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는 임금의 조상 신주를 봉안해 놓고 제향 올리는 사당이고 사직은 백성이 먹고사는 곡물신과 토지신에게 제사 드리는 단(壇)이다. 임금이 곧 국가였던 군주사회에서 종묘와 사직은 나라와 백성을 일컫는 별칭이었다. 두 제사의 제주는 임금이었다. 임금에게는 조상을 온전히 섬기고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지켜내야 하는 책무가 부여됐다. 백성들은 강제로 징수하는 조세 의무를 감당했다. 종묘사직을 보전하지 못한 죄업은 임금한테 씌워졌고 실덕한 임금에게 백성들은 추종을 거부했다.
고구려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재위 331~371)은 종묘사직을 제대로 수호하지 못해 조상한테 죄짓고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줬다.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며 중원 대륙까지 넘보던 고구려인의 진취적 기상에 패배의식과 굴욕감을 안겼다. 부왕(15대 미천왕)이 경략한 영토를 잃었고 5만이 넘는 고구려인이 중국으로 끌려가 중국인이 되게 했다. 미천왕 무덤이 파묘당해 유골은 볼모가 되고 태후(어머니)와 왕비는 포로로 잡혀가 인질이 됐다.
3~4세기 중원 대륙에는 주인이 없었다. 진(秦·BC 221~BC 207)나라 시황제의 중원 통일 이후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영도자가 없었다. 지방 분국시대가 오래 지속돼 100명이 넘는 토호들이 번국(藩國) 왕을 자처하며 전쟁을 일삼았다. 중국 황하 이북의 강북지역이 극심했다. ‘팔왕의 난’과 ‘5호(胡)16국(國)’ 난립으로 살육전이 난무하고 변방국 전쟁에 연루돼 멸망한 나라가 부지기수였다.
고대사는 전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광활한 만주 땅을 터전으로 중국 산둥반도까지 진출했던 고구려는 국경이 방대해 사방이 적이었다. 고국원왕 재위 시 고구려에는 중국 연(燕)나라가 원수였다. 연은 5호 16국(304~439) 중 하나로 선비족 가운데 모용부(部) 부족이 건국한 나라였다. 모용부족 추장 모용외(269~333)가 요령지방에서 초석을 다졌고 영토는 하북부터 남만주에 이르렀다. 모용외 아들 모용황(297~348)이 국가 체계를 갖춘 뒤 337년 연왕으로 자칭했다. 중원 통일을 도모하던 모용황에게 동북아 맹주 고구려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고국원왕 12년(342) 11월. 모용황이 5만5000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쳐들어왔다. 연의 침공을 사전 탐지하고 있었던 고국원왕도 6만 대군을 일으켜 응전했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었다. 연에서 고구려로 진격하는 길은 험준한 남도와 평탄한 북도뿐이었다. 모용황은 책사의 묘략을 수용해 4만 군대 선봉에 서 남도를 먼저 공략했다. 1만5000 병력은 북도에서 대기토록 했다. 허를 찌른 허허실실 전법이었다.
고국원왕은 연군이 평탄한 북도를 먼저 공략할 것으로 예상했다. 정예군 5만을 북도에 배치하고 왕의 동생 고무가 선봉에 서 대기했다. 왕은 보충부대 1만을 이끌고 남도에서 기다렸다. 보충부대 안에는 태후와 왕비도 함께 있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북도에서는 연나라군이 섬멸되고 남도에서는 고구려군이 전멸했다. 수도 환도성이 모용황에게 함락되고 고국원왕은 근위병 몇 명과 피신해 겨우 목숨을 건졌다. 승승장구하던 고구려군에게 치욕적 패배를 안긴 전쟁이었다.
