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양분 속 결별 겪은 대학생·시민들
냉전 이데올로기 맞서 사랑의 굴착 행렬
28년간 70개 넘는 터널 300여 명 탈출
1989년 동독 정치인 세기의 ‘말실수’
“곧바로 여행 자유” 선언에 장벽 붕괴
자유 염원과 포용이 낳은 필연적 우연
분단 베를린의 상징이 된 사진. 1961년 자유를 위해 동베를린을 탈출했던 ‘콘라트 슈만(Conrad Schumann)’이 서베를린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필자 제공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힘을 합쳤던 미·소 양국은 종전과 함께 급격히 등을 돌렸다. 소련군의 ‘베를린 봉쇄(1948.6~1949.5)’ 이후 독일의 분단은 고착됐고 6·25전쟁을 계기로 동·서독의 군대가 재건됐다. 소련이 장악한 지역에 위치한 베를린에 주둔한 미·영·프 군대는 동독 정부와 소련에 큰 걸림돌이었다. 더구나 매주 동독 시민 수만 명의 탈출이 이어지자 소련 서기장 흐루쇼프는 베를린을 서구 군대가 없는 ‘자유도시’로 선언하는 것과 베를린의 교통을 동독 정부가 통제하는 것을 골자로 한 ‘베를린 최후통첩’(1958.11.27)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59년 제네바에서 4대 승전국은 평화회담을 개최했으나 성과가 없었고 베를린에서는 적대적인 첩보전이 가열됐다. 1961년 아이젠하워의 후임자인 케네디 대통령은 빈에서 열린 회담에서 흐루쇼프에게 미국은 베를린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 견제와 암묵적 협상이 오가는 동안 동독 주민들의 탈출이 계속되자 동독의 울브리히트 서기장은 흐루쇼프의 동의를 얻어 서베를린 주변을 장벽으로 봉쇄했다. 베를린은 순식간에 양분되고 말았다.
강대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 대립과는 달리 일반 시민들의 삶은 갑자기 불편해지고 말았다. 기존에는 4대 강국의 관할 지역만 나뉘었을 뿐 자유로운 통행이 가능했지만, 장벽이 생긴 이후로는 통행과 교류가 완전히 끊겨버렸고 장벽을 넘던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사살됐다. 장벽은 도로 하나, 건물 하나 사이를 관통하면서 세워졌고, 많은 연인과 가족들이 강제로 이별을 겪어야 했다.
크리스타 볼프의 소설 『나누어진 하늘』(전영애 옮김, 민음사, 2012) 표지.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의 과거와 현재를 다룬 연구서 『베를린, 베를린』 표지.
동독 작가 크리스타 볼프의 소설 『나누어진 하늘(Der Geteilte Himmel)』(1963)은 이 시기가 배경이다. 서독의 과학자 만프레드와 사랑에 빠진 19세 동독 소녀 리타는 베를린 장벽으로 인해 이별하게 된다. 이 소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기에 리타가 공장과 사범학교에서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의 일원으로 성장하면서 이별을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크리스타 볼프는 소설 속에서 리타의 입을 빌려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서독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있지만, 구호로만 평등을 외치는 동독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어떤 체제든 모순과 부조리가 존재하는 한계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강요한 상처를 응시한 이 작품은 동·서독에서 모두 화제가 됐고 오늘날까지 독일 분단을 상징하는 대표작으로 남았다.
현실의 ‘리타’와 ‘만프레드’는 단지 서로를 그리워하기만 하지 않았다. 그들은 행동했다. 1964년 베를린으로 유학을 온 대학생 ‘알투르 짐머’는 분단의 비극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지 3년 정도가 지난 그 시기에 많은 동독 시민들이 장벽을 넘다가 목숨을 잃었고, 장벽을 감시하는 동독 군대의 감시탑과 초소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알투르 짐머는 고향 친구들의 소개로 ‘터널을 파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동독에서 탈출하려는 친구들과 가족, 연인들을 위해 곡괭이와 삽을 들었다. 의기투합한 20대 청년들은 조잡한 장비로 터널을 파기 시작했다. 수직으로 12~15m를 판 다음 직선으로 150m 정도를 뚫고 나가는 이 작업은 밤낮으로 이어졌다. 중장비를 사용할 수 없었기에 작은 삽과 망치, 소형 곡괭이로 작업했고, 터널에서 나온 흙더미를 이웃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지하실에 쌓았다. 산소펌프를 이용해 터널 안으로 산소까지 공급하면서 그들은 마침내 동베를린 지역으로 뚫고 나가는 데 성공했다.
가로 세로 1~2m에 불과한 그 좁은 터널을 이용해서 57명의 동독인들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했다. 이 터널은 곧 발각됐고 동독 군대는 터널을 폭파했다. 그러나 알투르 짐머와 같은 사람들은 더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유지된 28년 동안 70개 이상의 터널이 굴착됐고, 이 터널을 이용해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탈출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베를린의 ‘체크포인트찰리 박물관’에는 당시 대학생들이 사용했던 장비들이 전시돼 있다.
