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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지키는 데 남녀가 있습니까?” 여군 2500여 명은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조아미

입력 2020. 06. 24   16:22
업데이트 2020. 06. 24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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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의 숨은 영웅, 참전 여군


해병대에 지원한 용감한 여성들의 모습.
사진=안보경영연구원(SMI) 『6·25전쟁과 베트남 파병 참전 여군의 활약 및 국위선양 사례 발굴을 위한 연구』·연합뉴스
해병대에 지원한 용감한 여성들의 모습. 사진=안보경영연구원(SMI) 『6·25전쟁과 베트남 파병 참전 여군의 활약 및 국위선양 사례 발굴을 위한 연구』·연합뉴스
6사단 간호장교들.
사진=안보경영연구원(SMI) 『6·25전쟁과 베트남 파병 참전 여군의 활약 및 국위선양 사례 발굴을 위한 연구』·연합뉴스
6사단 간호장교들. 사진=안보경영연구원(SMI) 『6·25전쟁과 베트남 파병 참전 여군의 활약 및 국위선양 사례 발굴을 위한 연구』·연합뉴스
죽창을 들고 싸울 것을 결의하는 여자 학도의용군.
사진=안보경영연구원(SMI) 『6·25전쟁과 베트남 파병 참전 여군의 활약 및 국위선양 사례 발굴을 위한 연구』·연합뉴스
죽창을 들고 싸울 것을 결의하는 여자 학도의용군. 사진=안보경영연구원(SMI) 『6·25전쟁과 베트남 파병 참전 여군의 활약 및 국위선양 사례 발굴을 위한 연구』·연합뉴스

평범한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조국과 가족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맞서 싸웠다. 70년 전 오늘, 6월 25일 당당히 전쟁터로 향한 여성이 무려 2560여 명에 달한다. 이들은 총탄이 난무하는 전선과 전사상자가 넘쳐나는 병원, 대북방송 현장, 총기를 만드는 총포공장, 험준한 산악지형 등 위험한 현장에서 활약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나라를 지키는 데 남녀가 따로 있습니까?”

우리는 이들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 6.25전쟁, 베트남전 참전 여군 3026명 달해


올해로 창설 70주년을 맞는 여군의 역사는 곧 국군의 역사이기도 하다. 여군들은 자발적으로 6·25전쟁에 참전해 국가에 헌신했다. 여자의용군은 전쟁의 전방까지 배치되면서 지리산, 백운산 등 주요 거점에서 대적·대민 선무활동을 펼치고 북한군 1200명을 귀속시키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과 이유 없는 차별 속에서도 버텼다. 군복이 없어 남군의 군복을 수선해 입고, 숙소도 부족해 피란 민가를 이용하거나 도로 위에서 지내야 했다. 그렇지만 단 한 가지 이유, 나라를 지키는 데 이바지한다는 강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6·25 참전 유공자 발굴 사업’에서 여군이 유공자로 등록된 현황으로 6·25 참전 여군 2554명, 베트남전 참전 여군 461명, 6·25 및 베트남전 참전 여군 11명 등 3026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 육·해·공군과 해병대·간호장교로 참전… 군번 없이 학도의용군으로 군사활동


안보경영연구원(SMI)이 발간한 『6·25전쟁과 베트남 파병 참전 여군의 활약 및 국위선양 사례 발굴을 위한 연구』에 따르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우리 군은 학도호국단을 조직해 군사훈련을 진행할 수 있는 교관을 양성하기 위해 통솔력 있고 유능한 체육 교사를 선발해 ‘배속장교 교육’을 했다.

6·25가 발발하자 여성들도 육·해·공군·해병대 여군 및 간호장교로 참전했다. 또한, 군번도 없는 민간인 신분으로 학도의용군·민간간호사·유격대에 편입하거나 군사활동에 참여했다.

각 군별로 살펴보면 먼저 육군 여자의용군은 1950년 9월 1일에 창설된 여자의용군교육대에서 배출됐다. 전쟁 기간 총 4개 기수 1058명이 수료했다. 이들은 여군훈련소, 전방군단 및 사단 그리고 정훈대대, 정보 및 첩보부대, 예술대, 전후방 각급 부대 등에 배치돼 행정지원, 대민 선무공작, 정훈교육, 대적방송, 첩보수집, 위문공연, 경리, 통신, 보급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해군 여자해병은 1950년 8월 말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모집된 제주도 지역의 미혼 여교사와 어린 여중생 등 126명이 해병 4기와 함께 구성됐다. 이들 여자해병은 경남 진해에 있던 해군신병교육대에서 특별중대로 편성돼 10월 10일 어려운 훈련 과정을 수료했으나, 전황이 호전되자 51명은 귀가 조치됐다.

