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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단체 릴레이 탐방]⑩ 영도유격부대 전우회

김상윤

입력 2020. 06. 17   17:19
업데이트 2023. 08. 17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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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번도 계급도 없이… 적 후방 침투하다 산화


6·25전쟁 때 극비리 부대 창설·운영 
2007년 CIA 비밀문서로 존재 드러나
부대원 900~1200명 대부분 이북 출신
작전 침투 시 본부 귀환 않는 게 원칙
적 사살·생포 4880여 명 등 전공 세워 

 

6·25전쟁 당시 부산 태종대에 본부를 두고 국가를 위해 싸웠던 ‘영도유격부대’ 출신 노장들이 지난 2013년 열린 추모제에서 전우의 희생을 기리며 헌화 및 경례하고 있다. 전우회 제공
6·25전쟁 당시 부산 태종대에 본부를 두고 국가를 위해 싸웠던 ‘영도유격부대’ 출신 노장들이 지난 2013년 열린 추모제에서 전우의 희생을 기리며 헌화 및 경례하고 있다. 전우회 제공

 

영도유격부대원들이 6·25전쟁 당시 지상공수 훈련을 받는 모습. 전우회 제공
영도유격부대원들이 6·25전쟁 당시 지상공수 훈련을 받는 모습. 전우회 제공

 

6·25전쟁 당시 태종대에 있던 영도유격부대 본부와 훈련장 지도. 전우회 제공
6·25전쟁 당시 태종대에 있던 영도유격부대 본부와 훈련장 지도. 전우회 제공


오늘날 태종대는 부산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관광지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했던 70여 년 전 이곳은 긴박한 교육훈련이 진행된 군부대 터였다. 군번도, 계급도 없이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영도유격부대원들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며 태종사 초입에 우뚝 선 기념비에는 이런 비문이 적혀 있다. ‘태종대 이 소나무 저 바위 밑에 머리카락 손톱 잘라 묻어 놓고 하늘과 바다로 적 후방에 침투하여 숨은 공 세우다 못다 핀 젊음 적중에서 산화하니, 아아! 그 죽음 헛되지 않아 호국의 넋이 되어 국립묘지 합동 위령비에 모셨도다.’ 

 
‘영도유격부대’란 이름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낯설다. 이유가 있다. 부대는 6·25전쟁 당시 극비리에 창설·운영됐고, 1952년 12월 정전협정 전 해체됐다. 정전 이후에도 한동안 베일에 가려 있다가 2007년 7월 비밀 해제된 미국 CIA 비밀문서를 통해 그 존재가 확실히 드러났다.

영도유격부대 전우회에 따르면 영도유격부대는 6·25전쟁 당시 부산 영도, 즉 태종대에 본부를 둔 유격부대였다. 부대는 일명 ‘Y부대’로도 불렸는데, 이는 영도의 영문자 Y를 딴 것으로 알려졌다. 영도부대원은 함경도와 강원도 등 이북 출신 반공 청년들이 주를 이뤘고 900~12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전우회는 영도유격부대의 지휘관이었던 고(故) 한철민 예비역 중령(당시 대위)을 제외한 나머지 부대원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었다고 설명한다. 전우회가 보유한 당시 자료에는 태종대 훈련장이 육·해 종합 유격훈련장으로 명시돼 있고 사격장 5개소, 낙하훈련장, 연병장, 유격훈련장, 해상훈련장 등으로 구성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들은 외부와 접촉이 차단된 태종대 훈련장에서 정규군사훈련과 함께 공중 강하훈련, 해상 침투 훈련 등 특수교육훈련을 받고 전장에 투입됐다.

영도유격부대원들의 작전 무대는 이북 지역이었다. 육상과 해상, 공중으로 적 후방에 침투해 내륙과 해안선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다양한 유격작전을 수행했다.

전우회 관계자의 설명에 의하면 영도유격부대원은 한번 작전 지역에 침투되면 다시 본부로 귀환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일단 작전 지역에 투입되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기에 영도유격대원들은 적진에 침투하기에 앞서 자신의 머리카락과 손톱 등을 태종대 땅에 묻으며 결의를 다졌다.