1970년께 만들어진 동서베를린을 잇는 비밀 지하터널 모습.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앞두고 일반에 공개됐다. 연합뉴스
이 터널들은 미국과 영국 정보부가 도청을 목적으로 뚫은 터널과는 전혀 달랐다. 민간인들은 적대국의 정보를 캐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와 연인, 가족을 위해 터널을 뚫었다. 그들을 움직인 것은 냉전질서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마음’들은 훗날 ‘필연적인 우연’을 낳았다.
냉전 시기에도 동·서독의 교류는 계속 이어졌다. 서독 정부는 동독의 대서방 무역이 어려움에 처하자 스윙(Swing)이라는 무이자 장기차관을 제공했다. 이런 재정 지원을 하면서 동독 내 정치범들을 석방하도록 설득하는 등 동독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선의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우편이 오가게 되고, 방송교류도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동독 시민들은 여행 자유화를 요구했지만, 동독 정부는 계속 무시했다. 그러다가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치국 대변인으로 갓 임명된 귄터 샤보브스키의 유명한 ‘말실수’가 터졌다. 동독인들은 언제쯤 서유럽으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샤보브스키는 무심코 “지금 당장”이라고 답했다. 동독 정부의 여행자유화 조치는 단지 여권 발급 기간을 단축하는 정도에 불과했고 시행 시기도 다음날부터였다.
그러나 방송을 본 수많은 동독 시민들이 장벽으로 몰려왔다. 국경수비대는 수많은 시민을 통제할 수 없었고 무력 사용을 포기했다. 동독 시민들이 곡괭이와 망치로 장벽을 부수기 시작하자 서베를린의 시민들도 가세했고 그날 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터널을 굴착했던 사람들의 마음과 냉전적 논리에 휘둘리지 않은 서독 정부의 일관적인 포용정책이 역사적 우연을 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최근 남과 북 사이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면서 적대적 언어가 오가고 있다. 우리에게도 독일과 같은 ‘필연적인 우연’은 가능할까? 6·25전쟁 70주년인 오늘, 베를린에 얽힌 냉전의 역사를 돌아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물론 독일과 한반도의 상황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냉전 질서와 이데올로기 대립에 굴하지 않고 터널을 굴착했던 사람들의 마음과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동서 양분 속 결별 겪은 대학생·시민들
냉전 이데올로기 맞서 사랑의 굴착 행렬
28년간 70개 넘는 터널 300여 명 탈출
1989년 동독 정치인 세기의 ‘말실수’
“곧바로 여행 자유” 선언에 장벽 붕괴
자유 염원과 포용이 낳은 필연적 우연
분단 베를린의 상징이 된 사진. 1961년 자유를 위해 동베를린을 탈출했던 ‘콘라트 슈만(Conrad Schumann)’이 서베를린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필자 제공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힘을 합쳤던 미·소 양국은 종전과 함께 급격히 등을 돌렸다. 소련군의 ‘베를린 봉쇄(1948.6~1949.5)’ 이후 독일의 분단은 고착됐고 6·25전쟁을 계기로 동·서독의 군대가 재건됐다. 소련이 장악한 지역에 위치한 베를린에 주둔한 미·영·프 군대는 동독 정부와 소련에 큰 걸림돌이었다. 더구나 매주 동독 시민 수만 명의 탈출이 이어지자 소련 서기장 흐루쇼프는 베를린을 서구 군대가 없는 ‘자유도시’로 선언하는 것과 베를린의 교통을 동독 정부가 통제하는 것을 골자로 한 ‘베를린 최후통첩’(1958.11.27)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59년 제네바에서 4대 승전국은 평화회담을 개최했으나 성과가 없었고 베를린에서는 적대적인 첩보전이 가열됐다. 1961년 아이젠하워의 후임자인 케네디 대통령은 빈에서 열린 회담에서 흐루쇼프에게 미국은 베를린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 견제와 암묵적 협상이 오가는 동안 동독 주민들의 탈출이 계속되자 동독의 울브리히트 서기장은 흐루쇼프의 동의를 얻어 서베를린 주변을 장벽으로 봉쇄했다. 베를린은 순식간에 양분되고 말았다.
강대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 대립과는 달리 일반 시민들의 삶은 갑자기 불편해지고 말았다. 기존에는 4대 강국의 관할 지역만 나뉘었을 뿐 자유로운 통행이 가능했지만, 장벽이 생긴 이후로는 통행과 교류가 완전히 끊겨버렸고 장벽을 넘던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사살됐다. 장벽은 도로 하나, 건물 하나 사이를 관통하면서 세워졌고, 많은 연인과 가족들이 강제로 이별을 겪어야 했다.