승전한 모용황 군대는 연으로 철군하며 천인공노할 패악질을 자행했다. 미천왕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탈취했다. 태후와 왕비를 백성 5만여 명과 함께 포로로 끌고 갔다. 조정과 백성들은 절망했다. 고구려는 연의 신하국으로 전락해 군신 예의를 자청했고 30년이 넘도록 진귀한 공물을 헌납했다. 볼모로 인해 운신하지 못한 고국원왕은 연군의 침입에 대응하지 못하고 미천왕이 확장한 요서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유골을 볼모로 삼는 무덤의 수난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역사가 유구하다. 죽은 사람이 권력자였거나 부자일 경우가 우선 공격 대상이다. 인구에 널리 회자된 저명인사 시신 일부는 은밀히 매매되고 해부대에 올라 연구 대상이 되기도 한다. 미라로 박제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BC 356~BC 323)대왕, 이원론 창시자 프랑스의 데카르트(1596~1650) 두개골 전시, 러시아의 ‘미친 수도승’ 라스푸틴(1864~1916)의 성기 절단, 현재도 연구 중인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1879~1955)의 뇌가 대표적이다. 영국 청교도 혁명가 크롬웰(1599~1658)과 이탈리아 파시즘 독재자 무솔리니(1883~1945)가 당한 사후 시신 훼손은 너무나 엽기적이어서 필설로 옮길 수가 없다.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 1리에는 고려 개국공신으로 평산 신씨 시조인 신숭겸(?~927) 장군 묘가 있다. 묘의 봉분이 세 개로 으스스하다. 그러나 고려 태조 왕건(877~943)과 신숭겸 사이에 얽힌 충정을 알고 나면 후삼국 시대상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며 숙연해진다.
후백제 견훤(?~935)과 고려 왕건이 대구 팔공산에서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였다. 왕건의 작전 실패로 고려군이 몰살 위기에 처했다. 신숭겸이 왕건에게 아뢰었다. “소장과 옷을 바꿔 입으시고 주군께서는 후일을 도모하소서!” 왕건은 구사일생으로 생환했으나 신숭겸은 목이 잘렸다. 뒤늦게 속은 줄을 안 견훤이 신숭겸의 몸만 왕건에게 보냈다. 왕건이 통곡하며 신숭겸 머리를 황금으로 주조해 장사 지냈다. 후일의 도굴을 염려해 봉분을 세 개 조성했다.
고국원왕은 40년 8개월을 재위하는 동안 미천왕 유골과 태후·왕비의 연나라 볼모로 숨죽여 살았다. 한 번의 작전 실패로 인한 대가 치고는 가혹했다. 왕은 볼모 귀환을 위해 엄청난 국고를 탕진했다. 미천왕 유골은 1년 만에 돌아왔으나 태후와 왕비는 13년 만에 환국했다. 연은 왕의 동생 고무를 새 인질로 잡았다. 고국원왕은 태후와 왕비에게 13년 동안의 고초를 묻지 않았다.
고국원왕 40년(370). 연이 전진(351~394)에 의해 멸망했다. 왕은 실지 회복에 나섰다. 산둥반도의 대륙백제를 기습 공격했으나 패퇴했다. 분노한 백제왕(13대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성급한 내침을 영토 확장 기회로 포착했다. 근초고왕의 태자 근구수(14대·재위 375~384)를 선봉장으로 고구려 요서 평양성을 공략했다. 보복전이었다. 다시 고국원왕이 고구려 군대를 이끌고 선두에 나섰다. 평양성 함락 직전 백제군이 쏜 화살에 고국원왕이 명중하자 백제군은 철수했다. 며칠 후 고국원왕은 숨을 거뒀다. 한반도가 아닌 중국 땅에서의 전쟁이었다.
고구려·백제 간 대륙 전쟁이 초래한 역사적 파장은 컸다. 동명성왕(고구려 시조)을 생부로 형제 나라였던 두 나라가 회복 불능의 원수지간이 되고 만다. 고국원왕 장남이 17대 소수림왕(재위·371~384)으로 즉위하며 전쟁은 더욱 격화되고 한반도의 두 나라 국경으로 비화했다. 아버지 원수를 갚기 위한 양보 없는 싸움이었다. 전술에 능한 백제 근구수왕도 이에 맞서 정면 대결했다. 고구려·백제의 국력은 피폐되고 무덤이 파헤쳐졌다. 이 간극을 신라가 파고들었다. 양국 간 화친과 절교를 반복하는 등거리 외교로 한반도 중부지방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가야 연맹의 각국을 이간시켜 결속을 약화시켰다. 이로 인한 한반도 내 4국 간 이전투구는 더욱 치열해졌다.
