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병영의창

1950년 7월, 죽미령의 영웅들을 생각하며

입력 2020. 07. 09   16:58
업데이트 2020. 07. 0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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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준  소령 육군본부 지상군페스티벌 행사기획단
문상준 소령 육군본부 지상군페스티벌 행사기획단

올해는 6·25전쟁 70주년이다. 6·25전쟁에서 유명한 전투로는 춘천지구전투, 다부동전투 등을 꼽을 수 있지만 1950년 7월 오산에서 미군이 북한군과 처음 접촉한 죽미령전투도 빼놓을 수 없다.

어떤 사료는 죽미령전투를 북한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한 탓에 미군이 진지를 포기하고 후퇴한 전투라고 기술하고 있기도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대대장을 포함한 부대 전 장병은 불비한 여건에서도 최선을 다해 전투를 수행했으며 피아 전투피해나 전투가 달성한 효과를 고려하면 죽미령전투는 미군이 진지에서 철수했다는 이유만으로 전술적 실패로 간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북한은 6월 25일 일요일을 기해 기습남침해 왔고 우리 군은 육탄으로 적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고전을 거듭했다.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전선을 시찰한 후 북한의 공격을 저지해 후속부대 투입의 여건을 조성해 줄 연대전투단 규모의 부대를 ‘소방수’로 긴급 투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맥아더 장군의 제안은 미 합참에 받아들여졌고, 일본에서 감편된 상태로 임무를 수행하던 미 8군과 24사단은 전선에 투입할 연대전투단을 구성하기 어려워 기간병력으로 편성된 1개 보병대대와 105mm 1개 포대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이하 스미스 부대)라는 이름으로 전장에 긴급 투입한다.

스미스 부대는 대대 규모로는 버거운 임무를 수행했고, 대대장은 적에 대한 정보와 명확한 명령도 부여받지 못한 악조건에서 전투에 임했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전투피해를 산술적으로 비교하면 스미스 부대의 일방적 전술적 패배라고 보기 어렵고 비슷한 수준이다.

오히려 전차가 없었던 스미스 부대가 적 전차를 파괴한 것을 고려하면 북한군에 더 큰 피해를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철수한 후에는 24사단의 일부로서 후속 전투에 계속 참여해 재차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북한군의 남하 속도도 죽미령전투 이전과 비교했을 때 현저히 느려졌다. 나중에 낙동강 전선에서 포로가 된 북한군 이학구 총좌가 ‘미군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 것을 보면 죽미령전투는 북한군에게 무시할 수 없는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죽미령전투는 귀한 시간을 획득하여 상급부대 목적 달성에 기여한 전투로 평가돼야 할 것이다.

나는 며칠 전 죽미령전투 현장에 있는 유엔군초전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 옆 스미스 부대가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던 고지에 오르는 데 땀이 흘렀다. 지금보다 무덥고 힘들었을 70년 전 여름, 스미스 부대원들은 알지도 못하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그곳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스미스 부대원들의 희생과 노고가 그들의 노력을 기반으로 일궈진 것을 누리는 사람들로부터 합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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