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참전단체 릴레이 탐방 리멤버 솔저스

[참전단체 릴레이 탐방]⑨ 육군본부직할결사대(백골병단) 전우회

최한영

입력 2020. 06. 03   17:11
업데이트 2023. 08. 17   10:07
0 댓글

3주 특수교육 후 투입… 희생 전우 후대에 기억되길


전선 후방서 교란·유격전 등 수행 
인민군 군관 생포·1급 기밀 획득 등
6·25전쟁 중 다수의 혁혁한 공 세워 

 
전적비와 무명용사 추모비 건립…
마음의 빚 갚기 위해 60년간 활동
합동 추모식 참석 인원 이제 6~7명
노령의 회원들 시설 관리도 버거워
공로 미인정 전우들 훈장 수여 소망 

 

육군본부직할결사대(백골병단) 결사 11연대 1대대 소속 장병들이 1951년 4월 강릉에서 찍은 사진. 사진=백골병단전우회
육군본부직할결사대(백골병단) 결사 11연대 1대대 소속 장병들이 1951년 4월 강릉에서 찍은 사진. 사진=백골병단전우회

 

육군본부직할결사대(백골병단) 전인식(가운데) 전우회장을 비롯한 전우들이 전우회 사무실에서 빛바랜 태극기와 백골병단 전적비 모형 등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한영 기자
육군본부직할결사대(백골병단) 전인식(가운데) 전우회장을 비롯한 전우들이 전우회 사무실에서 빛바랜 태극기와 백골병단 전적비 모형 등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한영 기자

 

전인식(맨 왼쪽) 전우회장이 지난해 6월 4일 열린 ‘6·25전쟁 참전 68주년 및 전몰장병 합동 추모식’ 후 자료사진을 보며 군 관계자들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전인식(맨 왼쪽) 전우회장이 지난해 6월 4일 열린 ‘6·25전쟁 참전 68주년 및 전몰장병 합동 추모식’ 후 자료사진을 보며 군 관계자들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전인식 전우회장이 지난해 6월 4일 강원도 인제군 백골병단 전적비 앞 광장에서 열린 ‘6·25전쟁 참전 68주년 및 전몰장병 합동 추모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조용학 기자
전인식 전우회장이 지난해 6월 4일 강원도 인제군 백골병단 전적비 앞 광장에서 열린 ‘6·25전쟁 참전 68주년 및 전몰장병 합동 추모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조용학 기자


6·25전쟁 당시 건국대 2학년생이었던 젊은이는 70년 전의 상황을 날짜까지 또렷하게 기억하며 증언했다. 삶과 죽음이 한 끗 차이였던 전선에서 전우들을 떠나보냈던 슬픔을 떨치기에는 70년의 시간도 짧은 터였다.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이들의 이름을 수소문해 훈장을 상신하고, 추모비·기념관을 세우며 전우들을 기억해줄 것을 후대에 당부하고 있다.

3주 특수교육 받고 곧바로 투입

육군본부직할결사대(백골병단)는 6·25전쟁 초기인 1951년 초부터 전선 후방에서 교란과 유격전 등을 수행했던 부대다. 정부는 1950년 12월 하순부터 이듬해 1월 3일까지 대구 육군보충대에서 대기 중이던 의용경찰과 군 낙오병, 학생 등 6000~7000여 명 중에서 학력과 사상, 신체상태 등을 고려해 800여 명을 선발한 후 대구 육군정보학교에 입교시켰다.

백골병단 전인식 전우회장은 “기초군사훈련 과정에서 ‘적기가’(赤旗歌) 등을 소리 높여 부르며 행군하는 와중에도 우리들이 적 후방에 침투하는 결사유격대라는 것을 몰랐다”고 회상했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 사이 젊은이들은 그렇게 국가의 부름에 응했고, 맡겨진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이들은 3주간의 특수교육을 받고 전선 후방에 투입됐다. 1951년 1월 25일, 군은 교육을 마친 백골병단 장병 중 임시장교 124명을 국방부 장관 명의로 임관시키고, 병사는 이등중사(병장)~이등상사(중사) 사이의 계급을 각각 부여했다. 결사 11·12·13연대로 나뉘어 후방에서 작전 중이던 이들은 1951년 2월 20일 강원도 명주군 연곡면 퇴곡리(현재 강원도 강릉)에 우연히 집결했다. 이 자리에서 채명신 육군중령(이후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 지냄)은 부대명을 백골병단으로 명명하고 자신이 사령관이 됐다.