나머지 75명은 진해 해군통제부와 부산의 해군본부 및 해군진해병원에 배치돼 행정·보급·정비·헌병·정훈·통신·교환·간호보조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복무했다.

공군 여자항공병은 1949년 1월 10일 여류비행사인 이정희가 중위로 임관하고 뒤이어 2월 15일 여자항공교육대가 창설되면서 모집됐다. 1기생 15명과 2기생 39명 등 총 54명이 배출됐으나, 수료 후 12명이 귀가 조치되고 6·25 발발 당시에는 42명이 복무했다. 공군은 전쟁 발발 직후 임무수행 여건 불비 등의 사유로 전원 귀가 조치했다. 이 와중에도 26명은 공군본부에 복귀해 참모부 행정보조업무, 기상 및 통신업무 등을 수행했다.

육군 간호장교는 1948년 8월 26일 민간 간호자격증을 가진 31명의 여성이 육군 간호 소위로 배출되는 등 전쟁 기간 활약한 장교가 1257명에 달한다. 해군은 1949년 2월 7일 진해에 간호교육대를 창설해 4월 9일 20명의 해군 간호소위를 배출했고 이어 2기생 6명을 소위로 임관시켰다. 공군은 육·해군과는 달리 간호장교가 아닌 간호군무원을 둬 간호활동을 하게 했다. 이들은 공군 병원을 비롯해 비행단 등에 배치돼 활동했으나, 정확한 인원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울러 여자 학도의용군, 민간 간호사, 여자유격대원 그리고 군사활동을 지원한 여승 등 군번 없이 6·25에 참전한 여성들도 많았다. 이들은 전투현장은 물론 간호활동·행정지원·유격활동·첩보수집·연락업무·철도근무·예술대 등에서 활동했다.

한편, 국방부 6·25전쟁 70주년 사업단은 여군 창설 70주년인 오는 9월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6·25 참전 여군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 ‘참전 여군 메모리얼 전시회 및 상기 행사’를 개최한다.


● 곳곳에 숨은 영웅들, 항일무장투쟁 거쳐 자진 입대… 다리에 관통상 입기도


훗날 여군 초대병과장이 된 김현숙 대령은 중학교 체육교사로 활동하다 1949년 7월 여자배속장교 사감을 거쳐 예비역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중앙 학도청년훈련소 교관으로 있으면서 6·25가 발발하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여자의용군 모집을 건의하고 여자배속장교 출신들과 함께 여자의용군교육대 창설에 힘을 기울였다. 1950년 9월 1일 부산에서 제2훈련소 예속으로 500명 정원의 여자의용군교육대가 창설됐다. 초대 교육대장으로 취임한 김 대령은 여자의용군 1·2기 874명을 양성했다.

여군 중에서는 남군 못잖은 활약을 펼친 영웅들이 적지 않다. 오금손 대위는 개성도립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중 6·25가 발발하자 자진 입대했다. 해방 이전 광복군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한 전투경험이 있어서 간호장교로 입대해 부상자들을 간호했다. 간호장교임에도 북한 기습에 맞서 6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대위로 2계급 특진했다. 오 대위는 북진하는 군을 따라 올라가 강원도 철원과 김화 일대에서 벌어진 ‘K고지 전투’ 중 북한군의 포로가 됐으나,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탈출을 감행해 부대로 복귀했다. 탈출 도중 오른쪽 다리에 관통상, 허리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

박을희 중령의 경우 명성여중 체육교사로 재직하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입대, 여자청년단 교육대생을 지도해 훈련하는 등 여군 창설에 기여했다. 훈련하느라 4살 먹은 자녀를 충북 옥천의 친정에 맡겼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한강교가 폭파한 뒤 후퇴하다 북한군 혹은 탈출병으로 오인받아 죽을 고비도 넘겼다. 부산으로 내려가 김현숙 대령과 함께 지프차에 올라탄 채 확성기를 들고 가두방송으로 여자의용군을 모집했다.

김경오 대위는 대한민국 공군 창설 이후 최초의 여성 조종사다. 1949년 2월 김포비행장에서 공군에 입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여성조종사 양성 계획에 따라 선발된 15명의 후보생들은 일반 군사훈련을 마쳤지만 비행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조종훈련을 받지 못해 주로 기상 상황보고나 정비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6·25 발발 후에도 비행기를 조종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정전 후 본격적인 비행훈련을 시작해 1954년 5월 단독비행에 성공했다.