고국원왕은 평양성 인근 고국원 언덕(原)에 장사지냈다. 위치에 관한 사서의 기록은 없다.<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 저자>
종묘는 임금의 조상 신주를 봉안해 놓고 제향 올리는 사당이고 사직은 백성이 먹고사는 곡물신과 토지신에게 제사 드리는 단(壇)이다. 임금이 곧 국가였던 군주사회에서 종묘와 사직은 나라와 백성을 일컫는 별칭이었다. 두 제사의 제주는 임금이었다. 임금에게는 조상을 온전히 섬기고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지켜내야 하는 책무가 부여됐다. 백성들은 강제로 징수하는 조세 의무를 감당했다. 종묘사직을 보전하지 못한 죄업은 임금한테 씌워졌고 실덕한 임금에게 백성들은 추종을 거부했다.
고구려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재위 331~371)은 종묘사직을 제대로 수호하지 못해 조상한테 죄짓고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줬다.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며 중원 대륙까지 넘보던 고구려인의 진취적 기상에 패배의식과 굴욕감을 안겼다. 부왕(15대 미천왕)이 경략한 영토를 잃었고 5만이 넘는 고구려인이 중국으로 끌려가 중국인이 되게 했다. 미천왕 무덤이 파묘당해 유골은 볼모가 되고 태후(어머니)와 왕비는 포로로 잡혀가 인질이 됐다.
3~4세기 중원 대륙에는 주인이 없었다. 진(秦·BC 221~BC 207)나라 시황제의 중원 통일 이후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영도자가 없었다. 지방 분국시대가 오래 지속돼 100명이 넘는 토호들이 번국(藩國) 왕을 자처하며 전쟁을 일삼았다. 중국 황하 이북의 강북지역이 극심했다. ‘팔왕의 난’과 ‘5호(胡)16국(國)’ 난립으로 살육전이 난무하고 변방국 전쟁에 연루돼 멸망한 나라가 부지기수였다.
고대사는 전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광활한 만주 땅을 터전으로 중국 산둥반도까지 진출했던 고구려는 국경이 방대해 사방이 적이었다. 고국원왕 재위 시 고구려에는 중국 연(燕)나라가 원수였다. 연은 5호 16국(304~439) 중 하나로 선비족 가운데 모용부(部) 부족이 건국한 나라였다. 모용부족 추장 모용외(269~333)가 요령지방에서 초석을 다졌고 영토는 하북부터 남만주에 이르렀다. 모용외 아들 모용황(297~348)이 국가 체계를 갖춘 뒤 337년 연왕으로 자칭했다. 중원 통일을 도모하던 모용황에게 동북아 맹주 고구려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고국원왕 12년(342) 11월. 모용황이 5만5000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쳐들어왔다. 연의 침공을 사전 탐지하고 있었던 고국원왕도 6만 대군을 일으켜 응전했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었다. 연에서 고구려로 진격하는 길은 험준한 남도와 평탄한 북도뿐이었다. 모용황은 책사의 묘략을 수용해 4만 군대 선봉에 서 남도를 먼저 공략했다. 1만5000 병력은 북도에서 대기토록 했다. 허를 찌른 허허실실 전법이었다.
고국원왕은 연군이 평탄한 북도를 먼저 공략할 것으로 예상했다. 정예군 5만을 북도에 배치하고 왕의 동생 고무가 선봉에 서 대기했다. 왕은 보충부대 1만을 이끌고 남도에서 기다렸다. 보충부대 안에는 태후와 왕비도 함께 있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북도에서는 연나라군이 섬멸되고 남도에서는 고구려군이 전멸했다. 수도 환도성이 모용황에게 함락되고 고국원왕은 근위병 몇 명과 피신해 겨우 목숨을 건졌다. 승승장구하던 고구려군에게 치욕적 패배를 안긴 전쟁이었다.
