연방 사적지(미국역사기념물)로 지정해서 보존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비행학교 설립의 숨은 조력자들


노 장군이 구상하던 비행학교가 구체적으로 실현되기까지는 당시 재미 한인 사회에서 ‘라이스 킹(Rice King)’ ‘백미대왕(白米大王)’이라 불렸던 김종림 애국지사의 역할이 컸다. 그는 1906년 하와이로 이민한 뒤 1909년 다시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시작한 쌀농사를 크게 성공시켜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더군다나 김 애국지사는 재미 한인 재력가에 머물지 않고 1913년 안창호 선생이 만든 ‘흥사단’에서 8도 대표 중 함경도 대표를 맡을 정도로 독립운동에도 열정을 쏟았다.

노 장군의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 계획을 들은 김 애국지사는 당시 5만 달러, 현재 가치로 약 110억여 원의 거금을 쾌척하고 자신의 농장 중 40에이커(약 4만9000평) 규모의 땅을 비행훈련장으로 제공했다. 연습용 비행기 3대를 구입하고, 활주로 건설과 훈련생을 위한 막사 설치, 교관 봉급 등 학교를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 대부분이 김 애국지사 지원으로 이뤄졌다. 또한, 비행학교 훈련생들에게는 약 150달러의 학비가 부과됐는데 김 애국지사는 훈련생들에게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도록 하고, 거기서 받은 임금으로 자연스럽게 학비를 낼 수 있도록 해줬다. 김 애국지사의 농장이 홍수로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재정 지원이 어려워지자 오래지 않아 비행학교가 문을 닫을 정도로 김 애국지사의 지원은 비행학교 운영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규모 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김 애국지사 이외에 윌로우스에 거주하던 한인들의 지원도 적지 않았다. 대한인국민회, 윌로우스 애국부인회 등이 비행학교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대한인국민회는 윌로우스 비행학교에 매달 600달러씩 보조했다. 이처럼 비행학교 창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들이 40여 명에 달한다. 그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거나 상회를 운영하던 실업가들로 조국 독립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물질적,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아미 기자

참고=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국립항공박물관

조아미 기자 < joajoa@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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