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소련, 영토 요구하며 침공
핀란드, 전력 열세 딛고 결사항전
영토 일부 빼앗겼으나 독립 지켜
‘겨울전쟁’ 이후 전시물자 비축
코로나 사태에도 큰 타격 없어
위기를 기회로…작지만 강한 나라
핀란드는 1809년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에 편입됐으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혼란기에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혁명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회복한 소련은 핀란드와 폴란드, 발트 3국을 다시 자국 영토로 편입하려 시도했다.
1939년 소련은 핀란드 국경과 가까운 도시 레닌그라드의 안전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핀란드에 영토 할양을 강요했다. 인구와 영토 규모로 보면 도저히 승산이 없었지만, 핀란드의 카를 구스타프 만네르하임(1867~1951) 원수는 소련의 요구를 거절하고 결사항전을 선언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1939년 11월 30일, 소련은 50만이 넘는 병력과 기갑부대를 동원해 핀란드를 침공했다. 이른바 ‘겨울전쟁’의 시작이었다.
유럽인들은 핀란드의 항전이 쉽게 제압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소련군이 동원한 기갑전력은 핀란드의 20배가 넘었고, 항공 전력은 100배 넘게 차이가 났다. 하지만 대부분 삼림으로 뒤덮인 핀란드에서 기갑부대와 항공 전력의 우위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겨울 기온도 소련군에 불리했다. 핀란드의 겨울은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으로 악명이 높았다. 핀란드 군대를 추격하던 소련 기갑부대는 삼림지대의 빈약한 도로망에 발이 묶였고, 남부지역에서 동원된 소련 병사들은 동상에 시달렸다.
핀란드군은 맹랑한 전술을 구사했다. 핀란드군은 소련군을 숲속으로 최대한 끌어들인 다음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스키부대를 출동시켜 한밤중에 소련군의 야영지를 급습했다. 급습 당한 소련군은 어둠 속에서 아군끼리 오인접전을 벌이기 일쑤였다. 동계 위장복이 미비했던 소련군은 핀란드군 저격수의 좋은 표적이 됐고, 고립된 소련군 병사들은 그대로 동사(凍死)했다. 때로는 대대나 연대 병력이 숲에서 몰살당했다.
개전 초기 라도가 호수 북쪽에 위치한 톨바야르비와 수오야르비 사이의 협곡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소련군 139사단과 74사단이 궤멸됐다. 소련군 전차들은 숲속의 빈약한 도로에 발이 묶인 채 화염병에 불타버렸다. 1939년 12월부터 1940년 1월 초까지 이어진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소련군은 3만이 넘는 병력을 상실했지만, 핀란드군의 사상자는 2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핀란드군의 전설적인 저격수 시모 해위해(1905~2002)는 넉 달 동안 무려 542명의 소련군을 사살했다.
세계는 핀란드군의 분투에 놀랐지만 정작 핀란드를 도우려고 나선 나라는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노르웨이에 병력을 상륙시키고 스웨덴을 통해 이들을 핀란드에 투입하는 작전을 구상했지만,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은 외국 군대가 자국 영토에 들어오는 것을 꺼렸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의용군을 조직해 핀란드를 은근히 도우면서도 전쟁에 본격적으로 휘말리는 사태는 결코 원치 않았다. 그래서 핀란드는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에서 싸워야 했다.
연패 소식을 접한 스탈린은 분노했지만, 그 패배는 상당 부분 스탈린 자신이 자초한 것이었다. 독재 체제를 구축하려고 유능한 장군들을 숙청하는 바람에 소련군 내부에는 지략을 제대로 펼칠 지휘관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지휘관들은 적군보다는 스탈린의 숙청을 더 두려워했다.
1937년 총참모장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해 수많은 고위 장성들이 숙청된 이후 소련 군대는 일종의 지휘 공백 상태에 빠져 있었다. 경험 없는 소련군의 무능한 지휘관들은 압도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눈치만 보면서 무모한 진격을 일삼았다. 수오무살미의 패전은 예견된 결과였던 것이다.