승전한 모용황 군대는 연으로 철군하며 천인공노할 패악질을 자행했다. 미천왕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탈취했다. 태후와 왕비를 백성 5만여 명과 함께 포로로 끌고 갔다. 조정과 백성들은 절망했다. 고구려는 연의 신하국으로 전락해 군신 예의를 자청했고 30년이 넘도록 진귀한 공물을 헌납했다. 볼모로 인해 운신하지 못한 고국원왕은 연군의 침입에 대응하지 못하고 미천왕이 확장한 요서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유골을 볼모로 삼는 무덤의 수난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역사가 유구하다. 죽은 사람이 권력자였거나 부자일 경우가 우선 공격 대상이다. 인구에 널리 회자된 저명인사 시신 일부는 은밀히 매매되고 해부대에 올라 연구 대상이 되기도 한다. 미라로 박제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BC 356~BC 323)대왕, 이원론 창시자 프랑스의 데카르트(1596~1650) 두개골 전시, 러시아의 ‘미친 수도승’ 라스푸틴(1864~1916)의 성기 절단, 현재도 연구 중인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1879~1955)의 뇌가 대표적이다. 영국 청교도 혁명가 크롬웰(1599~1658)과 이탈리아 파시즘 독재자 무솔리니(1883~1945)가 당한 사후 시신 훼손은 너무나 엽기적이어서 필설로 옮길 수가 없다.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 1리에는 고려 개국공신으로 평산 신씨 시조인 신숭겸(?~927) 장군 묘가 있다. 묘의 봉분이 세 개로 으스스하다. 그러나 고려 태조 왕건(877~943)과 신숭겸 사이에 얽힌 충정을 알고 나면 후삼국 시대상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며 숙연해진다.
후백제 견훤(?~935)과 고려 왕건이 대구 팔공산에서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였다. 왕건의 작전 실패로 고려군이 몰살 위기에 처했다. 신숭겸이 왕건에게 아뢰었다. “소장과 옷을 바꿔 입으시고 주군께서는 후일을 도모하소서!” 왕건은 구사일생으로 생환했으나 신숭겸은 목이 잘렸다. 뒤늦게 속은 줄을 안 견훤이 신숭겸의 몸만 왕건에게 보냈다. 왕건이 통곡하며 신숭겸 머리를 황금으로 주조해 장사 지냈다. 후일의 도굴을 염려해 봉분을 세 개 조성했다.
고국원왕은 40년 8개월을 재위하는 동안 미천왕 유골과 태후·왕비의 연나라 볼모로 숨죽여 살았다. 한 번의 작전 실패로 인한 대가 치고는 가혹했다. 왕은 볼모 귀환을 위해 엄청난 국고를 탕진했다. 미천왕 유골은 1년 만에 돌아왔으나 태후와 왕비는 13년 만에 환국했다. 연은 왕의 동생 고무를 새 인질로 잡았다. 고국원왕은 태후와 왕비에게 13년 동안의 고초를 묻지 않았다.
고국원왕 40년(370). 연이 전진(351~394)에 의해 멸망했다. 왕은 실지 회복에 나섰다. 산둥반도의 대륙백제를 기습 공격했으나 패퇴했다. 분노한 백제왕(13대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성급한 내침을 영토 확장 기회로 포착했다. 근초고왕의 태자 근구수(14대·재위 375~384)를 선봉장으로 고구려 요서 평양성을 공략했다. 보복전이었다. 다시 고국원왕이 고구려 군대를 이끌고 선두에 나섰다. 평양성 함락 직전 백제군이 쏜 화살에 고국원왕이 명중하자 백제군은 철수했다. 며칠 후 고국원왕은 숨을 거뒀다. 한반도가 아닌 중국 땅에서의 전쟁이었다.
고구려·백제 간 대륙 전쟁이 초래한 역사적 파장은 컸다. 동명성왕(고구려 시조)을 생부로 형제 나라였던 두 나라가 회복 불능의 원수지간이 되고 만다. 고국원왕 장남이 17대 소수림왕(재위·371~384)으로 즉위하며 전쟁은 더욱 격화되고 한반도의 두 나라 국경으로 비화했다. 아버지 원수를 갚기 위한 양보 없는 싸움이었다. 전술에 능한 백제 근구수왕도 이에 맞서 정면 대결했다. 고구려·백제의 국력은 피폐되고 무덤이 파헤쳐졌다. 이 간극을 신라가 파고들었다. 양국 간 화친과 절교를 반복하는 등거리 외교로 한반도 중부지방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가야 연맹의 각국을 이간시켜 결속을 약화시켰다. 이로 인한 한반도 내 4국 간 이전투구는 더욱 치열해졌다.
고국원왕은 평양성 인근 고국원 언덕(原)에 장사지냈다. 위치에 관한 사서의 기록은 없다.<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