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군인들의 안식처 국가 자부심, 그 자체

입력 2020. 07. 10   17:11
업데이트 2020. 07. 12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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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프랑스의 앵발리드


17세기 퇴역군인 요양소로 건립
국립묘지로 사용했던 나폴레옹도
사후 1861년 돔 성당에 유해 안치
히틀러 방문해 묘소 둘러보기도
현재는 군사박물관으로 탈바꿈
무기·미술품 등 50만 점 고스란히

앵발리드 전경. 사진=www.lebailliparis.com
앵발리드 전경. 사진=www.lebailliparis.com
파리 센강의 알렉상드르 3세 다리 남쪽에 있는 앵발리드(Invalides)는 ‘상이용사’, ‘부상병’이라는 뜻으로 프랑스의 군사적 업적을 가진 위인들을 위한 묘지이자 예배당인 돔 성당, 생 루이 성당, 군사박물관, 전쟁박물관, 정원, 명예의 뜰 등으로 구성된 바로크풍 건축물이다. 이곳은 17세기에 루이 14세의 명으로 부상병과 퇴역 군인들의 요양소로 지어졌다. 돔 성당의 지하에는 나폴레옹과 그의 친족, 프랑스의 유명한 장군의 묘가 놓여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를 점령한 독일의 히틀러가 이곳을 방문해 나폴레옹의 묘를 응시했던 일화가 전해진다. 이곳에서 나폴레옹이 1804년 7월 15일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 훈장의 공식 서훈식을 거행한 이후 프랑스 최고국가훈장식이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1670년 루이 14세의 명으로 건설

‘태양왕’으로 불리며 절대왕정을 이룩한 루이 14세(1638~1715)가 30년 동안 벌인 긴 전쟁으로 프랑스에서는 상이용사들이 몰려다니며 절도와 강도짓을 벌이고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면서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된다.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던 루이 14세는 전제군주를 위해 전쟁에 나서 피를 흘린 군인들이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왕실이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궁정 건축가 리베랄 브뤼앙(1637~1697)에게 1670년 11월 24일 군인들을 위한 주택과 요양원을 짓도록 한다. 4년의 공사 끝에 1674년 4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앵발리드가 완공돼, 상이군인과 퇴역군인들이 머무르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앵발리드에서 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인 태피스트리 직조 기법을 배우거나 구두 수선, 채색술 등을 연마했다.


앵발리드 무기 탈취해 바스티유 습격

수많은 전쟁으로 국고를 바닥낸 루이 14세로 인해 프랑스 왕실은 만성적인 재정 악화를 겪었으며, 루이 16세(1754~1793)가 미국독립혁명을 지원한 군사비로 인해 재정 궁핍으로 이어져 결국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1789년 7월 13일 파리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시민들은 무기를 찾아 나섰다. 다음 날인 7월 14일 이들은 앵발리드의 무기고를 습격해 3만2000정의 소총과 20문의 대포를 탈취한 다음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해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리고 프랑스를 뒤바꾼 시민혁명으로 급부상한 인물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 나폴레옹이 1800년 9월 프랑스 군사 역사상 단 6명만 임명된 프랑스 대원수이자 국민적 영웅인 튀렌(1611~1675) 자작의 유해를 돔 성당으로 옮겨 안치하라는 명령을 내린 이후, 앵발리드는 국립묘지로 쓰이기 시작했다. 1804년 황제로 오른 나폴레옹은 참모들을 대동하고 수시로 앵발리드를 방문해 옛 전우들을 보살폈다. 황제는 1811년 5월 25일 앵발리드에 600만 프랑(현재 76억5924만 원)의 예산을 승인했다.

1940년 6월 28일 새벽 5시30분 비행기로 파리에 도착한 히틀러(왼쪽 넷째 흰색 코트를 입은 인물)는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를 비롯한 수행원들과 점령지 파리 투어에 나섰다. 히틀러는 앵발리드를 방문해 자신이 존경한 인물인 나폴레옹의 묘를 말없이 바라봤다. 사진=www.iconichistoricalphotos.com
1940년 6월 28일 새벽 5시30분 비행기로 파리에 도착한 히틀러(왼쪽 넷째 흰색 코트를 입은 인물)는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를 비롯한 수행원들과 점령지 파리 투어에 나섰다. 히틀러는 앵발리드를 방문해 자신이 존경한 인물인 나폴레옹의 묘를 말없이 바라봤다. 사진=www.iconichistoricalphotos.com


프랑스 國歌 작곡가·군인 등 영웅 안장

잘 알려져 있듯이 나폴레옹은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에 대패한 후, 이듬해 아프리카 남서쪽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된다. 황제는 1821년 52세의 나이로 쓸쓸히 눈을 감는다. 나폴레옹 1세의 시신은 프랑스의 마지막 왕인 루이 필리프(1773~1850)가 영국과 벌인 8년간의 협상 끝에 1840년 12월 15일 19년 만에 파리로 돌아와 개선문을 지나고 생제롬 성당에 안치됐다. 그 후 21년 후인 1861년 4월 12일 6겹의 관에 쌓인 나폴레옹의 시신은 마지막으로 붉은색 대리석 관에 넣어져 앵발리드 돔 성당의 지하에 안치됐다. 또 프랑스의 국가(國歌)인 ‘라마르세예즈’의 작곡가이자 군인인 루제 드 릴(1760~1836)의 유해도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앵발리드로 이장됐다.


히틀러 지시로 나폴레옹2세 유해 이장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프랑스는 개전 6주 만에 독일에 점령당해 1940년 6월 22일 프랑스와 독일의 종전 협상이 체결됐다. 6월 28일 히틀러는 점령지 파리 투어에 나서 앵발리드를 방문해 자신이 존경한 인물인 나폴레옹의 묘를 말없이 바라봤다. 같은 해 12월 15일 히틀러는 나폴레옹의 아들인 나폴레옹 2세(1811~1832)의 유해를 앵발리드로 옮길 것을 명령했다. 나폴레옹 2세는 다음 날 자정 오스트리아 빈에서 옮겨져 그의 아버지 곁에 묻히게 됐다. 히틀러는 훗날 독일 장군들에게 “나는 나폴레옹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독소전쟁(1941~1945)을 치르고 결국 패하면서 나폴레옹보다 더한 운명을 맞이했다.

앵발리드는 머무는 군인들의 숫자가 점차 줄면서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포병박물관은 1871년에 설립됐으며, 군사박물관은 1905년 포병 박물관과 군사역사박물관을 통합해 설립됐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기와 군사 관련 미술품, 장식품 등 50만 점이 넘는 소장품이 전시돼 있다. 오늘날 앵발리드는 국가 원수나 주요 군인이 사망하면 국장이나 조문을 거행하는 장소로 사용된다. 현재 100명 정도의 퇴역군인이 이곳에서 요양 생활을 하고 있다. 앵발리드는 프랑스의 군사적 자부심이자 상징으로 밝게 빛나고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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