김명자 예비역 대위가 지난 2013년 국가보훈처로부터 ‘6·25전쟁 정전 60주년 기념’으로 받은 기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명자 예비역 대위가 지난 2013년 국가보훈처로부터 ‘6·25전쟁 정전 60주년 기념’으로 받은 기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현역 시절의 김명자 예비역 대위의 모습.
현역 시절의 김명자 예비역 대위의 모습.


●인터뷰 - 여자의용군 1기 김명자 예비역 대위 


 “1950년 8월 여자의용군 모집 전단 보고 지원 

딸 버린 셈 치겠다고 집안이 난리가 났었죠”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진하게 배어있던 1950년대. 당시 여성의 몸으로 군인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여자의용군 1기로 6·25에 참전한 김명자(88·사진) 예비역 대위는 당당히 여군에 지원함으로써 총탄이 빗발치던 현장에서 생사를 오가며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열아홉 나이에 참전을 결심했다.

“딸만 다섯인 딸부잣집 둘째로 태어났는데 친척 어르신들이 우리 집에 올 때마다 하던 말이 있었어요. ‘저 많은 딸 어떻게 하냐, 여자가 뭘 할 수 있냐.’ 그 소리가 듣기 싫어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 마음속 깊이 늘 있었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950년 8월 어느 날 길을 가다 전신주에 붙은 ‘여자의용군 모집’ 전단을 발견하고 바로 시험을 봐 합격했다.

“난리가 났죠. 어머니는 딸 하나 버리는 셈 친다고 사기그릇을 다 던지셨어요.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그나마 배우신 분이라 덜 보수적이셨고, 여자도 군에 입대할 수 있다면서 저를 지지해주셨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여자의용군으로 입대한 뒤 김 대위는 다시 장교 시험을 치러 18명과 함께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김 대위는 국방부 직할대 정훈2대대 6중대에서 정훈장교로 근무했다. 중대원들과 진중신문을 만들었는데 전쟁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있을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만화와 그림에 유머를 덧붙여 제작했다.

“지금처럼 버튼 하나 누르면 인쇄물이 나오는 시대가 아니었어요. 일일이 종이에 잉크를 묻혀 밀어내는 수작업이었는데 신문을 한 번 만들 때 100여 장씩 찍어 배포했죠.”

생사를 오간 당시 상황도 들려줬다. 개성 상공에서 일명 ‘삐라’를 살포하는 작업을 할 때였다. 그는 미군의 작은 수송기를 타고 다른 정훈장교 2명과 쌀가마니 6개 안에 수천 장의 전단을 가득 담아 뿌렸다.

“개성쯤 다다르니 북한군이 막 총을 쏴대는 거예요. ‘여기서 내가 오늘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내가 죽어도 이 삐라는 다 뿌리고 가야지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다행히 살아 돌아온 후 육군본부 군수국으로 발령나 보급장교로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저는 ‘천막 장교’로 유명했어요. 전쟁 중에 천막은 막사로도 쓰이고 귀중품이었거든요. 24인용, 6인용, 지휘관용 이렇게 있었는데, 막사 자체가 사단장들 체면이 걸려 있어 천막을 보급해 달라고 엄청나게 전화도 받았고, 이유 없는 원성도 들어야 했습니다.”

1956년 3월 대위로 군문을 나선 뒤, 대구매일신문사에서 문화부 기자로 근무했던 그는 서울로 올라와 출판사에서 근무했고, 재향군인회에서 향군부인회 사무총장 역할도 맡았다.

“예전엔 국립서울현충원 묘지 앞에 사이다병이나 맥주병을 두고 꽃을 꽂았어요. 어느 날 문득 이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1971년에 제가 플라스틱 꽃병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는데 당시 모두 회의적이었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모금운동을 펼쳐 6만 개의 꽃병으로 모두 바꾸는 작업을 해냈죠. 현충원 꽃병을 볼 때마다 자부심을 느낍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면 꿈 같다”고 소감을 전한 그는 독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70년 세월이 무색합니다. 열아홉 꽃다운 제가 벌써 아흔을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지금의 평화는 절대 그냥 얻어진 게 아닙니다. 안보가 뒷받침된 평화야말로 진정한 평화예요. 국민의 자부심이기도 한 국방력은 앞으로도 굳건히 키워나가야 합니다.” 


글=조아미/사진=한재호 기자


조아미 기자 < joajoa@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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