크리스타 볼프의 소설 『나누어진 하늘』(전영애 옮김, 민음사, 2012) 표지.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의 과거와 현재를 다룬 연구서 『베를린, 베를린』 표지.
동독 작가 크리스타 볼프의 소설 『나누어진 하늘(Der Geteilte Himmel)』(1963)은 이 시기가 배경이다. 서독의 과학자 만프레드와 사랑에 빠진 19세 동독 소녀 리타는 베를린 장벽으로 인해 이별하게 된다. 이 소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기에 리타가 공장과 사범학교에서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의 일원으로 성장하면서 이별을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크리스타 볼프는 소설 속에서 리타의 입을 빌려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서독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있지만, 구호로만 평등을 외치는 동독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어떤 체제든 모순과 부조리가 존재하는 한계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강요한 상처를 응시한 이 작품은 동·서독에서 모두 화제가 됐고 오늘날까지 독일 분단을 상징하는 대표작으로 남았다.
현실의 ‘리타’와 ‘만프레드’는 단지 서로를 그리워하기만 하지 않았다. 그들은 행동했다. 1964년 베를린으로 유학을 온 대학생 ‘알투르 짐머’는 분단의 비극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지 3년 정도가 지난 그 시기에 많은 동독 시민들이 장벽을 넘다가 목숨을 잃었고, 장벽을 감시하는 동독 군대의 감시탑과 초소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알투르 짐머는 고향 친구들의 소개로 ‘터널을 파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동독에서 탈출하려는 친구들과 가족, 연인들을 위해 곡괭이와 삽을 들었다. 의기투합한 20대 청년들은 조잡한 장비로 터널을 파기 시작했다. 수직으로 12~15m를 판 다음 직선으로 150m 정도를 뚫고 나가는 이 작업은 밤낮으로 이어졌다. 중장비를 사용할 수 없었기에 작은 삽과 망치, 소형 곡괭이로 작업했고, 터널에서 나온 흙더미를 이웃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지하실에 쌓았다. 산소펌프를 이용해 터널 안으로 산소까지 공급하면서 그들은 마침내 동베를린 지역으로 뚫고 나가는 데 성공했다.
가로 세로 1~2m에 불과한 그 좁은 터널을 이용해서 57명의 동독인들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했다. 이 터널은 곧 발각됐고 동독 군대는 터널을 폭파했다. 그러나 알투르 짐머와 같은 사람들은 더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유지된 28년 동안 70개 이상의 터널이 굴착됐고, 이 터널을 이용해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탈출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베를린의 ‘체크포인트찰리 박물관’에는 당시 대학생들이 사용했던 장비들이 전시돼 있다.
1970년께 만들어진 동서베를린을 잇는 비밀 지하터널 모습.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앞두고 일반에 공개됐다. 연합뉴스
이 터널들은 미국과 영국 정보부가 도청을 목적으로 뚫은 터널과는 전혀 달랐다. 민간인들은 적대국의 정보를 캐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와 연인, 가족을 위해 터널을 뚫었다. 그들을 움직인 것은 냉전질서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마음’들은 훗날 ‘필연적인 우연’을 낳았다.
냉전 시기에도 동·서독의 교류는 계속 이어졌다. 서독 정부는 동독의 대서방 무역이 어려움에 처하자 스윙(Swing)이라는 무이자 장기차관을 제공했다. 이런 재정 지원을 하면서 동독 내 정치범들을 석방하도록 설득하는 등 동독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선의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우편이 오가게 되고, 방송교류도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동독 시민들은 여행 자유화를 요구했지만, 동독 정부는 계속 무시했다. 그러다가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치국 대변인으로 갓 임명된 귄터 샤보브스키의 유명한 ‘말실수’가 터졌다. 동독인들은 언제쯤 서유럽으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샤보브스키는 무심코 “지금 당장”이라고 답했다. 동독 정부의 여행자유화 조치는 단지 여권 발급 기간을 단축하는 정도에 불과했고 시행 시기도 다음날부터였다.
그러나 방송을 본 수많은 동독 시민들이 장벽으로 몰려왔다. 국경수비대는 수많은 시민을 통제할 수 없었고 무력 사용을 포기했다. 동독 시민들이 곡괭이와 망치로 장벽을 부수기 시작하자 서베를린의 시민들도 가세했고 그날 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터널을 굴착했던 사람들의 마음과 냉전적 논리에 휘둘리지 않은 서독 정부의 일관적인 포용정책이 역사적 우연을 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최근 남과 북 사이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면서 적대적 언어가 오가고 있다. 우리에게도 독일과 같은 ‘필연적인 우연’은 가능할까? 6·25전쟁 70주년인 오늘, 베를린에 얽힌 냉전의 역사를 돌아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물론 독일과 한반도의 상황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냉전 질서와 이데올로기 대립에 굴하지 않고 터널을 굴착했던 사람들의 마음과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