수오무살미 전투 패배 이후 스탈린은 핀란드에 배치된 부대의 지휘관들을 대거 교체했고, 신임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티모센코는 압도적인 전력을 일시에 투입해 도시를 점령하는 전략을 택했다. 소련군은 숲속의 핀란드군 숙영지와 수도 헬싱키에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면서 포병의 엄호 아래 기갑부대를 신속하게 전진시켰다. 대규모 소모전을 감당할 수 없었던 핀란드는 1940년 4월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우여곡절 끝에 승리하긴 했으나 소련군의 피해는 핀란드군의 7~8배에 달했다. 당시 소련과의 전쟁을 계획하던 독일은 흥미롭게 핀란드군의 활약을 지켜봤다. 독일은 소련이 핀란드에서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소련과의 전쟁에 자신감을 가졌다. 반면 소련군은 적이었던 핀란드군의 전술을 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 배웠다. 핀란드에서 굴욕을 겪은 소련군은 동계장비를 확충하고 신형 전차 T-34를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겨울전쟁’은 붉은 군대에 재앙이자 뼈아픈 교훈이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핀란드는 ‘겨울전쟁’으로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독일과 손잡았다. 독소전쟁에서도 핀란드군은 용명(勇名)을 떨쳤다. 레닌그라드와 핀란드 접경지역에서 소련군은 약 50만의 병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전쟁 말기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핀란드는 동맹을 깨고 독일군에 총부리를 겨눴다. 비겁한 배신으로 지탄받았지만 약소국인 핀란드에 그런 선택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은 핀란드와 다시 전쟁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고, 핀란드는 중립을 조건으로 내걸고 소련의 지배를 피할 수 있었다. ‘겨울전쟁’의 저항 덕분에 핀란드는 유럽연합(EU)에 가입할 때도 소련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중립국 핀란드는 ‘무장중립’ 아래 시장경제와 의회민주주의를 유지하면서 번영했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핀란드 현대사에서 영광의 기억으로 남았지만, ‘겨울전쟁’은 핀란드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성인 인구의 절반이 피해를 봤으며 영토가 축소됐다. 핀란드는 항시적으로 소련의 침공 가능성을 의식해야 했다. 그래서 ‘겨울전쟁’ 이래로 핀란드 국민에게 식량·의약품 등 전시물자 비축은 당연한 일이 됐다. 최근 핀란드는 그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경제활동이 위축되면서 전 세계가 고통을 겪고 있지만, 핀란드는 비축물자 덕분에 경제활동 중단에도 불구하고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의 와중에도 핀란드인들은 사우나와 삼림욕을 즐기고 있다. 80년 전 ‘겨울전쟁’의 치열한 항전이 선사한 의외의 선물인 셈이다. 세계적인 문화인류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대변동』(강주헌 옮김, 김영사, 2019)이라는 저서에서 위기를 변화의 계기로 삼은 역사적 사례로 핀란드의 겨울전쟁을 첫째로 거론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정현 한국외대 교수>
강대국 소련, 영토 요구하며 침공
핀란드, 전력 열세 딛고 결사항전
영토 일부 빼앗겼으나 독립 지켜
‘겨울전쟁’ 이후 전시물자 비축
코로나 사태에도 큰 타격 없어
위기를 기회로…작지만 강한 나라
핀란드는 1809년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에 편입됐으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혼란기에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혁명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회복한 소련은 핀란드와 폴란드, 발트 3국을 다시 자국 영토로 편입하려 시도했다.
1939년 소련은 핀란드 국경과 가까운 도시 레닌그라드의 안전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핀란드에 영토 할양을 강요했다. 인구와 영토 규모로 보면 도저히 승산이 없었지만, 핀란드의 카를 구스타프 만네르하임(1867~1951) 원수는 소련의 요구를 거절하고 결사항전을 선언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1939년 11월 30일, 소련은 50만이 넘는 병력과 기갑부대를 동원해 핀란드를 침공했다. 이른바 ‘겨울전쟁’의 시작이었다.
유럽인들은 핀란드의 항전이 쉽게 제압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소련군이 동원한 기갑전력은 핀란드의 20배가 넘었고, 항공 전력은 100배 넘게 차이가 났다. 하지만 대부분 삼림으로 뒤덮인 핀란드에서 기갑부대와 항공 전력의 우위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겨울 기온도 소련군에 불리했다. 핀란드의 겨울은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으로 악명이 높았다. 핀란드 군대를 추격하던 소련 기갑부대는 삼림지대의 빈약한 도로망에 발이 묶였고, 남부지역에서 동원된 소련 병사들은 동상에 시달렸다.
핀란드군은 맹랑한 전술을 구사했다. 핀란드군은 소련군을 숲속으로 최대한 끌어들인 다음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스키부대를 출동시켜 한밤중에 소련군의 야영지를 급습했다. 급습 당한 소련군은 어둠 속에서 아군끼리 오인접전을 벌이기 일쑤였다. 동계 위장복이 미비했던 소련군은 핀란드군 저격수의 좋은 표적이 됐고, 고립된 소련군 병사들은 그대로 동사(凍死)했다. 때로는 대대나 연대 병력이 숲에서 몰살당했다.
