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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도 다시, 또 다시… 5번 파괴 딛고 5번 재건되다

기사입력 2020. 05. 22   17:25 최종수정 2020. 05. 24   14:53

<47> 이탈리아 몬테카시노 수도원

6세기 성 베네딕토의 건축물
서유럽에서 수도원의 발상지
재해·전쟁에 파괴·재건 반복
복원된 문에 파괴자 상징 새겨
가톨릭의 성지 순례지로 각광 

 

몬테카시노 수도원 전경.

사진=www.tripsavvy.com
프라 안젤리코가 1441년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린 성 베네딕토의 초상화.
 사진=산 마르코 미술관 소장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모습. 
사진=nationalinterest.org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약 120㎞ 떨어진 라치오 주(州)의 카시노 시(市)에 있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529년경 성 베네딕토에 의해 설립된 건축물로 서유럽에서 수도원의 발상지로 여겨진다. 이곳은 야만족의 침략과 자연재해 그리고 전쟁으로 총 5번 파괴되고 5번 재건됐다. 581년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기원한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랑고바르드족의 침략으로 처음 파괴된 후 884년 사라센족과 1046년 노르만족의 침공으로 다시 폐허가 됐다. 재건 후 1349년 지진으로 다시 파괴됐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독일군이 수도원 인근을 점령하고 요새화하자, 로마 진출을 꾀하던 연합군의 융단 폭격으로 뼈대만 남은 채 초토화됐다. 전후 복원은 1964년 완료됐다.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지어진 수도원의 규모는 가로 100m, 세로 200m이다. 수도원을 비롯해 대성당, 성 베네딕토와 여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무덤, 박물관, 도서관, 문서 보관소 등을 갖추고 있다. 인근에는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전사한 연합군·폴란드군·독일군의 묘지가 있다.


529년경 성 베네딕토에 의해 설립, 랑고바르드족의 침략 이후 연이은 파괴

서양 수도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성 베네딕토(480~550 추정)는 529년경 ‘카시노에 있는 산’이라는 뜻인 해발 519m의 몬테카시노(Monte Cassino) 산꼭대기에 정착해 아폴로의 로마 사원 유적지가 있던 자리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581년경 수도원이 랑고바르드족의 침략으로 파괴되자 수도사들은 로마로 피신했다.

약 140년간 방치됐다가 717년 교황 그레고리오 2세(669~731)에 의해 재건됐지만, 884년 사라센족과 1046년 노르만족에 의해 재차 파괴됐다. 수도원은 11세기 다우페리우스(교황 빅토르 3세)와 오데리시우스가 원장을 하던 시대에 전성기를 이뤘다. 하지만 1349년 지진으로 다시 파괴됐다가 교황 우르바노 5세(1310~1370)에 의해 1362년 재건됐다.


1944년 몬테카시노 전투 중 연합군 폭격으로 모두 파괴

네 차례에 걸쳐 재건된 수도원의 앞날에 전쟁의 위기가 다가온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엽 독일군은 수도원 인근에 사령부를 세우면서 이곳은 몬테카시노 전투의 중심이 된다. 1943년 시칠리아 섬에 상륙한 연합군은 이탈리아 반도 본토까지 밀고 올라갔다. 이에 히틀러는 공군원수 알베르트 케셀링(1881~1960)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이탈리아 전선의 전권을 부여해 로마를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케셀링은 로마 남쪽에 총 6개의 단계적 방어선을 구축했다. 구스타프 라인이 주 방어선이었는데, 수도원은 이곳에 직접 닿아 있었다.

독일군은 수도원 인근이 수많은 계곡과 가파른 언덕들로 이뤄져 있어 기관총과 대포 등으로 방어막을 구축했다. 연합군은 1944년 1월부터 3월까지 몬테카시노에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정면 공격을 감행했지만, 매번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케셀링은 역사적 장소가 전쟁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막고자 독일군이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했으며 연합군에게도 사령부를 설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연합군 지휘관들은 이를 독일군의 기만작전이라고 단정했다. 연합군은 제4인도사단의 프랜시스 터커 소장이 구해온 책을 통해 수도원의 외벽 두께만 3m가 넘어 웬만한 포격으로 파괴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진행된 수도원 폭격을 두고 연합군 지휘관들 사이에서도 찬반이 갈렸다. 결국 이탈리아 전선 연합군 총사령관 해럴드 알렉산더(1891~1969)에 의해 폭격이 결정됐다.

1944년 2월 15일 142대의 B-17 폭격기와 47대의 B-25, 40대의 B-26 중폭격기가 4시간 동안 총 493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수도원은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됐다. 이곳에 피란처를 마련한 수도사, 이탈리아 피란민 등 무고한 시민 230명이 사망했다. 폭격이 있기 전 독일의 율리우스 슐레겔 중령에 의해 1만2000권에 달하는 장서들과 예술품들이 모두 바티칸의 안전한 곳으로 옮겨지면서 문화재 소실은 막을 수 있었다.


전후 복원 때 청동 문에 처음 파괴한 랑고바르드족, 마지막 파괴한 연합군 새겨 넣어

폭격 후 수도원의 뼈대와 파괴된 잔해들은 독일군의 은·엄폐에 사용됐다. 이곳에 투입된 독일군 최정예로 꼽히는 제1공수사단은 그 후에도 3개월간 주둔하며 연합군을 괴롭혔다. 연합군은 5만5000명가량의 사상자를 냈고 독일군 또한 2만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결국 연합군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1969년 최종 확정된 미 육군 공식 문서는 ‘폭격 당시 수도원은 독일군에게 점거돼 있지 않았다’라고 명시했다. 수도원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이 적절했는지를 두고 오늘날까지 논란이 있다.

전쟁이 끝나고 수도원의 재건은 1950년대에 시작됐다. 이탈리아 국민이 낸 성금으로 건립됐는데, 1066년 다우페리우스를 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주조된 청동 문이 발견돼 복원에 사용됐다.

현재 수도원의 청동 문 아래 왼편에는 수도원을 처음 파괴한 랑고바르드족의 얼굴이, 오른편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수도원을 파괴한 연합군의 폭격을 뜻하는 철모와 폭탄이 새겨져 있다. 1964년 10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가 완공된 수도원을 찾아 봉헌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가톨릭의 성지 순례지로서 오늘도 많은 이들이 찾는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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