실제로 침투 대원 중 생존자는 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우회는 전사·실종자 또는 적지에 고립된 대원이 무려 800여 명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우회가 보유한 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영도유격부대는 적 사살·생포 4880여 명, 노획 1100여 건, 시설 파괴 885건 등 혁혁한 전공을 거둔 것으로 설명돼 있다.

영도유격부대는 전후에도 명확한 존재가 밝혀지지 않았기에 이러한 전쟁 기간의 공적을 인정받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더욱이 부대원들이 군번과 계급이 없는 상태로 작전에 투입됐고, 작전 지역이 이북 지역이었으며, 생존자가 많지 않았던 탓에 이들의 전과를 정확히 확인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부대의 존재가 밝혀진 이후에는 국가보훈처 등 정부의 노력으로 이런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생사조차 불분명한 대원들이 많다는 것이 전우회원들의 가슴에 남은 회한이다.

전우회는 1984년 부산 태종대에 ‘6·25 참전 영도유격부대 유적지비’를 세웠다. 노장들은 매년 이곳에 모여 치열한 유격전 과정에서 장렬히 산화한 대원들을 기리며 서로의 상처를 달랜다. 김상윤 기자

“오늘날 특전사 유사한 성격...젊은이들 부디 기억해주길…” 


  영도유격부대 전우회 한승환 사무총장  

한승환 사무총장이 전우회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상윤기자
한승환 사무총장이 전우회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상윤기자

 

“영도유격부대원 중 현재까지 생존한 분은 스무 분 남짓이에요. 이 중에서 거동하실 수 있는 분은 몇 분 없어요. 노장들이 세상을 떠나고, 제가 전우회 일에서 손을 놓는 순간 ‘영도유격부대’의 이름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질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영도유격부대 전우회의 실질적인 운영 및 관리를 전담하는 한승환 사무총장의 말이다. 한 사무총장은 영도유격부대원 출신이 아닌, 수출업에 종사하는 평범한 민간인이다. 그는 영도유격부대장이었던 고(故) 한철민 예비역 중령이 슬하에 둔 4남 1녀 중 막내아들로 전우회 일을 맡게 됐다.

“27살 무렵부터 아버지가 이끄시는 전우회 일을 조금씩 돕기 시작했어요. 사실 도왔다기보다 아버지를 그저 따라다녔죠. 제가 막내라 아버지도 저를 각별하게 생각하셨고, 저도 그런 아버지를 참 좋아하고 존경했어요. 돌아가신 부친의 뜻을 잇는다는 거창한 이유로 사무총장을 하게 된 것은 아니에요. 그저 오랜 시간 뵈어왔던 노장분들이 너무 나이가 드셨으니 조금이라도 젊은 제가 이 일을 그만둘 수 없는 거죠.”

영도유격부대는 6·25전쟁 당시 제대로 조직화된 거의 유일한 대규모 유격부대였으며, 훈련과 임무 등을 고려해 볼 때 오늘날 특수전사령부와 유사한 성격이었다는 것이 한 사무총장의 주장이다. 적진에서 수행하는 유격전의 특성에 따라 영도부대원들의 피해와 희생은 너무도 컸다. 그러나 비밀스럽게 운영된 부대였기에 그 존재가 알려진 이후에도 대원 명단 확인조차 쉽지 않았다고 한다.

“생존한 대원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뭔가 큰 보상을 바라고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신 건 아니라고 해요. 그저 나라 위해, 고향 위해 싸웠다는 거예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노장들마저 모두 세상을 떠나면 전우회도 자연히 사라지게 되겠죠. 지금 제가 관리하는 영도유격부대에 대한 수많은 자료와 그 속에 담긴 정신이 과연 후대에 계승될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영도유격부대의 이름과 역사가 잊히지 않도록 그 헌신을 젊은이들이 부디 기억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김상윤 기자 < ksy0609@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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