개전 초기 라도가 호수 북쪽에 위치한 톨바야르비와 수오야르비 사이의 협곡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소련군 139사단과 74사단이 궤멸됐다. 소련군 전차들은 숲속의 빈약한 도로에 발이 묶인 채 화염병에 불타버렸다. 1939년 12월부터 1940년 1월 초까지 이어진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소련군은 3만이 넘는 병력을 상실했지만, 핀란드군의 사상자는 2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핀란드군의 전설적인 저격수 시모 해위해(1905~2002)는 넉 달 동안 무려 542명의 소련군을 사살했다.
세계는 핀란드군의 분투에 놀랐지만 정작 핀란드를 도우려고 나선 나라는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노르웨이에 병력을 상륙시키고 스웨덴을 통해 이들을 핀란드에 투입하는 작전을 구상했지만,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은 외국 군대가 자국 영토에 들어오는 것을 꺼렸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의용군을 조직해 핀란드를 은근히 도우면서도 전쟁에 본격적으로 휘말리는 사태는 결코 원치 않았다. 그래서 핀란드는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에서 싸워야 했다.
연패 소식을 접한 스탈린은 분노했지만, 그 패배는 상당 부분 스탈린 자신이 자초한 것이었다. 독재 체제를 구축하려고 유능한 장군들을 숙청하는 바람에 소련군 내부에는 지략을 제대로 펼칠 지휘관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지휘관들은 적군보다는 스탈린의 숙청을 더 두려워했다.
1937년 총참모장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해 수많은 고위 장성들이 숙청된 이후 소련 군대는 일종의 지휘 공백 상태에 빠져 있었다. 경험 없는 소련군의 무능한 지휘관들은 압도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눈치만 보면서 무모한 진격을 일삼았다. 수오무살미의 패전은 예견된 결과였던 것이다.
수오무살미 전투 패배 이후 스탈린은 핀란드에 배치된 부대의 지휘관들을 대거 교체했고, 신임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티모센코는 압도적인 전력을 일시에 투입해 도시를 점령하는 전략을 택했다. 소련군은 숲속의 핀란드군 숙영지와 수도 헬싱키에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면서 포병의 엄호 아래 기갑부대를 신속하게 전진시켰다. 대규모 소모전을 감당할 수 없었던 핀란드는 1940년 4월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우여곡절 끝에 승리하긴 했으나 소련군의 피해는 핀란드군의 7~8배에 달했다. 당시 소련과의 전쟁을 계획하던 독일은 흥미롭게 핀란드군의 활약을 지켜봤다. 독일은 소련이 핀란드에서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소련과의 전쟁에 자신감을 가졌다. 반면 소련군은 적이었던 핀란드군의 전술을 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 배웠다. 핀란드에서 굴욕을 겪은 소련군은 동계장비를 확충하고 신형 전차 T-34를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겨울전쟁’은 붉은 군대에 재앙이자 뼈아픈 교훈이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핀란드는 ‘겨울전쟁’으로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독일과 손잡았다. 독소전쟁에서도 핀란드군은 용명(勇名)을 떨쳤다. 레닌그라드와 핀란드 접경지역에서 소련군은 약 50만의 병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전쟁 말기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핀란드는 동맹을 깨고 독일군에 총부리를 겨눴다. 비겁한 배신으로 지탄받았지만 약소국인 핀란드에 그런 선택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은 핀란드와 다시 전쟁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고, 핀란드는 중립을 조건으로 내걸고 소련의 지배를 피할 수 있었다. ‘겨울전쟁’의 저항 덕분에 핀란드는 유럽연합(EU)에 가입할 때도 소련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중립국 핀란드는 ‘무장중립’ 아래 시장경제와 의회민주주의를 유지하면서 번영했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핀란드 현대사에서 영광의 기억으로 남았지만, ‘겨울전쟁’은 핀란드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성인 인구의 절반이 피해를 봤으며 영토가 축소됐다. 핀란드는 항시적으로 소련의 침공 가능성을 의식해야 했다. 그래서 ‘겨울전쟁’ 이래로 핀란드 국민에게 식량·의약품 등 전시물자 비축은 당연한 일이 됐다. 최근 핀란드는 그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경제활동이 위축되면서 전 세계가 고통을 겪고 있지만, 핀란드는 비축물자 덕분에 경제활동 중단에도 불구하고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의 와중에도 핀란드인들은 사우나와 삼림욕을 즐기고 있다. 80년 전 ‘겨울전쟁’의 치열한 항전이 선사한 의외의 선물인 셈이다. 세계적인 문화인류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대변동』(강주헌 옮김, 김영사, 2019)이라는 저서에서 위기를 변화의 계기로 삼은 역사적 사례로 핀란드의 겨울전쟁을 첫째로 거론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정현 한국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