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국전쟁 70주년, 대중가요로 본 6.25전쟁

휴전 이후 국민 지친 마음 달래준 그 시절 유행가

입력 2020. 06. 05   17:02
업데이트 2020. 06. 0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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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물방아 도는 내력 -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박재홍 노래


‘동양의 슈베르트’ 이재호 작곡
‘울고 넘는 박달재’ 박재홍 불러
부산 피란살이 격변의 상황 속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 노래 

 


<물방아 도는 내력>은 6·25전쟁 휴전 직후 불린 노래다. 발표 시기는 전쟁 이후지만 노래의 모티브는 전쟁이 한창이던 부산 임시수도에서의 격변 상황(1952년 5월 25일)을 노랫말로 엮었다. 노랫말 속의 물방아는 물레방아다. 시골 전원(田園)을 상징하는 이 물방아는 도연명(365~427. 중국 동진 심양 사람)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속 다섯 그루 버드나무와 함께 권세를 행사하는 벼슬살이와 대칭되는 촌부(村夫)의 청빈한 삶을 상징한다. 노래 속의 화자는 혼탁한 현실 사회를 도외시하고 초가집과 사랑방이 있는 정든 땅으로 회귀한다.

노래는 지극히 목가적(牧歌的)이다. 1129일간의 6·25전쟁이 휴전된 직후에 박재홍이 불러서 공전의 히트를 한 노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친 국민 심신에 위로와 에너지를 불어 넣어준 유행가다.

물레방아는 물의 힘으로 바퀴를 돌려 곡식을 찧는 방아이며, 주로 개울물을 유입하기 좋은 동구 밖에 설치해 두고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던 것이 우리의 전통관습이다. 물레방아에는 물이 떨어지는 힘을 이용하는 것과 흘러가는 힘을 이용하는 것 두 가지가 있다. 충북 음성지방에서는 전자를 동채방아, 후자를 밀채물레방아라고 하고, 경북 청도에서는 후자를 밀방아로 부른다. 동채방아 바퀴는 방앗간 밖에 설치하나, 밀채물레방아의 바퀴는 집안에 두는 것이 보통이다. 동채물레방아는 물의 낙차가 크면 클수록 힘을 더 얻는다. 일반적으로는 개울 옆에 도랑을 파서 물을 대지만, 이를 위한 보(洑:논에 물을 대기 위해 둑을 쌓고 흐르는 냇물을 가두어 두는 곳)를 따로 마련하는 곳도 있다. 이 방아에는 대부분 방아 틀을 한 대 걸지만, 물이 많은 데서는 좌우 양쪽에 두 대를 설치한다. 이 방아를 양방아(강원 도계지방) 또는 쌍방아(전남 구례, 충북 음성지방)라고도 한다. 방아 굴대에 설치된 눌림대가 서로 다른 방향을 취하고 있어서 방아 공이가 번갈아 가며 오르내린다. 재래식은 방아가 모두 나무이므로 궁글목 양끝처럼 닳기 쉬운 데는 끌로 파고 질이 단단한 박달나무 조각을 박아 둔다. 예로부터 이 물레방앗간에는 금기의 관습이 있었다. 방앗간 도깨비를 화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임신부가 방아 공이를 깔고 앉기, 방아로 만들어 쓴 나무는 화목(火木)으로 사용 금지, 액막이를 위해서 훔쳐 간 방아를 주인이 나서서 찾지 않기, 방아의 머리 쪽에 집안의 방문이나 조상의 무덤이 오지 않도록 하기, 방앗간 고사(제사)는 반드시 해진 뒤에 지내기 등등이다.

당시 27세이던 박재홍은 1927년 시흥에서 태어나 은행원으로 근무하다가 광복 후인 1947년 당시 오케레코드가 주최한 신인콩쿨대회에서 입상, 데뷔했다. 그는 1948년 <눈물의 오리정>, 1949년 <자명고 사랑>, <제물포 아가씨>, <마음의 사랑>을 히트하고, 1950년 반야월이 창립한 남대문악극단 단원으로 <울고 넘는 박달재>를 취입했는데, 이후 한 달 만에 6·25전쟁이 발발한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나라가 치르고, 전투는 군인이 하며, 국민들은 피란살이를 해야 한다. 그러한 전쟁 통에서도 삶은 이어지고 문화는 생멸한다. 대중가요를 포함한 모든 문화예술의 가닥도 마찬가지다. 부산으로 피란을 간 박재홍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쇼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1954년 말에는 부산의 도미도레코드 전속으로 이 노래와 <향수>, <슬픈 성벽> 등을 취입했다. 1956년 신신레코드, 1959년 아세아레코드를 전전했으며, 1960년대 오아시스 쇼단을 창설해 단장을 역임했다. 1970년대부터는 주로 극장무대에서 활동했으며, 1980년 12월 1일부터 방영된 컬러TV시대에는 원로 가수로서 방송출연도 활발히 했다. 그러던 중 1989년 3월 지병으로 향년 63세로 타계했다.

1절 가사의 길삼은 1954년 도미도레코드의 판에는 기심으로 나와 있다. 기심은 국어사전에 풀·잡초에 대한 낱말로 나와 있지 않고, 기심(欺心, 자기 양심을 속임)의 뜻만 있다. 다만, 논밭에 난 잡풀의 뜻인 김이라는 말이 한자 없이 나와 있을 뿐이다. 김은 기음의 줄임말이며, 그 기음은 논밭에 난 잡풀인데, 이것을 뽑아 없애는 것을 ‘기음맨다’, ‘김 맨다’고 한다는 것. 아무튼 김은 기슴이라는 옛말(古語)에서 유래한 것으로, 기슴이 기음이 되고, 기음이 김이 되어 요즘 말로 쓰고 있다. 이것을 남도 지방에서는 구개음화 현상인 지심으로 발음하며 ‘지심 맨다’는 표현으로 사용한다.

이 노래의 작곡가 이재호의 본명은 이삼동으로, 1919년 진주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 형에게 트럼펫을 배웠고, 진주고등보통학교(진주고)를 다니다 중퇴하고 일본 도쿄고등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귀국 후 처음에는 콜롬비아레코드에서 무적인이라는 필명으로 작사·작곡을 해오다가 곧 태평레코드로 옮겨 이재호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는 백년설과의 콤비로 1938년 <북방여로>, 1940년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산팔자 물팔자>, <고향설>, <어머님 사랑> 등 히트곡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어 <불효자는 웁니다>, <망향초 사랑> 등으로 인기를 모으고, 이후 태평연주단을 이끌고 국내와 만주 일대까지 순회공연해 이름을 떨쳤다. 1941년에는 <복지만리>, <대지의 항구>, 1942년 <꽃마차>, <사랑> 등을 발표했다. 이후 결핵으로 투병했으며, 광복 후에는 잠시 고향 진주에 내려가 모교인 진주중학교 음악 교사를 지낸다. 이때 작곡가 이봉조가 제자였다. 6·25전쟁 이후 다시 작곡 활동을 시작했으며, <물방아 도는 내력>, <단장의 미아리고개>, <울어라 기타줄> 등의 히트곡을 내놓았고, 1960년 7월 3일 지병인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동양의 슈베르트’라는 애칭은 41세로 타계한 그에게 너무나 가혹한 절찬(絶讚)의 별명이다.  




<유차영 한국콜마홀딩스 전무 예비역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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