기밀문서 노획·고위 지휘관 생포 등 전공 

백골병단은 6·25전쟁 중 다수의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구룡령(강원도 홍천군 내면)에서 인민군 정치보위부 군관 등을 생포하고 1급 기밀문서인 전투상보를 노획해 수도사단으로 인계한 것이 대표적이다. 병력 수, 탄약 보유현황 등이 적혀 있던 기밀문서 노획은 적 1개 여단을 궤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른 작전 중에는 중장 계급의 적 지휘관을 생포하기도 했다.

이 같은 활약은 많은 부대원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백골병단 출신 노병(老兵)들은 11연대 소속 윤창규 대위를 이구동성으로 언급했다. 윤 대위는 1951년 3월 24일 백담사를 떠나 설악산 영봉 방향으로 퇴각 중 포위공격을 받자 적을 유인해서는 수류탄 안전핀을 뽑아 자결했다. 이 와중에 다른 전우들은 탈출할 수 있었지만, 상황은 쉽지 않았다. 전 회장은 400여 명의 병력을 이끌며 탈출로를 찾았지만 5일 이상 굶으며 행군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120여 명이 아사(餓死·굶어 죽음)하기도 했다. 다른 장병들도 다수 전사해 백골병단 소속 생환 장병은 1951년 4월 중순에 283명에 그쳤다.

백골병단 전적비 등 건립하며 기록 남겨

이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빚으로 남았다. 전 회장을 비롯한 전우들이 1961년 전우회를 만들고 이후 60년간 활동을 이어온 이유다.

백골병단전우회 전우들은 1990년 11월 강원도 인제에 백골병단 전적비를 건립한 것을 시작으로 2003년 6월 5일 전몰장병 중 무명용사 303명을 기리기 위한 무명용사 추모비, 2006년 6월 5일 윤창규 대위의 살신성인을 기리기 위한 충용비 등을 만들었다. 전 회장은 지금까지 38권의 백골병단 관련 저서를 발간했다. 매년 6월에는 백골병단 전몰장병 합동 추모식을 거행하며 희생을 기리고 있다. 올해 추모식은 오는 18일에 열린다.

세월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만큼, 이제 합동 추모식에 참석하는 백골병단 전우는 6~7명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계속해서 기록을 남기고, 추모식을 이어가는 이유는 명확하다.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나섰던 자신들의 정신은 지금 시대에도 필요한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전 회장은 “요즘 젊은이들은 나라보다 자신의 안녕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며 “‘자신의 안녕을 생각한다면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젊은이들에게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흘러가는 세월은 잡을 수 없고 우리들은 늙고 병들어 백골병단이 건립한 현충시설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며 “관련 기관·단체가 이 시설들을 잘 관리·보존해 안보시설이자 충용시설로 활용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덧붙였다. 전쟁 당시 전우들의 활약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노병들의 ‘자신들의 정신이 전해지기를 바란다’는 소박한 희망이 이뤄질지 지켜볼 일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지난해 9월, 아직까지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전우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신청한 훈장들이 수여됐으면 한다는 희망도 드러냈다. 전 회장은 “1951년 2월 7일 침투작전 직전 정일권 당시 육해공군 총참모장이 훈시하며 ‘참전자 전원에게 두 계급 특진과 빛나는 훈장이 기다린다’고 약속했던 것을 기다리는 것도 한계에 이르고 있다”며 “물론 훈장을 받기 위해 싸운 것은 아니지만, 구국의 일념으로 위국헌신한 전우들을 기억해달라”고 강조했다.

최한영 기자 < visionchy@dema.mil.kr >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